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남궁민이 다녀간 지 며칠이 지났지만, 청룡각 수련생들의 일과는 똑같았다.
수련, 그리고 수련.
그나마 바뀐 것이 있다면 정권 지르기는 졸업하고, 이제는 하염없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검을 쥐면 뭔가 좀 달라질 줄 알았더니만.’
모두들 의연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는 있지만, 솔직히 그 전과 같이 역시 죽을 맛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탁- 탁- 탁-
지금 하는 수련은 바로 전에 하던 정권 지르기와 완전히 같은 수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같은 지점을 연속해서 검으로 베고 지나가는 수련이었기 때문이다.
백 번 주먹을 내지르더라도 같은 곳을 타격하도록 하는 정권 지르기 수련처럼, 천 번 검을 베더라도 같은 곳을 벨 수 있도록 하는 수련이었다.
단순하고 무식해 보이는 수련이기도 하지만, 기본기를 기르는 데는 이만한 수업이 없다.
죽도록 지겨운 것이 흠이지만.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모두가 지겨워하는 와중에도, 하현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검을 많이 휘두르지 못해서 그런 걸까, 자꾸 손톱 반 개만큼 벗어난다. 조금 더 집중해보자. 옳지! 이제는 조금 더 정확해졌어.’
앞서 같은 수련이라고는 이야기했지만, 주먹을 내지르는 것과,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
검을 몸처럼 다뤄야 한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검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하현의 마음처럼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한 일에서 점점 능숙해져 가는 것.
그것은 하현에게 굉장한 성취감과 재미를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남궁규현은 하현의 빠른 성취 덕분에 요즘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역시 이 녀석은 진짜다. 어쩌면 역대 최연소 월반(越班)이 나올 수도 있겠어.’
청룡각은 소속 무인을 크게 세 등급으로 구분한다.
처음 청룡각 입관 시험에 통과하여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의 기간 동안 무공에 대한 기본을 배우고, 본격적인 무공을 익히기 전에 무공에 가장 적합한 신체와 단전을 수련하는 수련생.
기본 수련생을 거쳐 본격적으로 세가의 일원이자 대원으로 인정받고, 남궁세가의 가문무공을 전수 받기 시작하는 청룡각 대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련을 마치고 무림에 출도 하여 세가 및 무림의 대소사에 투입되며, 본인이 평생 남궁세가의 일원으로 살고자 한다면 ‘남궁’의 성을 하사받을 수 있는 정예대원까지.
하지만 이 구분에 절대적인 기간은 없다.
실력만 받쳐 준다면 수련생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대원으로, 심지어는 정예대원으로도 승급할 수 있는 것이 청룡각의 체계였다.
실례로 남궁환은 이 년 만에 대원이 되었고, 남궁민은 수련생에서 대원까지 일 년, 그리고 대원에서 정예대원이 되기까지 또 이 년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혹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대원까지만 가면 남궁세가의 무공을 정말로 전수해 주는 것이 사실인가에 대해서.
하지만, 바로 그것이 현재 남궁세가가 다른 세가들과의 격차를 아득히 벌려 놓은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폐쇄적인 운영을 하며 가족과 일부 친척들에게만 가문 무공을 전수 해주며 자멸해가는 다른 세가와는 달리, 청룡각이 생겨나고 난 후부터 남궁세가는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구파일방이 아닌, 구파일방에 남궁세가를 뜻하는 일가를 추가하여 구파일방일가 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을 정도니까.
‘심지어, 이미 내공마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고.’
남궁규현은 바로 며칠 전, 하현에게 삼재심법을 가르쳐주려다 경악했던 때를 떠올렸다.
삼재심법이 아니라 이미 창궁대연심공을 익히고 있을 줄이야.
평범한 열 살 아이는···. 아니, 충분히 성숙한 청룡각 대원들도 그 구결의 뜻과 의미를 파악하기도 힘든 상승의 무공이다.
