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9화 (9/304)

9화

하현의 승리.

장내는 말 그대로 충격으로 물들었다.

“어······.”

어지간한 일에서도 평점심을 유지할 수 있을만큼 무예를 쌓은 남궁기철 역시 어리숙한 소리를 낼 정도였다.

“하···. 하하···. 내가 져 버렸네.”

오히려 남궁환이 가장 의연해 보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말 그대로 운이었다.

남궁환이 방심을 한 것도, 하필 하현이 무한보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도.

만약 다시 한번 붙는다면 하현이 십 중 팔구로 질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십 중 하나, 둘의 일이 바로 지금 일어났다는 것.

하현이 남궁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남궁환이 하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는 와중 남궁규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한 것이냐?!”

분명히 무한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궁규현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 명의 어린 무인들을 키워내며 그들의 보법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르친 게 그니까.

하현도 남궁규현이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아챘는지 한 번에 대답했다.

“일차 시험에서 밟았던 발자국을 기억했습니다.”

“뭐? 하하······.”

사람은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웃어버리고 만다.

남궁규현은 그냥 웃어버렸다.

‘민이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남궁규현은 하현을 보며 처음 남궁민의 재능을 확인했을 때와 같은 전율을 느꼈다.

“좋다. 당연히 불합격일 수 없지. 합격이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네가 잘한 건데. 며칠 내로 다시 부르겠다.”

“알겠습니다. 형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궁환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하하, 내가 하고 싶은 말인걸. 엄청난 동생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네.”

하현에게 진 것에 대해 분함이나 구김 따위는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소화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걸.’

남궁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하현을 보며 생각했다.

“나왔다!”

하현이 연무장에서 나오자 다음 순번을 기다리고 있던 응시생들이 반색했다.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을 보니 떨어진 건가? 만약 내가 붙었다면 기뻐 날뛰었을 텐데 말이야.”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네. 떨어진 사람의 표정치고는 너무 평온해 보이지 않아?”

“아니야 아니야. 애초에 기대도 안 하고 들어갔으니 평온한 표정인 게 당연하지 않아?”

“맞네, 바로 그거네.”

대기 중인 무인들은 하현을 보며 웅성거렸다.

“다음! 하북팽가의 팽헌홍 들어오십시오.”

하현의 다음 차례가 들어가고, 하현은 조용히 그들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다른 연락이 올 때까지 조용히 침소에서 운기나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하현을 불러세우는 이가 있었다.

“얘”

“나?”

그를 부르는 건 다름 아닌 남궁소화였다.

“그래!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러니? 아까도 그러더니. 하여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너 혹시 떨어졌니?”

“아니?”

“뭐? 그러면 합격했다는 거야?”

“응.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나왔으니, 합격이겠지?”

하현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남궁소화는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이제야 하현을 면밀히 보았다.

‘호흡이 안정되어 있고, 기세가 곧아. 우리 세가 무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분위기야. 이 아이, 이미 무공을 익혔구나.’

남궁세가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은 평생 무인들과 함께하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뜻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남궁소화는 비록 열두 살이지만, 상대가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그랬구나? 앞으로 자주 보겠네. 다음에 보자.”

남궁소화는 하현에게 인사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되려 소란스러운 것은 조금 전까지 하현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하던 대기 중인 응시생들이었다.

“들었어? 합격이래.”

“하하. 올해 청룡각 입관시험은 난이도가 매우 낮은가 보구나. 운이 좋구나.”

“나는 올해로 세 번째 입관시험인데, 드디어 나에게도 광명이 오는구나.”

남궁소화는 그들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무림에선 가장 큰 잘못 중에 하나라고 했어. 저 사람들은 앞으로 볼 일 없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하현은 유유히 숙소로 돌아갔다.

그는 조금 전에 남궁환이 보여준 몸놀림을 조금이라도 빨리 다시 한번 복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그날 저녁.

하현은 장칠 아저씨가 챙겨준 옷을 차려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매번 끼니를 때우던 일반 식당이 아닌, 직계 가족들만 이용하는 식당이었다.

‘오늘 가주님께서 공자님을 다른 가족분들께 소개하고 싶으시다고 합니다.’

하현은 이제 막 무한보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가는 참이었다.

남궁환이 펼친 무한보와 자신이 따라 한 무한보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찰나 장칠이 문을 두드렸다.

