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또 시간이 흘렀다.
오늘도 하현은 연무장에 일찍 도착했다.
몇 개월 동안 하현은 아침에 눈을 뜨면 최소한의 준비만 하고는 바로 연무장으로 향하곤 했다.
다른 수련생들보다는 약 한 시진에서 반 시진 정도는 이른 시간.
하현은 그 시간에 어제까지의 성취를 확인하고, 오늘 할 수련을 미리 계획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하던 수련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얼마 전 남궁규현의 결정적인 말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많이 발전했다. 이제 정말로 승급시험을 준비해도 될 정도로. 하지만, 모두가 같은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너희 중에 가장 성취가 뛰어난 하현부터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
그 말에서 하현은 두 가지를 깨닫고는 속으로 환호했다.
첫 번째는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하현의 성취가 가장 뛰어나다고 모두의 앞에서 공인받은 것.
하현이 아무리 얌전한 성격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이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끼이익-
오래된 나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수련이 시작하는 시간보다 한 시진이나 이르게 도착한 하현은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어?”
그런데, 하현은 평소에 이 시간에는 보지 못했을 두 사람을 보았다.
한 사람은 남궁규현이었다.
남궁규현은 이렇게 빨리 나오는 날이 간혹 있었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른 한 명은 이 시간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팽형이 왜 이 시간에?’
그 사람은 바로 팽헌홍이었다.
그런데, 남궁규현과 팽헌홍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도…. 승급 시험을 보고 싶습니다.”
“아직은 이르다. 조금 더 수련하도록.”
“제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궁규현이 팽헌홍의 눈을 마주보았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불경스러운 어투와 말이었다.
하지만, 팽헌홍은 그 안에서 뜨거운 불꽃을 보았다.
“기준은 명확하다. 기본기 수련을 그만해도 될 것 같았고, 또 대원으로 승급할 능력이 충분하기에 승급 시험을 이야기 한 것이다.”
너무나도 명료한 남궁규현의 말이었지만, 팽헌홍은 아직 승복할 수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납득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지?”
“우리는 무인입니다. 승급하려면 그만한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현의 재능이 뛰어난 것은 저도 백 번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수련생 중 가장 강하다는 증명이 되지 않는다면, 저는 그 승급 시험을 가장 먼저 보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팽헌홍은 소신 있게 말을 내뱉었다.
남궁규현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너도 팽가 출신 무인이다. 이거로구나.’
하북팽가의 무인들은 보통의 정파 무인들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바로 차기 가주는, 팽가 내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된다는 강자존(强者尊)의 법칙 때문이었다.
정파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파나 마교의 이념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저 이념.
하지만, 그 덕분인지 팽가는 오대 세가 내에서도 남궁 세가의 바로 뒤를 잇는 세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게다가 패도적인 특유의 도법과 권법은 그 이름을 더더욱 날리기에 충분했다.
“그 말뜻은 결국 하현이 수련생 중 가장 강하지 않다는 뜻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앞으로 몇 년 뒤···. 아니, 당장 내년이라도 하현이 우리 모두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말은 인정할 수 있겠으나,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하현보다 더 강한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궁규현은 또박또박 말하는 팽헌홍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도제님을 완전히 빼다 박았군.’
팽헌홍은 몇 년 전 만나서 이야기해 본 도제를 떠오르게 했다.
도제의 자식 중 가장 그와 닮은 아들이라는 것도 한몫했지만, 외모가 아닌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겠다는 성정이 더욱 그랬다.
“조금 더 솔직히 이야기해도 된다. 네가 하현보다 강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남궁규현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이런 팽헌홍이 싫지는 않았다.
무인으로서 저 정도의 호승심은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건방진 것, 그리고 상대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은 혼나야 할 게 맞지.’
남궁규현은 연무장 입구에서 다시 나가지도 못하고, 올라오지도 못하며 쭈뼛거리는 하현을 보고 소리쳤다.
“하현아.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이리 올라오너라.”
“네. 스승님.”
하현이 쫄래쫄래 연무장으로 올라왔다.
규현이 하현의 표정을 언뜻 살펴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하현이 모두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얘기한 팽헌홍의 말을 듣고 저렇게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놈도 보통 놈은 아니다.’
규현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태연하게 입을 뗐다.
“좋다. 헌홍. 나는 지금 상황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만은 않는다. 무인으로서 그 정도의 기백과 투지가 없으면 네 실력을 더 키울 수 없는 법이니까.”
남궁규현은 팽헌홍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 우리는 무인이다. 누가 강하고, 약한지를 가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지.”
“대련…!”
“그렇다.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서로 검을 한번 부딪혀 보면 바로 깨닫게 될 수 있으니까.”
남궁규현이 여기까지 말하자, 하현과 팽헌홍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둘이 대련을 펼치라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대련은, 저번에 시험 봤던 간이 대련입니까?”
