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하현이 들고 있던 검은 하현의 내공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파스스 흩어져버렸다.
‘아, 아니. 저 정도였다고?’
남궁규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팽헌홍의 내공이 또래보다 아주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현이 동기들보다는 훨씬 뛰어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지금 둘이 대련에서 보여준 신위는 대원이 아니라 정예 대원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수준으로 보였으니까.
그런데 하현의 상태를 자세히 보니 똑바로 서 있으려 노력하고는 있으나, 미미하게 온몸이 떨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방. 이 한 방에 모든 내공을 쏟은 것이었구나.'
남궁규현은 속으로 한 번 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인 내공의 양은 팽헌홍이 하현을 앞지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기운을 운용하는 것에 있어서 하현이 팽헌홍을 많이 앞섰다.
하현은 가진 모든 기운을 끌어내어 한 번의 휘두름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팽헌홍은 아직 그 부분이 미숙했다.
그렇기에 이번의 부딪침에서 크게 낭패를 본 것이다.
딸그락-
팽헌홍은 갈라진 목검을 놓치고 말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덜덜덜 손을 떨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굴만은 이전보다 더없이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졌습니다.”
조금 전 남궁규현에게 열렬히 의견을 토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모든 내공을 쏟아낸 탓일까? 패자를 자처하는 헌홍의 얼굴에 비해 승자인 하현의 얼굴은 안색이 파리해졌다.
팽헌홍은 그런 하현을 보고 하현이 현재 탈진 직전이고, 아직 자신에게는 기운이 남았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만약 이 검이 진검이었다면?
하현의 검은 그대로 자신의 몸을 갈라내었을 것이다.
몸통이 두 조각이 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팽헌홍은 먼저 남궁규현에게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스승님. 오늘 무례를 범한 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 의심하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그리고는 하현에게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가르침을 얻었어. 정말 고마워.”
“아, 저는······.”
“내가 건방졌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더욱 수련에 정진하여, 꼭 너를 따라가마.”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현도 그에게 포권해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둘의 그 사이에서, 남궁규현은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아내었다.
‘이번 기수는 지금껏 내가 가르쳐 본 수련생 중 단연 최고다. 운이 좋군.’
하지만 겉으로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다. 헌홍. 자네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리고 하현.”
“넵 스승님.”
남궁규현은 아주 찰나의 고민을 하고 난 후에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제 들어가서 쉬거라. 그리고 내일까지 가장 좋은 몸 상태를 만드는 것에만 집중해라.”
“조금의 휴식만을 취한 후에 저도 더 수련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규현의 말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승급 시험을 바로 내일로 당기겠다.”
“내일······!”
하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개봉 무림맹.
“흐음······.”
남궁세가의 가주 검존 남궁무룡은 몰려오는 편두통에 침음성을 흘리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봐. 남궁 늙은이. 머리가 아픈게야?”
“아, 자네 왔나?”
“그래. 좋은 집 놔두고 우중충한 무림맹에 계속 있으니 머리가 아프지. 답도 안 나오는 문제로 씨름 하지 말고, 이제 슬슬 돌아가지그래?”
“세가를 떠난 지 벌써 석 달이 되어가는군.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긴 하지.”
무림맹을 위시한 정파 무림은 약 일 년 전부터 시작된 군소 방파와 가문의 멸문지화가 마교의 소행이라는 첫 실마리를 잡아내었다.
남궁무룡의 딸이 시집간 신가장 역시 그 희생양중에 하나였기에, 그 말인즉 남궁무룡의 딸과 사위의 원수가 마교라는 뜻이었다.
“후, 그래. 새로운 소식이 있네.”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들어왔나?”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 어찌 보면 별거 아닌 소식이니까.”
“별 거 아니라면?”
“특이한 공톰점을 알아내긴 했는데, 그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겠으니 말일세.”
취월걸개는 남궁무룡에게 다시 앉으라고 손짓한 후에 자신도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멸문지화를 당한 장원이나 문파들에게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네. 먼저 십오 년에서 이십 년 사이 전에 누군가 외부인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것이네.”