괜히 처음부터 익히기만 하면 더 성능이 좋은 무공을 먼저 가르치지 않고 삼재심법부터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삼재심법으로 내공을 움직이는 법에 아주 능숙해져야 그 개념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현아. 너는 이제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거라.”
남궁규현은 신들린 듯 목검을 휘두르는 하현을 따로 불러내었다.
“네. 스승님.”
“벌써 베기에도 많이 익숙해진 듯 보이는구나.”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하현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기까지 했다.
앞으로 어떻게 커갈지는 모르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배움을 갈구하는 자세는 좋은 무인이 될 좋은 조건이다.
“베는 것이 지루하다면, 다음으로 넘어가도 좋다. 다음은 내려치기다. 요령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겠지?”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삼재검법의 연장선이구나.’
남궁규현이 하루에도 열 번은 더 강조하는 것.
바로 기본기의 반복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스승님. 다음은 찌르기겠군요.”
“정확하다.”
“알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수련을 마치고서 목검 하나를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음···. 알겠다. 지금 쓰는 걸 가져가라.”
남궁규현은 찰나의 고민은 한 후 허락했다.
하지만, 뒤에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휴식도 훈련의 일부라는 것을 명심해라. 무작정 수련 시간을 늘린다고만 해서 성취가 오는 것은 아니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남궁규현은 잘 알고 있었다.
하현이 그의 말을 들어 먹을 리 없다는 것을.
그의 오랜 남궁세가 생활에서 알아낸 것이 몇 가지 있다.
‘남궁의 피에 뭐가 있는 게 분명해. 직계의 피가 섞이면, 그렇게 고집이 세니.’
하지만 고집이 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고 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고집이 지금의 남궁세가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자연스럽게 그는 또 다른 남궁세가의 직계들이 떠올랐다.
최근에 마치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수련에 매진 중인 남궁환과 남궁민이.
모두 하현과 만남을 시작으로 무공에 대한 열정이 다시 한번 불붙었는지, 낮이고 밤이고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모두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내일도 완벽해질 때까지 같은 수련을 할 테니, 그렇게 알아라. 수고했다.”
남궁규현이 모두에게 말하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빌린 목검을 소중히 껴안고 있는 하현에게, 남궁소화가 다가왔다.
“매일마다 밤에도 수련한다면서?”
“응. 누나.”
“너는 지금 하는 수련이 지겹지 않니?”
“음···. 지겨워.”
남궁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그녀는 질문하면서도 지겹지 않다는 말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
“그거야, 스승님이 지금 익히는 기본기가 무공을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그게 이 수련을 죽자사자하는 이유야?”
“응. 그게 전부야.”
소화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바보니? 아니···. 뭐든지 한 번에 외워버리는 걸 보면 절대 바보는 아닌 거 같고. 너는 스승님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야?”
“일단, 스승님은 그런 바보 같은 명령을 내리시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만약 그게 내 무공이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 시도라도 해보지 뭐.”
하현은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이라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약 오 년···. 아니, 삼, 사 년만 지나도 여인들의 마음을 홀릴 것 같은 봄바람 같은 미소였건만, 남궁 소화에게는 그저 정신 나간 얼굴로 보일 뿐이었다.
“더 말을 말자! 일단은 전각으로 돌아갈 거지?”
“응. 그러려고.”
“좋아. 같이 가자.”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소화는 하현을 제 친동생처럼 챙겨주었고, 하현도 그런 소화를 누나처럼 잘 따랐다.
그뿐만 아니라 소화 역시 하현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받고 있었다.
“오늘도 그 전각 뒤 공터에서 수련할 거야?”
“아마도? 거기밖에 잘 모르기도 해서.”
“왜 몰라? 세가가 얼마나 넓은데, 그 정도 크기의 공터는 셀 수 없이 많다고.”
“아, 너무 넓어서 아직 안 다녀봤거든.”
