3화
하현은 거지가 소리친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거지는 더 열이 뻗친다는 듯 씩씩거리며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이놈이!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데 대꾸도 없어?!”
“어르신?”
하현은 반사적으로 거지의 말을 되물었다.
아무리 봐도 그 거지는 하현보다 몇 살 밖에 많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네놈은 눈이 있으면 이 허리의 매듭을 봐라!”
거지는 자연스럽게 허리에 묶인 매듭을 하현에게 내보였다.
일결(一結).
그 매듭은 구파일방 중의 하나인 개방에 소속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현은 그 매듭이 무슨 뜻인지 알아챌 만한 식견이 없었다.
대강 눈치로 뭔가 대단한 게 있구나 하고 때려 맞출 뿐.
거지는 그 모습을 보고 하현이 매듭 때문에 겁먹었다고 지레짐작하고는 위풍도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잘 알겠지?”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뭣이? 어디서 빌어먹던 거지인데, 남의 구역에서 동냥질하면 안 된다는 법도를 어겨놓고서는 그게 할 소리냐?”
“아아-.”
하현은 이제야 거지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가 저잣거리의 어른들에게 당과니, 만두니 하는 것들을 얻어먹은 것을 보고 이 거지가 오해하는 것이었다.
하현은 짐짓 어른스러운 말투로 거지에게 말했다.
“나는 거지가 아닙니다. 오해가 있었나 본데, 제가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이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려고? 내, 다시는 네가 우리 구역을 넘보지 못하게 나 대 개방의 일결 제자 마윤철이 본때를 보여주마.”
자신을 마윤철이라 칭한 거지는 허리춤에서 타구봉(打狗棒)을 꺼내 들었다.
이 타구봉은 얼마 전 그가 백의개에서 일결 제자로 인정받고 난 후에 분타주에게 하사받은 타구봉이었다.
이럴 때 쓰라고 준 것이 아니건만, 받고 나서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던 마윤철은 근질거리는 손을 풀 시기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짜고짜 하현을 향해 타구봉을 휘둘렀다.
쉬익-
마윤철의 손에서 타구봉이 제법 매섭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나름 이 구역을 책임지는 개방도인지 범인이 본다면 깜짝 놀랄만한 속도였으나, 하현의 눈에는 하염없이 느리게만 보였다.
‘느려.’
지난 두 달간 하현이 쫓았던 토끼나, 족제비의 움직임보다도, 심지어는 며칠 전 어렵지 않게 잡아먹었던 청설모보다도 더 느린 것처럼 보였다.
휙-
하현은 간단하게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타구봉을 쉽게 피해냈다.
“에잇!”
요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마윤철은 재차 하현에게 타구봉을 휘둘렀건만, 이번에도 역시 하현에게 닿을 리 만무했다.
몇 번의 휘두름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마윤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이를 부득 갈며 소리쳤다.
“이익! 이놈이. 몸 하나만큼은 날래구나. 그럼 이것도 받아봐라.”
하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윤철의 타구봉이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날아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윤철은 개방에서 배운 초식을 하현에게 펼쳐내고 있었다.
‘이건 그냥 못 피한다.’
막무가내로 날아오던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 타구봉은 간단하면서도 신묘한 묘리를 품고 있었다.
물론 마윤철이 그 원리를 모두 이해하고 펼치는 초식은 아니겠으나,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받아라!”
쉬이이이익-!
마윤철의 타구봉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개방의 무공!”
“우리도 일결 제자가 되면 저런 봉법을 배우는 거야!”
“역시 대장이야!”
마윤철의 뒤를 따라오던 세 명의 백의개는 마윤철의 무공을 보며 감탄을 금치 않았다.
뻐억-!
“으악!”
곧이어 비명과 함께 한 명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
백의개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들이 지금 보는 것이 사실인지 실감이 나지 않아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쿨럭, 쿨럭.”
쓰러진 것은 타구봉을 휘둘렀던 마윤철이었다.
그는 복부를 부여잡고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타구봉은 어느새 떨어뜨렸는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후-”
그리고 하현은 잠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는 아직 오른발을 들고 있었다.
조금 전 마윤철이 하현에게 실낱같은 내공이 담긴 봉을 휘두를 때, 하현은 나름 매섭게 날아오는 봉과는 달리 복부 쪽은 무방비에 가깝게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재빨리 복부에 내공을 실은 발을 찔러넣었고, 발차기에 그대로 처박힌 마윤철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대장! 정신 차려, 대장!”
그 고통이 어찌나 심했는지 마윤철은 두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에잇.”
하현은 백의개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힘껏 다리를 놀려 그 자리를 떠버렸다.
