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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7화 (17/304)

17화

늦은 밤.

오늘도 어김없이 하현은 공터에서 검을 휘둘렀다.

이미 충분히 완벽해 보이건만, 하현은 질리지도 않는지 가로베기, 세로베기, 찌르기를 반복했다.

‘아직도 이 검에 익숙해지지 않았어.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

하현이 정식 대원으로 승급한 지도 벌써 일주일.

하지만 그의 생활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하현아. 네 사부님이 될 분은 따로 있단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본디 승급하고 나서 며칠 안에 사부가 정해지고, 각자 개인적으로 수련을 진행해야 했으나, 이상하게도 하현은 아직 그 누구와도 사부의 연을 맺지 못했다.

‘다 뜻이 있으셔서 그런 거겠지.’

하현은 이에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것은 그 자신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사실.

그가 할 일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낮에는 남궁규현에게 창궁검법에 이은 대연 검법의 초식을 배운다.

아니, 이미 초식은 처음 배웠을 때 완벽하게 숙지했고 묘리 역시 충분히 이해했지만, 사소한 습관이나 조금이라도 더 바른 자세를 위해 수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지금처럼 개인적으로 수련을 한다.

남궁 소화도 그런 하현에게 자극을 받는지 열심히 하였지만, 오늘은 하루만 쉬겠다고 하여 혼자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검을 휘두른 하현은 눈을 감고 검을 치켜들었다.

하현은 그의 앞에 누군가 검을 든 무인이 있다고 상상했다.

그가 지금껏 상대해 본 무인이라고 해봤자 마윤철과 남궁환 그리고 팽헌홍이 전부였지만, 하현은 그들의 움직임,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까지 머릿속에서 조합하여 최적의 움직임을 가지는 적을 만들어냈다.

하현과 비슷한 자세로 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가상의 무인.

비록 하현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하현은 상상 속의 자신이 하는 것과 같은 동작을 실제로도 취했다.

샤악- 샥-!

자신이 상상하는 그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굉장히 좋은 수련법이다.

하지만, 실제로 몸을 움직이며 나의 움직임과 가상 상대의 움직임 모두를 계산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물론 하현은 그 힘든 일을 숟가락질하듯 편하게 하고 있지만.

하현의 움직임이 점점 절정에 다다라 간다.

보법을 요란하게 밟기도 하고, 청풍검법을 극성으로 펼치기도 하며 가상의 적과 싸우던 하현이 절정의 순간 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휘익-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른 검이지만, 하현의 머릿속 가상의 무인은 지금 이 순간 목이 날아갔다.

상상 속이기는 하지만, 목을 베는 하현의 손속에는 거침이 없었다.

“휴우-.”

가상의 비무를 마친 하현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른다.

조금 전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었다.

터벅- 터벅-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듣던 소화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칠 아저씨의 가벼운 발걸음도 아니었다.

‘누구지?’

하현은 어둠 속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덧 나타나는 한 인영.

“환 형님?”

“안녕. 현아. 여기 있을 줄 알았어.”

그는 남궁환이었다.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형님이랑 너무 얘기를 못 한 것 같았어요. 수련에 너무 바빠 보이셔서요.”

“하하. 내가 그랬나?”

남궁환은 처음 하현이 남궁세가에 적응할 때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 중에 하나였다.

갑자기 생긴 남동생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현의 옆에 찰싹 붙어서 남궁세가에서 해야 할 행동이나 예법 등을 세세하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남궁환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남궁환은 식사 시간에만 잠시 얼굴을 비추곤, 종일 연무장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하현의 무공 성취였다.

남궁규현이 짐작했던 것처럼, 하현의 존재 자체는 남궁환에게 엄청난 자극제가 되었다.

원래도 자질이 부족하지 않던 그였지만 동기부여가 부족했기 때문일까?

조금은 게으른 모습이 보이던 그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수련에 매달렸다.

그렇기에 최근 그는 제법 성취를 이뤄낸 것으로 보였다.

“맞네. 이렇게 둘이서 이야기하는 건 오랜만이네. 정식 대원이 된 것 정말 축하해. 나는 그 철탑을 무너뜨리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말이야.”

“운이 좋았어요.”

“운도 중요하지. 그런데 넌 내가 볼 땐 절대 운은 아닌 것 같아. 실력이지.”

“칭찬 고마워요. 형님.”

남궁환이 씨익 웃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그는 역시 하현이 마음에 들었다.