“뭐? 그러면 여기까지 온 이후로 전각이랑 여기 수련장만 왔다 갔다 했다는 말이야? 다른 곳은 한 번도 안가고?”
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 소화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이고, 그래. 내가 잘못했네. 이 정도는 해야 민이 오라버니를 이긴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큰소리만 쳐놓고 수련을 게을리 한 거였어.”
소화의 말에 대답 없이 슬쩍 미소만 지은 하현에 소화는 더더욱 분통이 나려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녀가 조금 전 했던 말이 사실인 것을.
“오늘은 나도 나갈래.”
“그래.”
“스승님이 그러셨어. 기본 수련을 다 마치고 나면 그때부터는 제대로 된 검법의 초식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정말?”
지금까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하현이 처음으로 큰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에 소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건성으로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그 후로 하현의 야간 수련에는 소화가 함께하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하현의 수련량을 따라가기 힘들었던 소화지만, 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적응력이라고 했던가? 칠 주야 정도가 지나자 소화는 수련에 은근히 재미까지 느끼고 있었다.
특히나 가장 큰 재미는 그 성취에서 오는 것이었다.
수련할수록 성취가 눈에 보이니, 밤에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현과 함께 수련할 때면···. 가끔은 좌절감도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열심히 내려치기를 반복하는 소화의 한참 옆에는 하현이 삼재 검법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찌르기까지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인 하현은 이제야 처음으로 삼재 검법을 펼칠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그건 분명히 바람이었는데.’
하현은 남궁민의 삼재 검법을 떠올리며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지금도 남궁민이 펼친 삼재 검법이 눈에 선하다.
아니, 정확히는 눈으로만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느꼈던 그 기운을, 바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알 것 같아. 벤다는 것은 그저 검을 횡으로 휘두르는 행위가 아니다. 그 결을 타는 것이지.’
천천히 우에서 좌로 움직이는 하현의 검.
검을 휘두르기 위해 내공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검이 바람을 타니 내공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온다.
부웅-
진기를 가득 머금은 검이 웅혼한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그리고 좌에서 끝난 검은 어느새 머리 위로 들려져 있었다.
바람이 움직이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음. 태산 압정.’
위에서 내려치는 동작은 조금 전에 바람을 타던 것과는 또 다른 바람이다.
횡소천군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산들바람이라면, 태산 압정은 당장이라도 나무뿌리를 뽑아낼 것 같은 강풍.
콰릉-!
마치 번개라도 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떨어지는 검이었다.
태산압정은 태산을 짓눌러버린다는 거창한 초식명과는 달리, 삼류무사들도 흔히 익힐 수 있는 초식이다.
허나 하현의 태산압정은 달랐다.
정말 태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의 검을 막으려는 자는 충분히 짓눌러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마지막, 팔방풍우는, 폭풍!’
슈아악!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하현의 손에서는 폭풍이 재현되었다.
마치 한순간처럼 보이는 여덟 방향의 찌르기는 소용돌이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하현이 한 일인 양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흔들고, 머리를 헝클었다.
“아니, 지금 뭐를······.”
하현의 그 모습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워 남궁 소화는 자신이 하던 수련을 멈추고, 하현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자기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하현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고, 여기까지인가 보네. 나머지는 되겠는데, 내공은 어떻게 안 되나? 겨우 끝마치기는 했다만······.”
본디 두 바퀴 이상을 돌며 찌르기를 유지 해 진짜 폭풍을 재현해낼 요량이었느나, 현재 하현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내공 부족이 또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사실 내공은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라 약점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지금 그게 무슨 무공이야?”
“이거···. 삼재검법인데?”
“삼재검법이라고? 아니, 그게 무슨 삼재검법이야? 특히 마지막은······.”
소화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현이 펼친 무공이 삼재 검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 불공평해.”
“뭐가?”
“몰라! 앞으로 수련할 때 말 걸지 마!”
소화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검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집중한 모습이었다.
하현 역시 그런 소화를 보고 빙긋 웃고는 다시 수련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