“예를 들자면, 신가장의 신지혁 같은 인물이라거나?”
“맞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네. 멸문한 장원마다 방이나 창고, 혹은 최소한 곳간이라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도록 깨끗하게 치워진 방이 있다는 것이야.”
“외부인이 자신이 쓰던 방에 흔적을 지운 건 아닌가?”
“그건 또 아니야. 몇몇 곳은 사람이 살만한 방은 아니었으니까. 지하에 파놓은 동혈이나, 곳간 같은 곳에서 십 년, 십오 년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남궁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군.”
“그래.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네.”
취월걸개는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무림에서 제일가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개방이지만, 아직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에 답답함을 느낀 것이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이 정도면 대단하군. 역시 취월걸개야.”
“예끼! 무룡아 놀리지 말아라.”
남궁무룡이 그를 띄워주자 취월걸개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풀렸는지, 조금 전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
“그래, 그리고 이제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질 만한 소식을 일러주마.”
“오, 무슨 소식인지 벌써 기대되는군.”
“바로 조금 전에 전달받은 아주 따끈따끈한 소식인데 말이야······.”
취월걸개는 빙긋 웃으며 조금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외손주가 글쎄. 바로 내일 승급시험을 본다고 하네.”
“허허···. 그게 사실인가?”
“그럼, 내가 빈말하는 거 봤나?”
“아니지. 절대로 아니지.”
외손주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남궁무룡과 취월걸개의 얼굴에는 따사한 미소가 어렸다.
남궁무룡은 벌써 몇 달이나 보지 못한 그의 외손자의 총명한 눈빛과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남궁세가에서 온 파발이 물고 온 소식이니 정확할 것이네. 지금 남궁세가 내에서도 그 사실 때문에 난리라고 하더군. 아이고, 고 녀석을 내가 제자로 들였어야 했는데.”
“하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가서 하현이 녀석을 꾀어보게나.”
“떼잉. 그놈은 글렀어. 내가 이렇게 허리가 아픈데도 그 커다란 녀석을 업고 수백 리를 달렸건만, 처음 본 외할아버지한테 찰싹 달라붙어서는 말이야. 에잉, 가족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말로는 불평이 한가득하였으나, 취월걸개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문파도 다르고, 며칠 같이 있지도 않았건만 하현을 아끼는 마음을 아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나중에 고놈이 신법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면 내가 슬쩍 일러주던가 하지 뭐.”
“하하. 좋네. 취월걸개의 신법이라 하면 온 강호에서도 알아주지 않던가? 아무래도 우리 남궁세가에서만 배우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걸세.”
“허 참. 이것 봐라. 남궁 늙은이가 이렇게 입에 발린 말도 잘할 줄 알았나? 늦게 본 외손주가 그리도 이뻐?”
“하하···. 참······.”
취월걸개는 부끄러운지 대답하지 못하는 남궁무룡을 계속 놀려댔다.
남궁무룡이 계속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그를 구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똑똑-
“아버님. 기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궁무룡이 반갑게 대답했다.
취월걸개는 무언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한 인영이 들어왔다.
칠척장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큰 키와 보통 성인 남자의 두 배는 되는 어깨넓이.
그리고 바위를 깎아 만든 것 같은 근육질의 남자였다.
흡사 내공이 아닌, 외공을 익힌 것 같은 무인의 모습이었다.
“취월걸개 어르신도 계셨습니까.”
“그래. 너는 아직도 여기 있던 거냐. 남궁세가를 너무 오래 비운 것 아니야?”
“네. 그래서 이제 슬슬 들어가 보려 합니다.”
“그래? 드디어 임무가 끝났나 보구나.”
“그렇습니다. 오늘 무림맹주님과의 회의에서, 사도련 측은 이번 군소 방파들의 멸문지화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취월걸개와 남궁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취월걸개는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자연스럽게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면 너도 이제야 그 녀석을 보겠구나.”