저 고맙다는 말이 온전히 순수하게 고맙다는 뜻인 것도 안다.

“훔쳐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혼자서 비무를 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맞아요.”

“혼자서 할 바에는 나와 한번 해보는 것이 어때?”

“대련을요?”

하현은 슬쩍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궁환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하하, 그런데 검술을 다투는 대련은 못 하겠구나. 내가 검도 안 가지고 나왔고, 목검도 없어서. 그러니 이건 어때? 청룡각 입관시험에서 했던 간이 대련으로 하자.”

서로를 밀어 넘어뜨리는 간이 대련.

청룡각에 입관하기 위해서 했던 것이기에 겨우 몇 달 전이건만, 왜인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저번에 내가 이긴 건 팔 할이 운이었다.’

하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남궁환과의 대련이 하고 싶어졌다.

같은 상대와 같은 방식으로 하는 대련은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음... 좋아요. 형님.”

“그래.”

남궁환은 하현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은 들고 있던 검을 한쪽 구석에 살포시 내려두고, 남궁환을 바라보았다.

‘형님도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의 남궁환이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물소 같은 기세였다면, 지금 하현을 바라보는 남궁환의 눈빛은 침착하게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하현이 발전하는 동안, 남궁환이라고 놀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는 한층 발전된 남궁환과의 대련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간다.”

“넵!”

파앗!

이번에도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 들어갔다.

다만, 몇 달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빠른 속도였다.

타다다닷!

남궁환은 이번에도 무한보를 밟아왔다.

하지만 이전처럼 판에 짜인 듯한 길을 그대로 밟아오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응용되고 변형된 보법이 그간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하압!”

남궁환과 부딪히기 직전, 하현은 찰나의 고민을 하였다.

저번처럼 횡으로 움직이며 옆을 노릴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뒤로 물릴 것인지.

하지만 눈 한 번 깜빡일 시간도 되지 않을 찰나에 하현은 세 번째 선택지를 선택했다.

오히려 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밟아 나가며 남궁환에게 장을 내지른 것.

하지만 남궁환도 예상했는지, 하현의 장을 손바닥으로 맞받아쳤다.

콰악-!

한순간의 부딪힘 후에, 둘은 다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진심전력은 아니었다만, 나름 공력을 담았는데 끄떡도 없구나? 단 몇 개월 만에 무섭도록 강해졌어.”

“그렇다고 해도 아직 형님한테는 한참 모자란 것 같은데요?”

남궁환이 피식 웃었다.

“벌써 나를 이기려고 하는 걸 보니, 너 양심이 없는 편이구나? 난 그래도 벌써 오 년을 수련했다고!”

그리고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현에게 달려들어 양팔을 내질렀다.

쒜엑-

하현은 이번에도 그 손을 받아치려다, 뻗어져 오는 손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샤악-

겨우 종이 몇 장 차이 정도로 겨우 피해낸 하현은 피하는 자세에서 보법을 밟아 남궁환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곤 미처 팔을 회수하지 못한 남궁환을 향해 장을 내뻗었다.

퍼억-!

하현의 손바닥은 분명 남궁환의 몸에 닿았다.

하지만 남궁환은 하현의 공격에 당한 것이 아닌, 왼쪽 어깨로 하현의 손을 받아내고는 팔을 번개같이 움직여 겨드랑이 사이에 하현의 손을 껴 넣었다

“걸렸다.”

남궁환은 깊은 미소를 지었다.

하현이 팔을 빼내려 해봤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잡혔는지 팔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팔 빼는 것을 포기한 하현은 오히려 남궁환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가 자유로운 왼손으로 남궁환의 오른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시작된 둘의 힘 싸움.

“으아압!”

“하아압!”

둘에게 남은 것은 기교나 기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힘과 내력의 싸움뿐.

뿌득- 뿌득-

잠시 동안 소강상태였던 승리의 추는 남궁환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현은 남궁환보다 나이도 어리고, 키도 머리 하나는 더 작다.

힘 싸움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 남궁환에게는 하현과 이렇게 대등하게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패배한 것, 그리고 패배한 것과 다름없는 것은 말 그대로 천지 차이.

남궁환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결국 하현의 몸이 기우뚱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겼다.’

남궁환이 승리를 직감한 순간.

“하압!”

하현이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모았다가, 온 힘을 다해 바닥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푸욱-

하현이 낼 수 있는 마지막 진기를 모두 짜내어 내지는 발은 바닥을 뚫고 정강이까지 쑤욱 들어갔다.

