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복우? 오냐.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그때는 코찔찔이 일결 제자였건만 많이 컸구나."
"그때가 벌써 10년 전입니다. 장로님. 그런데 예까지는 무슨 일로······."
"여기 사는 정가와 오랜 인연이 있어서. 술이나 좀 빌어먹으러 왔지."
취월걸개는 그 대답이 뭐가 웃긴지 낄낄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곳 분타주까지 되는 분이 무슨 일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시는가?"
“우리 개방 제자를 공격한 자가 있어 사태를 파악하러 나왔습니다.”
“뭣이?”
취월걸개가 화를 낸 순간, 일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반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일 뿐인 거지였건만, 지금은 가까이에만 있어도 살갗이 벗겨질 것만 같은 날카로운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현이 가장 잘 느끼고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내공을 한껏 끌어올려 기운을 밀어냈다.
“그놈이 누구냐.”
“네?”
“우리 개방도를 공격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취월걸개가 싸늘하게 물어왔다.
분타주는 지금 빨리 오해를 풀지 않으면, 저 광견(狂犬)으로도 불리는 저 다혈질의 장로님이 무슨 큰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장로님!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습니다. 공격이라고는 하나, 애들 싸움 정도입니다. 다만 그 아이가 무공을 사용하였다 하여 제가 직접 나선 것입니다.”
“애들 싸움?”
“제 뒤에 있는 일결 제자 마윤철은 이제 막 타구십팔초를 이성까지 터득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거지에게 속절없이 당했다고 합니다.”
“다른 거지라?”
다행히 분타주의 설명이 통했는지 취월걸개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리고 그 틈에 마윤철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지금 장로님 뒤에 있는 저놈입니다! 네 이놈. 도망친다고 못 찾을 줄 알았느냐! 감히 우리 개방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줄 알고!”
하현은 어이가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건 것도 마윤철이고, 공격한 것도 그였다.
그런데 이런 적반하장이라니.
현재 그의 상황을 생각해서 조용히 넘어가려 했지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먼저 시비를 걸어 왔잖아! 내가 자리를 피하겠다고 했는데도 저 몽둥이를 휘둘렀고!”
“나는 우리 구역을 넘본 자에게 응징하려 한 것뿐이다! 어디서 굴러온 거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냥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개방을 통해서 했어야지!”
“나는 거지가 아니라니까?”
두 소년이 바락바락 악을 써가며 소리를 지르자, 두 어른 거지는 슬슬 상황이 파악되어갔다.
분타주가 마윤철에게 인상을 써가며 말했다.
“마윤철. 네가 먼저 타구봉을 휘둘렀다는 소리냐? 나한테는 분명 다짜고짜 공격해 왔다고 했으면서?”
“그러니까, 그게······.”
“게다가. 심지어는 먼저 공격을 했는데 얻어맞아서 기절까지 했고?”
“···예. 분타주님.”
분타주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에 마윤철은 기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넌, 오늘 돌아가서 두고 보자.”
분타주는 진심으로 화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무림 곳곳에서 일어나는 참변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이다.
아주 혹시 몰라 따라 나왔더니 흉수가 저런 어린아이여서야.
게다가 취월걸개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장로의 앞에서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해 얼굴이 후끈거리려 했다.
“그렇지만 무공을 쓰는 자라는 건 거짓말은 아닙니다! 제 타구십팔초를 정면으로 받아냈단 말이에요!”
“뭐?”
이번에는 취월걸개가 조금 놀랐다.
아무리 무림소졸인 일결 제자가 펼친 타구십팔초라고는 하지만 범인(凡人), 그것도 어린아이가 파훼해낼 수 있는 초식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내 마윤철을 보며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쯧쯧. 네 눈은 옹이구멍이구나. 이 아이가 어딜 봐서 거지란 말이냐? 거지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낯이 깨끗한 거지를 본 적 있느냐?”
“끙······.”
실제로 하현은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미공자였다.