백의개 중 한 명이 하현을 잡으려 했지만,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하현을 보고서는 쫓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경공···. 경공이야. 무공을 익혔나 봐.”
“이제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무공을 익힌 자가 소란을 피우면 바로 분타주에게 보고해야 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한 백의개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마윤철에게 향했다.
“대장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긴, 저 도망간 자에게 당했다고 사실대로 보고하면 되지.”
세 거지는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기억이 있을 때부터 함께했던 그들이다.
그들에게 입을 맞추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 * *
“어휴. 무슨 거지가 저렇게 성질이 더러워.”
하현은 한참을 달려 인적이 드문 숲속까지 들어오고 나서야 뜀걸음을 멈추었다.
달려온 길을 유심히 살피고 나서 쫓아오는 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하현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현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상념에 빠져들었다.
“분명히, 무공이었어. 무림은 거지들도 무공을 쓰는구나.”
하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변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아 쥐어 들었다.
“이런 느낌인가?”
그리곤 지체 없이 휘둘렀다.
쒜엑-!
휘둘려진 나뭇가지에서는 평범한 나뭇가지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마윤철이 휘두를 때보다 더욱 강맹하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아냐, 아냐. 이건 조금 전에 거지가 휘두른 거랑 똑같아. 몽둥이가 날아오는 것은 날카로웠지만, 굉장히 어설펐어. 특히 하체가.”
그렇기에 발차기 한 번에 간단히 파훼 되지 않았던가.
“하체가 무방비가 되지 않으려면, 양 팔꿈치를 몸에 붙이고······.”
하현은 몽둥이를 휘두를 때 상대방이 오직 이 몽둥이만을 신경 쓰게 하기를 원했다.
최대한 온몸에 빈틈이 없도록.
“이렇게 되면, 휘두르기가 부자연스러운데···. 아! 동작을 나누면 되겠구나. 휘두를 때까지는 최대한 빠르게 상대의 몸에 몽둥이가 갈 수 있도록 최단거리를 찾고, 타격하기 직전에만 빈틈을 가려주는 거야.”
하현은 뭔가를 깨달은 듯, 몇 번 더 나뭇가지를 휘둘러 보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노려보며, 조금 전 깨달은 바대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결대로 몽둥이를 움직이자, 단전부터 흘러나온 진기가 자연스럽게 온몸을 타고 올라와 나뭇가지에 충만하게 깃들었다.
쒜에엑-!
뻐억-!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들리고, 하현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가 푸스스 부서져 내렸다.
평범한 나뭇가지로는 공력을 버티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하아-.”
하현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그가 때린 나무를 보았다.
나뭇가지와 맞닿았던 부분이 한 척이나(30cm) 푹 패여 있었다.
“와······.”
하현은 자신이 내보인 신위에 놀라고 말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조금 전에 생각보다 많은 내공을 소모했는지, 단전이 비어있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굉장한 배고픔이 찾아왔다.
하현은 주변을 살피고는 가장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내공을 어느 정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게 된 하현은 마치 원숭이처럼 보일 정도로 능숙하게 나무를 탔다.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곳까지 올라간 하현은 나뭇가지에 털썩 주저앉고는 창궁대연심공을 운기했다.
걷거나 달리면서도 창궁대연심공을 운기 할 수 있게 된 하현이었지만, 제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하는 운기는 그 효율이 달랐다.
하현은 이내 곧 운기조식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하현은 다시금 민가로 내려왔다.
어제 운기를 마치고, 산에서 토끼를 잡아먹느라 마지막으로 남은 화섭자를 써 버렸기 때문이다.
‘상점의 위치는 이미 확인해 뒀어. 어머님께서 남겨주신 은자면, 능히 화섭자 몇 장은 살 수 있을 거야.’
어머니가 주머니에 담아둔 패물도 팔아먹는다면 은자보다는 더 큰 돈이 될 것이 분명했으나, 하현은 그 패물들을 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반지와 귀걸이는 어머님의 유품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은자만 사용하면서, 남궁세가까지 가야 한다.’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에 비하면 합비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정확한 지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길어야 2주일이면 충분히 도착하리라고 생각했다.
딸랑딸랑-
하현이 문을 열고 상점에 들어서자, 문에 달려있는 방울 소리와 함께 상점 주인의 목소리가 하현을 반겼다.
“어서옵···. 거지잖아? 미안하지만, 우리는 음식 파는 가게가 아니라서 동냥할 음식이 없다.”
“동냥하러 온 게 아닙니다. 물건을 구하러 왔습니다.”
“응?”
주인은 두 눈을 자세히 뜨고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이채를 띠었다.
목 아래는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얼굴만은 깨끗했기에.