“그 녀석이라면 영령의 아들···. 하현 말입니까?”
“그래 맞다.”
“후후.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입관 시험에서 환이를 이겼다고요. 불세출의 기재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민이와 비견될 만큼이지.”
남궁민의 이름이 나오자 남궁기현의 험악한 얼굴에서도 씨익 미소가 흘러나왔다.
남궁민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의 자랑이었다.
“아이고, 웃는 꼴이 참으로 무섭구나. 녹림채주가 따로 없다. 민이는 널 안 닮아서 참 다행이다.”
“하하.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민이는 저를 아주 꼭 빼다 박았지요.”
“거짓이 죄악이라는 건, 이 거지도 아는 사실이라네.”
남궁무룡은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언제나부터 그랬다.
세상 제멋대로 사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속정이 깊은 취월걸개와 겉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세상 다정한 남궁기현.
둘이 만나면 항상 그를 웃게 해주었다.
“아버님께서도 함께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그래. 돌아가야지. 집으로 말이다.”
“네. 집으로.”
남궁무룡과 기현은 집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무림맹에서 아무리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집처럼 편한 곳은 없으니 말이다.
“자네도 가고 싶으면 같이 가도 좋네.”
“아, 그래도 되는가?”
“안된다고 해도 어차피 따라올 게 아닌가?”
“하하하! 그러지. 무림맹 밥은 맛이 없어서 말이야. 빌어먹더라도 더 맛있는 밥을 빌어먹어야 올바른 거지의 자세라고 할 수 있지.”
“말이라도 못하면.”
남궁무룡과 취월걸개는 서로를 보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럴 것 같았지.”
말을 하지 않아도 친우의 마음을 알아주는 남궁무룡을 보며 취월걸개가 씨익 웃었다.
취월걸개가 남궁세가에 가려는 이유에는 하현 역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 * *
하현의 승급시험 날 아침.
남궁규현이 하현의 승급시험을 바로 오늘로 당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청룡각의 승급시험이 굉장히 단순하고 깔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하다고 해서,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남궁규현은 하현을 데리고 세가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평소의 승급시험이라면 규현 혼자서 왔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남궁기철도 함께였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외조카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싶어서 따라온 것이 분명했다.
“오늘 보는 시험은, 어떤 시험입니까?”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라가던 하현이 입을 열었다.
잠자코 있으려니, 도저히 궁금해서 참지 못한 것이다.
“하하. 언제 물어보나 했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남궁규현은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다, 어느덧 걸음을 멈추었다.
“자. 다 왔다.”
다 왔다는 말에 하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른 특별한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장원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주괴로 쌓아 올린 탑이 하나 있다는 것 외에는.
남궁규현은 강철탑을 쿵쿵- 몇 번 쳤다.
꽤 강한 힘으로 때린 것 같건만, 탑은 미동도 없었다.
“척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지?”
“그렇습니다.”
하현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규현의 행동으로 보아, 이 강철탑을 이용한 시험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이 탑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짐작이 안 갔기 때문이다.
“자. 이걸 받아라.”
남궁규현은 소중하게 가져온 검 한 자루를 검집째 하현에게 건네주었다.
스릉-
하현은 검집에서 검을 살짝 꺼내 보았다.
척 보기에도 잘 벼려진 상등급의 검이었다.
‘갖고 싶다.’
하현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검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이미 그는 뼛속까지 무인이었다.
“가지고 싶으냐? 그렇다면 시험에 통과하면 된다. 시험에 통과하고, 대원이 되면 그 검을 선물로 주마.”
“정말입니까?”
“그래.”
“시험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남궁규현은 강철탑을 한 손으로는 강철탑을 가리키고, 또 한 손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
“세 번. 세 번의 출수로 저 탑을 무너뜨려라. 단 몸을 던지는 것은 안 되고, 그 검이 부러져도 안 된다. 오직 검술로 저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