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백부님께서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밤중까지 아주 열심히 구나.”
하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남궁민을 살펴보았다.
남궁민은 말 그대로 세간에서 잠룡(潛龍)이라고 부르는 것을 단번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은 자태였다.
“삼재 검법을 연습하고 있더구나. 초식을 완벽하게 이해한 거로 보아 오래도록 연습한 것 같긴 한데, 결정적인 걸 하나 빼놓고 있더구나. 뭔가 완벽하게 해낸 것 같은데 찜찜한 기분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내가 처음 삼재검법을 익힐 때 그랬으니까 말이야.”
남궁민의 말은 하현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정확했다.
“그러면, 그 문제는 이미 해결하셨겠네요?”
“그럼.”
남궁민은 맹랑하게도 곧바로 핵심을 물어오는 하현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어주고는 말했다.
“검법은 검으로만, 검을 휘두르는 팔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발놀림 역시 매우 중요하지.”
“아!”
남궁민에 한 마디에 하현은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이런, 바보였구나. 내가 지금 가장 자신 있는 게 보법인데 그걸 활용할 생각도 못 하다니.’
남궁민은 이 한마디로 무언가를 깨달은듯한 하현을 보며 제법이라고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자, 이리 줘봐.”
하현은 남궁민에게 나뭇가지를 건네주었다.
“하하. 겨우 이런 나뭇가지로도 그렇게 유려하게 삼재검법을 펼쳐냈구나. 대단한데? 스승님께 말해서 목검 하나를 내어달라고 부탁드려봐. 나도 그렇게 목검을 받아내서 밤에 스스로 수련하곤 했으니까.”
남궁민은 말하며 손에 진기를 실어 나뭇가지의 겉면을 훑어냈다.
자잘한 돌기들이 우수수 쳐내지며 제법 매끈해져 휘두를만한 모양이 되었다.
“잘 봐.”
남궁민은 삼재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저 초식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공까지 가득 실은 최선을 다한 삼재검법이었다.
“와······.”
하현은 그저 솔직하게 감탄했다.
남궁민의 세로 베기는 태산압정 그 자체였으며 가로 베기는 횡소천군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주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찌르기.
남궁규현이 천천히 내지르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과는 달리 남궁민은 번개 같은 속도로 여덟 방위에 찌르기를 시전했다.
‘바람. 이건 바람이다······!’
하현은 남궁민의 삼재검법 마지막 초식에서 바람을 느꼈다.
한없이 자유롭고 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바람.
“잘 봤어? 마지막 초식은 팔방풍우(八方風雨)라고도 해. 이름은 거창하지만 결국 여덟 방위로 찌르기일 뿐이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형님.”
초식을 마친 남궁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다.
그런 남궁민에게 하현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뭘 봤지? 이젠 좀 알겠어?”
“네. 형님의 검로(劍路)에 따라 발이 움직이는 것을 봤습니다.”
“옳지. 그리고?”
“음···. 사실 거기에 집중하느라 다른 건 못 봤습니다.”
하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고, 남궁민은 귀엽다는 듯 씨익 웃었다.
삼재검법은 매우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는 심오한 핵심을 하나 품고 있다.
검술을 펼치는 데 있어서 보법이 어째서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핵심.
‘보법이 중요한 이유는 나중에 가르쳐 주도록 할까? 혼자서 생각해보는 게 성취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하현은 어리지만, 언뜻 보기에도 매우 총명해 보인다.
그러니 생각보다는 일찍 깨달을 수도 있으리라.
남궁민이 하현에게 천천히 생각하라고 말해주고자 입을 떼어낼 찰나, 하현은 말이 끝나지 않았었는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일단 알게 된 건, 발이 움직이는 이유는 결국 몸의 중심을 지키는 게 목적이라는 것까진 알겠습니다. 언제든 서 있는 것처럼 몸의 중심이 지켜져야, 내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검술이 나올 테니까요. 그런데 그 이상을 모르겠습니다.”
하현은 호기심이 잔뜩 어린 얼굴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떤 근육에 힘을 더 주어야 하는지, 내공의 분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현은 웃고 있던 남궁민의 표정이 굳어 그것이 자신이 너무 많은걸 코치코치 물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지레 말을 줄였다.
“앗, 제가 너무 많은 걸 캐물었네요. 이건 저 스스로의 수련을 통해서 알아내야 하는 건데 말이에요.”
하지만, 남궁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몸의 중심이 핵심이라는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고? 나도 열세 살은 되어서야 깨달은 바를?’
남궁민은 자신의 자질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워낙 주변에서 칭찬 일색 뿐이기도 하고, 또 또래의 무림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자신의 성취를 따라오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현은 저 나이의 자신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하. 이거 어쩌면······?’
남궁민이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맞아! 앞으로도 절대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몸의 중심. 그것이 바로 검법에서 보법이 중요한 이유가 맞아.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해. 수가 없다면 나려타곤(懶驢打滾)이라도 써야 하는 게 바로 무림이야.”
“가르침 감사합니다. 형님.”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하현이 너도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 아침에도 청룡각에서 수련이 있잖아?”
“네. 그러면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현이 꾸벅 인사하며 전각으로 총총 걸어 들어갔다.
남궁민도 한참 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스승님. 그간 별일 없으셨죠?”
“오, 민이 돌아왔구나. 세가는 언제나 같지. 너는 별 탈 없었느냐?”
다음 날.
남궁민은 수련이 시작되기 전 청룡각에 들렀다.