입고 있는 옷만 아니었다면 거지 소리는 절대 듣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요즘 같은 혼란한 시대에 무공을 익힌 자를 허투루 보내지 않은 것만은 칭찬하마. 우리 개방은 무림의 눈과 귀다. 앞으로도 작은 소식이라고 하찮게 생각지 말고 지금처럼 모든 정보를 소중히 하라.”
취월걸개의 말에 마윤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그래. 일결 제자야. 이쪽으로 와 보거라.”
마윤철은 종종걸음으로 취월걸개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말이다.”
“넵. 장로님.”
“아까 이 아이에게 얻어맞았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그러자 마윤철은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얻, 얻어맞은 것이 아니라 제가 방심하여······!”
“그러면 방심하지 않으면 당연히 네가 이길 상대라는 소리렸다?”
대답을 듣던 취월걸개는 어느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는지 특유의 낄낄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자. 그러면 한 번 더 해 보아라.”
“네?”
“비무다. 당하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이보게 공자. 우리 제자에게 한 수 가르쳐줬다고 하는데, 한 번 더 부탁하네.”
사실 그는 조금 전 하현이 내공을 끌어올렸을 때, 그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얼마나 정순하고 깨끗한지도 한 번에 알아챘다.
-자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네. 우리 못난 제자에게 혼쭐을 내주게나.
귓속에서 울리는 듯한 전음이 울려왔다.
취월걸개는 무슨 상황인지 정황만으로 모두 파악하고, 하현으로 하여금 일결 제자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전음에 하현은 움찔했지만, 영특한 그였기에 눈치껏 지금 취월걸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그는 마윤철을 하현을 통해 혼내주려는 것을 넘어, 마윤철에게 강호가 얼마나 넓은지를 가르쳐주려 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하지만, 그 마음을 알지도 못하는 마윤철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아둔하게도 취월걸개가 자신을 위해서 판을 벌여준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듯했다.
‘쯧쯧. 강호에서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죄이지만,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큰 죄다.’
취월걸개는 마윤철이 이번 일을 계기로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다.
“나는 개방의 일결 제자 마윤철이다. 너는 이름이 뭐냐.”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다. 내 이름은 꼭 말해야 하나?”
“이익! 필요 없다! 곧 살려달라고 울고불고할 때 이름을 들으면 되니까.”
마윤철은 이번에도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하현은 그 모습에 한숨을 푹 쉬고는 주변에 쓸만한 나뭇가지가 없나 두리번거렸지만, 애석하게도 알맞은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복우!”
“네, 넵 장로님.”
“타구봉을 내놔라.”
“네?”
“잔말 말고 내놔.”
취월걸개는 복우에게서 건네받은 타구봉을 하현에게 무심히 던졌다.
“그래도 정당한 비무인데, 한쪽만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지. 이걸 쓰게나.”
하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없이 타구봉을 집어 들었다.
“나도 아직 못 만져본 분타주님의 타구봉을! 간다 이놈아!”
마윤철은 하현에게 달려들며 타구봉을 휘둘렀다.
매우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달리 꽤나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저번에 마구잡이로 하현에게 타구봉을 휘두르다 낭패를 본 일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부웅- 붕!
마윤철의 봉은 점점 빨라져 갔다.
잠시 마윤철의 공격과 공격 사이의 틈.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만 하현은 산길을 뛰며 익힌 빨리 움직이는 법으로 마윤철의 공격 범위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오호. 좋은 보법이로군.”
취월걸개의 눈이 커졌다.
물 흐르듯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보통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미 또래의 무공 수준은 아득히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보법이 유려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사문이 어디일지······.”
사실 취월걸개도 그것이 의문이었다.
오랜 세월 강호를 주유하며 무공에 대한 식견이 충분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보법이었기에.
“이얍!”
마윤철이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다시 한번 하현에게 달려들며 타구봉에 내공을 실었다.
바로 어제 하현에게 사용하려던 타구십팔초의 초식이었다.
“흐읍!”
하현이 있는 힘껏 내공을 끌어올리자 마치 세상이 느려지는 듯하게 느껴졌다.