집중이 깨져 매우 아쉬웠지만, 장칠에게 무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남궁세가의 일원이 되려면 하루라도 빨리 정식으로 소개받는 것이 더 좋을 거야.’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 하현은 장칠에게 그저 고맙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하현은 식당으로 가는 와중에도 무한보를 생각하며 걸었다.

휙- 휙-

그러다 생각만으로 풀리지 않는지 종종 몸을 움직이면서 무한보를 더 체득해갔다.

‘그렇구나, 나는 단순히 다리를 놀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신법, 보법이라고 하는 것은 몸 전체를 움직이는 방법이었던 거야.’

하현은 내공을 실어 깨달은 바대로 보법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다만, 내공은 이전처럼 다리에만 싣지 않았다.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골고루 내공을 실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팔에도, 중심을 곧추세워주는 허리에도.

휘리릭-!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외우고 있는 무한보의 길을 따라 발을 내딛는다.

여기서 굳이 발을 빠르게 밟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그저 흐름에 따라 몸을 맡길 뿐.

‘그렇지. 보법이라는 건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길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뻗고,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반대 발이 다시 길을 찾는다.

다다다- 하던 발소리가 점점 가벼워 지며, 도도도 하는 소리로 작아지더니, 이내 그 소리마저 작아져 버린다.

스스슥-

짧은 거리이지만, 하현은 땅을 밟지 않고 길가에 드문드문 나 있는 풀들만 밟으며 보법을 전개해 나갔다.

초상비(草上飛)의 경지.

무림인라면 보법에 있어서 누구나 목표로 삼는 일을 하현이 해낸 것이다.

털썩, 콰당-.

“아이고야······.”

하지만 곧 얼마 되지 않은 내공이 바닥을 드러내게되며 온 몸으로 공급되던 내공이 차단되었다.

그 덕에 발을 헛디뎠고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하현은 누가 볼 새라 얼른 일어나 흙투성이가 된 바지를 탈탈 털었다.

‘그래도 남궁세가의 가족들에게 보이는 첫 모습인데 이런 모습이라니.’

하현은 꼼꼼히 바지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보법을 연구하며 꽤 달렸는지, 어느새 식당 앞이었다.

‘남궁세가. 정말 대단한 곳이야.’

신가장에 있을 때도, 주변에 무인들은 여럿 있었지만, 이토록 하현에게 영감을 주는 무인이나 무공은 없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있었지만, 어머니는 하현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하현에게 무림인의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으셨으리라.

하지만, 하현은 이미 어엿한 무림인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복수라는 은원으로 엮인 순간, 하현은 이미 무림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다시 한번 강해져야 하는 이유를 마음에 새긴 하현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고야 말겠어.’

당찬 포부와 함께.

* * *

현재 세가 내에 있는 직계라고 해봤자 남궁무룡과 남궁기철, 그리고 남궁환과 남궁소화가 전부였다.

남궁기현, 남궁민 두 명이 더 있지만, 현재는 자리를 비운 덕에 네 명만이 조촐하게 앉아 있는 식당으로, 하현이 들어섰다.

“아니 신하현? 식당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합격자들은 이 식당을 쓰는 게 아닌데?”

하현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남궁소화가 반겨(?)주었다.

하현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할 때,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남궁무룡이 먼저 이야기해 주었다.

“소화는 하현이와 이미 안면이 있나 보구나. 하현이는 내가 불렀다. 혼자 여기까지 잘 찾아왔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소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할아버지도 하현이를 알고 계시는 거예요?”

“알다마다. 소화 너랑은 사촌지간이구나. 네 고모의 아들이 바로 하현이란다.”

“사촌······?”

소화는 아직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직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뭐야,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하현이가 세가에 도착한 게 어제란다. 오늘은 입관시험에 신경 쓰느라 얘기를 해주지 못했어. 하현이 네가 몇 살이지?”

“올해로 열 살입니다. 큰 외숙부님.”

하현의 나이를 들은 남궁소화가 씨익 웃었다.

“열 살이야? 그러면 내가 누나네.”

“그렇네. 누나.”

남궁소화는 누나 소리가 기분이 좋은지 더 깊은 웃음을 지었다.

여태까지 세가의 막내로 살아왔던 남궁소화다.

자신보다 동생이 생겼다는 것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그래! 아 맞아! 나도 입관시험에 합격했어.”

“그럴 거 같았어.”

하현은 아까 청룡각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응시생들 중 남궁소화만큼의 기도를 보이는 자는 몇 없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이미 소화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남궁무룡이 입을 열었다.