다리가 땅에 꽂혔기에 자연스럽게 하현이 넘어가던 것이 멈췄다.

“아 아니…. 하. 하하하. 이건 반칙 아니야?”

남궁환은 뭐가 그리 웃긴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하현에게서 떨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규칙은 전혀 없었잖아요? 스승님도 그런 말은 하신 적 없고요.”

“그건 당연히 연무장은 바닥이 이런 흙바닥이 아니라 석재를 깎아서 만들어놓았으니 너처럼 바닥을 뚫을 수는 없을 거 아니냐?”

남궁환의 말이 맞았다.

이런 공터가 아닌 연무장이었다면, 그대로 남궁환의 승리였으리라.

하현은 땅에서 발을 뽑아내어 흙을 탈탈 털면서 대답했다.

“주어진 지형과 상황을 잘 이용하는 것은 무인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배웠습니다.”

“하하! 그래. 너 잘났다! 이제 보니까 너 승부욕도 장난 아니구나?”

항상 예의 바르고 공손하며 겸손해 보이는 하현이었건만, 이제 남궁환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현이 가슴속에 숨기고 있는 열기를.

털썩-

남궁환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하현과의 대련이 제법 힘들었는지 아예 벌렁 누워버렸다.

“아이고. 힘들다. 몇 달 동안 죽어라 해 봤지만, 역시 이렇게 빡빡하게 수련하는 건 나랑 안 맞아.”

“...형님도 몇 달 만에 발전하신 게 눈에 보일 정도예요.”

“흐흐. 그러냐. 그런데 나는 내 수준을 잘 안다.”

남궁환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수백 개의 별을 바라보았다.

“나도 남들과 비교해 뛰어난 재능이라는 건 알고 있어. 청룡각 입관시험 동기만 해도 스물이 넘어가니 비교할 대상은 많았으니까. 그런데 민이 형의 재능을 보면 저 별을 보는 기분이야.”

남궁환은 팔을 하늘로 뻗어 손을 움켜쥐었다.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반짝반짝 빛나지만, 내 손에는 들어오지 못하겠지.”

“형님······.”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야.”

“네?”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매일같이 말 그대로 진화하는 너를 보고 있으면, 마치 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야. 빛나지만, 아득하게 멀지.”

“······.”

“읏차!”

남궁환은 벌떡 일어나 바지와 등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고맙다. 오늘부로 깨끗하게 정리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제 남궁세가의 가주 자리는 포기해야지. 민이형에 이어, 조만간 너에게도 따라잡힐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야. 한 번이라도 이렇게 죽어라. 노력해봤기에 별로 미련도 없다. 나는 앞으로 적당히 수련해서 적당한 무인이 될 것이야.”

남궁환은 하현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라. 고맙다.”

뒤 돌아가는 남궁환의 모습은 굉장히 홀가분해 보였다.

하현은 왠지 그 뒷모습을 보며 남궁환이 무언가 크게 내려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왜?”

“저는 매일 이 시간에 이곳에 나와 수련을 해요.”

“알지. 그래서 찾아왔고.”

“스승님이 분명 대련을 통해 수련한다면, 성취가 더욱 빠르다고 했어요.”

“맞는 말이지.”

“매일이던, 격일이던, 저는 항상 이곳에 있겠습니다. 언제든 대련할 사람이 필요하면 찾아오세요. 그리고 꼭 대련이 아니더라도. 함께 수련하면 더 힘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하현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가주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무공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꼭 그만둔다는 건 아닌······.”

“제가 무공을 이렇게까지 익히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남궁환은 진지하게 말하는 하현의 얼굴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 이유가 뭔데?”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으면 힘이 필요하다고. 저는…. 다시는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집이든, 사람이든….”

하현이 짜내고 짜내 건넨 최적의 위로였다.

포기할 필요 없다고, 매일 함께 수련하며 함께 강해지자고.

남궁환은 심각한 표정의 하현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툭 올리고 두어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맙다. 고마워.”

“그럼 형님······.”

“하하. 우선 며칠은 놀다가 심심해지면 생각 좀 해볼게. 얘기해줘서 고맙다.”

설렁대며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하현은 남궁환이 절대 그저 그런 무인으로 남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가주는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타고난 무골과 무에 대한 집착이라면 그는 다시금, 이곳에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사라지는 남궁환의 뒷모습에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기운이 아지랑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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