마윤철이 내지르는 봉 끝마저 선명하게 보일 만큼.
‘역시 지금 마윤철은 허점이 많다. 어제 산에서 해본 것을 그대로 한다.’
스스로에게는 길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촌각의 시간이었다.
생각을 마친 하현은 마윤철과 똑같은 자세로 타구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쒜에엑-!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타구봉에 충만한 내공이 일집 된다.
같은 초식이건만, 마윤철이 보이는 신위와는 천지 차이.
까앙-!
대나무를 깎고 풀을 먹여 만든 타구봉끼리 부딪쳤건만, 흡사 무쇠끼리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커윽!”
단 한 번의 부딪힘 이후.
하현은 아직 타구봉을 들고 있었으나, 마윤철은 타구봉을 놓치고 말았다.
그냥 놓친 게 아니라 너무나도 강대한 힘에 손아귀가 찢어져 피를 보이고 말았다.
“후우.”
하현은 주저앉아 제 손을 붙들고 있는 마윤철을 내려다보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이겼다고는 하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정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노호성이 터졌다.
“네 이놈!”
취월걸개였다.
그는 비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건만,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하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척- 척-
그리곤 거침없이 하현의 팔을 금나수의 수로 잡아채 하현을 제압했다.
“어, 어르신 왜 이러시는…!”
“어디서 배운 것이냐!”
“크윽.”
하현은 고통에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했지만, 취월걸개는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다.
“네가 개방의 무공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그가 흥분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비록 타구십팔초가 개방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무공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개방의 일결 제자 이상이 되어야만 배우기 시작하는 무공이다.
심지어 개방은 전통적으로 무공을 비급으로 만들어 전수하지 않고, 모두 구전만으로 전수했기에, 누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절대 배울 수 없다.
“어느 놈이냐. 어느 놈이 가르쳐준 것이야! 아니, 그 전에 넌 대체 누구냐!”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대답해라! 어디서 배웠느냐!”
하현은 현재 취월걸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라고 판단했다.
“배운 적 없습니다!”
“뭐? 지금 나를 능멸하려는······.”
“저기 마윤철이 어제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한 것입니다.”
“뭣?!”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당황했는지 취월걸개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졌다.
하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공을 끌어올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르쳐준 사람은 없습니다.”
하현은 또다시 취월걸개가 달려들까 잔뜩 긴장한 채였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 허허···. 보고 따라 했다. 그게 정말인가?”
“정확히 말하면, 그대로 따라 한 건 아닙니다. 저자가 하는 것을 보고 허술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보완하며 따라 한 것입니다.”
취월걸개가 정말로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해보니, 하현의 동작은 타구십팔초의 제일초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제일초는 타구봉에 진기를 싣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초식.
그렇기에 하체나 다른 동작 없이 휘두르는 것에만 집중해 있다.
하지만 하현이 선보인 초식은 아구흘뇨(餓狗吃尿)라는 초식에 가까웠다.
제 일초를 응용하여 실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점을 보완한 초식.
그래서 타구십팔초의 후반부에나 나오는 초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결 제자가 되어야 배울 수 있는 초식이었다.
배운 무공을 그저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것.
말은 쉽지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임은 분명하다.
‘대종사.’
취월걸개의 머릿속에 이 세글자가 스쳐 간 것은 우연일까?
하현의 눈에서 그는 하현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취월걸개는 천천히 다시 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사문이 어디인가?”
“따로 사문은 없습니다.”
“사문이 없어? 그러면 어느 가문 출신인가?”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취월걸개는 그 말에 잠시 하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다른 자들 역시 그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개방에는 사연이 많은 제자가 많았네. 왜냐. 우리는 과거를 묻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니 자네에게도 과거는 묻지 않겠네.”
“그게 무슨 말씀...”
취월걸개는 하현의 말을 가로 지으며 말을 툭 내뱉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분타주도, 또 마윤철도 아주 잠시 손아귀의 고통을 잊고 경악하며 하현과 취월걸개를 바라봤을 정도니까.
“개방의···. 아니, 나의 제자가 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