“하현아. 이리 와서 앉거라. 여기가 앞으로 네 자리다.”

남궁무룡이 식탁의 빈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자리······.”

“그래, 그리고 오늘 중으로 처소도 이쪽으로 옮기거라. 예전 영령이 쓰던 방을 깨끗이 치워두라 일렀다.”

“감사합니다.”

하현은 뱃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려 하는 것을 겨우 눌러 삼켰다.

하루아침에 가족이 사라지고, 그전에는 상상도 못할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 우연히 취월걸개를 만나, 다시 남궁세가에 와서··· 다시 가족이 생겼다.

‘이곳이 내 집이다.’

남궁세가에 와서도 하현은 계속 긴장된 상태였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애쓰는 일만 해도 심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와중 무공까지 생각하려니 겨우 열 살의 아이에게는 힘들 수밖에.

하지만 하현은 비로소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세가 사람들의 적의 하나 없는 따뜻한 눈빛.

이 눈빛은 가족을 보는 눈이었기 때문이다.

“자. 어서 들자꾸나.”

하현은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남궁세가의 위명치고는 단촐하게 보이지만, 정갈한 음식들이었다.

한참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큰 외숙부, 남궁기철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먹다 얼굴에 뭐라도 붙은 걸까 얼굴을 더듬더듬 해보지만, 아무것도 붙어있는 것은 없었다.

“하하. 너무 빤히 봐서 미안하구나.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말이다.”

남궁기철은 혼자 후후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딱 너와 소화 같은 나이대에 청룡각에 들어갔지. 네 어머니이자 내 여동생 영령과 함께 말이야.”

“그랬군요.”

남궁기철은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수련은 당장 내일부터다. 고되고 힘들겠지만, 따라온다면 금방 성취를 보일 것이다. 너희들의 자질은 우리 세가의 긴 역사 속에서도··· 아니, 어쩌면 전 무림에서도 보기 드문 자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자만하지 말고, 정진하고 또 정진하거라.”

“네. 외숙부.”

하현은 조금은 무섭게 보이는 남궁기철이지만, 그 말만은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 모습을 모두 기꺼운 눈으로 바라보는 남궁무룡과 함께, 하현은 남궁세가에서의 둘째 날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

하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인들이 챙겨준 무복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제 소화가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초록 무복이었다.

연무장에 도착하니 시간에 잘 맞춰 왔는지, 이미 꽤 여럿이 도착해 있었다.

하현은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 대기하며 인상에 깊은 자들을 몇몇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는데, 하현이 기도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여지없이 이 자리에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몇 명의 사람이 더 들어왔고, 그중에는 남궁소화도 있었다.

소화는 하현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어제는 들떠서 잘 못 잤다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누군가 청룡각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 까지는.

“다들 왔나? 그래 열세 명. 모두 왔구나.”

남궁규현이었다.

그는 어제와 같은 깨끗한 무복을 입고 청룡각에 들어섰다.

“나는 어제도 얘기해 줬지만, 청룡각에서 기초 무공 수련을 맡고 있는 남궁규현이라고 한다. 기본이라 함은, 곧 대지를 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지가 단단해야 그 위에 큰 집을 지어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니, 다들 차근차근 잘 따라왔으면 한다. 대답은 존명(尊命)이나 알겠습니다 같이 길게 할 것 없이 짧고 굵게 넵!으로 통일할 것이다. 알겠느냐?”

“넵!”

남궁규현은 생각보다 우렁찬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올해는 합격자가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하지만, 그만큼 더 개개인을 자세하게 봐줄 수 있으니 배움에는 더 유리한 조건이다. 다들 행운으로 알도록.”

“넵!”

남궁규현은 합격자들, 아니 이제부터는 기초 수련생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너희들은 정식으로 남궁세가의 제자들이다. 특히 너희는 현재 가장 바닥에 있다. 세가 내에 있는 모든 이가 너희들의 사형이고, 사저이고, 또 사숙이다. 우리 세가에서는 한낱 하인들이라고 할 지라도 모두 무공을 익힌다.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넵!”

남궁규현은 굳은 얼굴의 제자들을 향해 즐거운 얼굴로 외쳤다.

“좋다! 무공의 시작은 단련된 신체에서 온다. 그 중에서도 하체와 허리가 가장 중요하지. 모두 마보 자세를 취한다!”

그의 말에 열 세명의 제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세를 취했다.

어쩐지 남궁규현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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