상점 주인은 거지가 아니라 손님이라는 판단을 하자마자, 낯빛부터가 달라졌다.
게다가 하현은 영락없는 어린아이건만, 존댓말로 하현에게 물었다.
“무슨 물건을 구하러 왔소?”
“화섭자 있습니까?”
“화섭자라…. 불길이 약한 저급한 것이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몇 개 있소만. 얼마나 필요하시오?”
하현은 미리 꺼내놓은 은자 하나를 주인에게 건넸다.
“이 은자 한 개만큼.”
“은자 한 개라면···. 열 장을 드릴 수 있소. 괜찮으시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화섭자의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는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남궁세가를 향해 빨리 출발하고픈 마음뿐이었다.
“또 오시오.”
은자와 화섭자 열 장을 맞교환한 후, 주인은 하현을 보고 싱글벙글 웃으며 배웅까지 했다.
그때 철판을 긁는듯한 음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라이 사기꾼 정가(家)야. 화섭자가 귀한 물건이라고는 하나, 그 은자라면 능히 서른 장은 쥐여주어야 할 것을, 절반도 아니고, 삼분지 일만 건네주는 게냐?”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니, 머리는 봉두난발에 의복은 다 해져 입으나 마나 하고, 허리춤에는 더러운 호리병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늙은 거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씩 비틀거리는 꼴이 이미 술에 취한 것으로 보였다.
“사기꾼이라니! 내가 정당한 가격을 제시했고, 여기 있는 소협이 응한 것뿐이네. 취한 거지는 갈 길 가시게나.”
“낄낄. 어디 보자···. 얼굴을 보아하니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 개방도는 낯을 씻지 않아. 그런데 의복은 영락없이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는구먼. 내 거지 경력으로 보아하니, 두어달은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데? 은자가 있으니 새 의복을 샀어도 됐을 터인데, 굳이 옷은 사지 않는다? 도대체가 짐작이 가지 않는구나.”
늙은 거지는 하현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결론이 나지 않았는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쯧-. 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어서 사기꾼 정가는 잔돈을 거슬러 주던지, 화섭자를 스무 장 더 내어주든지 해라!”
“에잇, 재수 옴 붙으려니까 오전부터 거지를 만나서는.”
주인은 소매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하현에게 건넸고, 하현은 엉겹결에 받아 들었다.
“낄낄. 이것 참 꼬시구나.”
“퍽이나!”
주인은 거지에게 성질을 팍 내고는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거지는 그 모습이 진심으로 웃긴지 한참을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하현은 두 사람의 모습이 굉장히 막역하다고 느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현은 거지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거지의 눈에서는 이채가 띄었다.
거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어르신이라고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 개(丐)는 정가를 골리고 싶은 것뿐이었지만, 감사 인사는 잘 받겠네. 어디 가서 그렇게 뒤통수 맞고 다니지 말게나.”
“예. 알겠습니다.”
하현은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이제는 정말로 남궁세가를 향해 다시 달려야 할 때였다.
“저놈입니다! 분타주님!”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며칠 전 하현에게 복부를 얻어맞고, 혼절한 개방의 일결 제자 마윤철이었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는 어제보다 더욱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그 뒤에는 세 명의 백의개 대신에, 덩치가 커다란 거지가 한 명 따라오고 있었는데, 마치 어린아이들 싸움에 큰형님을 데려온 것처럼 보였다.
“마···. 윤철이라고 했었나.”
하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이 순간, 일 분 일 초가 바쁘건만,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타주님. 저 거지가 우리 구역을 넘보는 거지입니다. 혼쭐을 내주십시오.”
마윤철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분타주는 무려 개방의 삼결 제자.
무림에서도 능히 고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수준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어…?”
하지만 의기양양한 마윤철과는 다르게, 분타주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분타주님?”
의문에 가득 찬 마윤철이 분타주를 불러 보았지만, 분타주는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무시하고, 순식간에 경공을 펼쳐 하현의 앞까지 도달했다.
‘엄청나게 빠르군.’
하현은 그의 신위를 보며 도망쳤어도 소용이 없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앞에 분타주라는 덩치 큰 거지는 자신보다 훨씬 빨라 보였다.
하현은 눈앞까지 당도한 분타주를 보며 한껏 긴장했지만, 이내 그 긴장은 풀려버리고 말았다.
분타주가 갑자기 배를 바닥에 깔고 하현에게 큰절을 올렸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하현의 뒤에 있는 거지 노인에게.
“자, 장로님! 대 개방의 고시현 분타주 복우. 취월걸개(醉月傑丐) 제 일(一)장로님을 뵙습니다!”
취월걸개라고 불린 거지의 허리께에는 일곱 개의 매듭이 묶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