“아니다. 그건 자질을 시험해보려는 것뿐. 다들 지난 몇 달간 검을 배웠잖아? 정식으로 대련해 볼 때도 됐지.”
팽헌홍은 일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진행될지는 생각 못 했는지 조금은 당황한 얼굴이었고, 하현은 오히려 평온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은 언제입니까?”
“시간 끌 거 있나. 지금 하지.”
“바로 지금 말씀입니까?”
남궁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수련생들이 오려면, 최소한 반 시진은 더 있어야 할 터. 죽자사자하는 생사 결이 아닌, 누가 더 강한지를 판별하는 대련이라면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검을 직접 맞붙어 보는 것이 가장 빠를 테니까.”
팽헌홍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나?’
규현은 혹여나 자신이 실언하지는 않았나 걱정했다.
조금 전 그가 한 말은 팽헌홍이 질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잠시 뒤 고개를 든 팽헌홍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하···. 열혈이군, 정말 열정적이야.’
그는 무슨 재미난 일을 한다는 듯 표정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규현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차고는 말했다.
“그래도 간단한 규칙은 있어야겠지? 아주 혹시 모르니, 머리와 목은 공격하지 말아라. 그리고 한 쪽이 쓰러지거나, 졌다고 인정하면 대련은 끝. 간단하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서로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그래야 어느 쪽이든 미련이 없을 테니까. 이번에도 내가 손뼉을 치면 시작하는 거다.”
이번에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 팽헌홍의 얼굴이 비장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목검을 쥐어 들고는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도 진지한 얼굴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목검을 꺼내 들었다.
‘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하현은 지금 묘한 흥분감과 긴장감, 그리고 고양감으로 가득했다.
‘저번에 환이 형님이랑 간이 대련을 한 이후로, 실제 사람과 대련해보는 것은 처음이야.’
하지만, 하현에게 대련은 처음이지만, 엄밀히 말해 처음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하현이 매일 밤 운기를 하면서 떠올린 것은···.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열 번, 백 번.
아니 수천수만 번 이상 가상의 비무를 치러봤기 때문이다.
‘팽형도 절대 무시할 수는 없지만, 민이 형님한테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비무의 대상은 언제나 남궁민이였다.
남궁민은 간혹 야간 수련을 하는 하현에게 짤막하게 무공을 시범 보여주곤 했고, 하현은 그 동작들을 재료 삼아 재구성한 남궁민과 끊임없이 머리로 대련해 온 것이다.
‘내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좋은 기회다.’
꽈악-
하현은 손에 힘을 주어 목검을 부여잡고, 천천히 온몸에 진기를 흘려보냈다.
점차 굳은 근육들이 되살아나며 감각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짝-!
남궁규현의 박수 소리와 함께, 팽헌홍과 하현은 서로를 향해 부딪혀갔다.
휘익-
따악-!
하현의 무한보에 버금가는 속도로 신법을 펼치며 검을 휘두른 팽헌홍과 하현의 목검이 맞부딪혔다.
그리고는 그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서로 떨어졌다.
“오오, 역시!”
남궁규현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현의 재능과 실력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지만, 팽헌홍 역시 하현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굳이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데에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아압-!”
팽헌홍은 다시 한번 보법을 밟아 나가며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웅혼한 내력이 담긴 검이었다.
‘도제 님께서 막내아들을 유독 총애하신다더니, 영약을 얼마나 먹이신 거야?’
규현은 팽헌홍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그다음이었다.
고오오오-
하현의 몸에서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강력한 진기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진기가 자신의 집을 찾아가듯 검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다.
쩌억-!
목검과 목검의 부딪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팟!
둘은 단 한번만의 부딪힘에 뒤로 튕겨나오듯 거리를 벌렸다.
‘역시, 강하다. 저 나이에···! 아니, 나이는 생각하지 말자.’
팽헌홍은 하현에게 순수하게 감탄했고.
‘나보다 더 큰 기운을 가지고 있어.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장담할 수 없다.’
하현은 팽헌홍이 자신보다 더 많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두 어린 검객은 다시 온 힘을 다해 서로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마치 미리 짠 것 마냥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럴 때는.’
‘이럴 때는.’
우웅-
우웅-
나무로 만들어진 목검이건만, 웅혼한 내력이 깃들자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둘은 그 목검을 휘두르기 힘들다는 듯, 온갖 인상을 다 쓰며 휘둘렀다.
‘속전속결!’
‘속전속결!’
콰앙-!!
하현과 팽헌홍은 같은 생각을 했다.
될 수 있으면 빠르게, 정확히는 다음 일격에 모든 것을 쏟아내겠다는 생각을.
그 결과 둘의 목검이 부딪치자 고목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쩌억!
그리고 팽헌홍이 들고 있던 목검이 그대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