그 역시 현재는 청룡각 소속이었기에 남궁규현의 제자나 마찬가지였다.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이번에도 별 탈 없이 돌아왔습니다.”
“수확은 있었느냐?”
“아주 약소하게나마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바대로 마교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역시 그렇게 되는군. 하긴, 삼십 년이 넘게 잠잠했으니······.”
남궁규현의 표정에 살짝 그늘이 드리워졌다.
최근 온 무림에서 들려오고 있던 혈겁에 대한 소식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군소 방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 혈겁은 아무런 규칙 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하현이 살던 신가장 역시 그 혈겁의 희생양 중 하나였다.
“그 흔적을 찾아내서 가주님께서 그렇게 급히 가신 거구나.”
“그렇습니다. 이제는 마교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곧 방편이 마련되겠지요.”
범인이 어디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를 가진다.
누구인지 모를 때에는 수많은 가능성을 모두 따져봐야 하지만, 투구인지 특정할 수 있다면 그곳의 동향만 파악하면 되니까.
“그나저나, 어젯밤에 하현이를 만났습니다.”
“오, 만나 보았구나.”
남궁민이 하현의 이름을 올리자 남궁규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현재 규현에게 있어 하현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이름이었다.
“네. 삼재검법을 제법 오래 수련했는지, 제법 태가 나던걸요? 아니, 제법이 아니라 이제 삼재 검법은 건너뛰어도 될 정도로 보였습니다.”
“뭐라고?”
“게다가 이해력도 굉장히 빨라서 보법에 검법을 태우는 것까지 이미 깨우친 것 같더라고요. 굉장한 자질로 보입니다.”
규현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뭣이······?”
그의 얼굴은 마치 귀신을 보는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다. 하하하.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 말도 안 되는 것이 아니지.”
남궁민은 횡설수설하는 규현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규현은 남궁민을 보고는 허허 웃어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하현이는···. 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검을 쥐었다.”
“네?”
“삼재검법을 가르친 게 바로 어제란 말이다.”
“······.”
남궁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남궁세가를 비웠기에 이번 기수의 청룡각이 언제 입관시험을 보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어제 하현의 성취를 보며 당연히 한, 두 달은 되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어제 남궁기철이 하현에 관해 이야기해 줄 때도 네가 없는 사이에 동생이 하나 생겼다는 말뿐이었고.
“아무리 삼재검법이 저잣거리에 삼류 무사들도 익히고 있는 검법이라고는 하나, 하루 만에 그렇게 완벽하게 구현해냈단 말입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직접 보지 못했기에 네 말을 믿지 못할뻔했다. 입관시험에서 그 일만 없었어도 말이다.”
“무슨 일이 또 있었습니까?”
남궁규현은 남궁민에게 입관시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무한보를 단 한 번 밟아보고 모두 외어버린 것과 남궁환을 간이 대련에서 이겨버린 것까지.
“하하하···. 이제 저는 천고의 기재라는 말은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 말에 남궁규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 같은 범인(凡人)이 볼 때는 너도 똑같은 천고의 기재다.”
“그래도 하현이한테는 못 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하현이는 아직 어리지 않느냐. 네가 더 빨리 치고 나가서 길을 닦아 두어야지.”
남궁민은 가볍게 웃었다.
“후후. 저도 그간 게을리했던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겠군요. 동생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그래. 바로 그 마음가짐이다.”
남궁규현은 남궁민의 눈 깊은 곳에서 불붙은 호승심을 엿볼 수 있었다.
‘오호라. 하현이는 정말 남궁세가의 큰 복이구나!’
그는 당장이라도 손뼉을 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남궁민 역시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이렇다 할 동기부여가 없었다.
아직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를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깨달음 역시 같은 배분들보다 아득히 높은 경지에 있기에 그에게는 시간을 두고 내력을 더 쌓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하현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안에 있는 불꽃을 태우고 있다.
‘민이의 저런 눈을 본 것이···. 3년 전이 마지막이었던가.’
남궁민이 열다섯 살의 나이로 청룡각의 젊은 무인들과의 비무에서 전승을 거둔 날.
그의 열정의 불꽃은 꺼졌었다.
그 후로는 강호에 출두하여 이런저런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여덟 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이 그의 마음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다.
“스승님. 이제 수련을 시작할 시간이군요.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자꾸나.”
수련생들이 하나, 둘 연무장에 도착함에 따라 남궁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언제 왔어? 왔는데 말도 안 하기야?”
저 멀리서 남궁민을 알아온 소화가 달려와 남궁민에게 안겼다.
“하하. 소화야. 어제 너무 늦게 와서 오늘 얘기하려고 했지. 오늘도 수련 열심히 받고, 저녁에 보자?”
“피-. 알겠어. 이따가 꼭 같이 이야기해야 해.”
“그럼 그럼.”
남궁민은 소화와 함께 들어온 하현과 눈이 마주쳤다.
하현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남궁민도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주었다.
‘뭔가 어제랑은 분위기가 달라지셨는데?’
하현은 남궁민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왠지 어제와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적의는 아니라는 것은 하현 역시 잘 알 수 있었다.
“고맙다. 하현아.”
“네? 무엇이······.”
“하하. 아니다. 너도 열심히 하거라. 이따가 스승님한테 목검 빌려달라고 하는 것 잊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형님.”
남궁민은 하현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연무장을 나갔다.
한없이 가볍고, 기분 좋아 보이는 뒷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