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하현과 남궁환이 맞붙은 그날부터 사흘째 되는 날.
남궁환은 생각을 정리했는지 자연스럽게 야간 수련에 함께하기 시작했다.
‘환 오라버니! 안 그래도 여기 좁은데 오라비까지 여기로 오면 어떡해!’
라는 소화의 사소한 반항이 있었지만, 남궁환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함께 하는 것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하현은 남궁환의 선택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가주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혹은 그의 말대로 가주는 포기 했지만, 무에 대한 집착과 열망으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강해지려는 이유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강해지고자 한다는 그 자체였으니.
‘그러고 보니, 민이 형님은 무엇을 하시고 계시나?’
저번 임무에서 돌아오고 나서, 장원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으니 틀림없이 남궁세가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무슨 일인지 남궁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현은 분명 남궁민에게도 무언가 배울 게 있을 거로 생각하여 그를 만나고 싶었건만, 남궁환이나 남궁소화는 남궁민이 종종 그런다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평소처럼 일어나 오전 수련을 하러 가려던 하현은 오늘따라 묘하게 세가의 분위기가 들떠있는 것을 파악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하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완 아저씨!”
하현은 때마침 앞을 지나가던 주완을 불러세웠다.
주완은 하현이 청룡각 입관시험을 볼 때 앞에서 수험생 호명을 해주었던 하인으로, 입관시험이 없는 평상시에는 연무장 정리나 훈련용품 정비를 맡아주었기에 하현이 친분을 쌓은 몇 안 되는 하인 중의 하나였다.
“아! 하현 도련님. 오늘도 잘 주무셨습니까?”
남궁세가의 모든 하인들은 남궁민이나 남궁환, 그리고 남궁소화를 대할 때처럼 하현에게도 친절하고 깍듯했다.
외손주라고 해서 홀대한다거나, 텃세를 부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요? 다들 엄청 바빠 보이는데.”
“아. 못 들으셨어요? 오늘 가주님께서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요?”
하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록 며칠 못 보았지만, 하현은 남궁무룡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편하고 따뜻했다.
“네. 그리고 창천각주님도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아참. 도련님은 아직 창천각주님을 뵌 적이 없죠?”
주완이 말하는 창천각주는 남궁기현이었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한 번도 못 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오후에 처음 뵙게 되겠네요. 굉장히 좋은 분이시랍니다.”
“그렇겠네요. 바쁘실 텐데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주완은 그런 하현이 귀여운지 얼굴에 미소를 잔뜩 머금고는 이따가 가주님이 오실 때 다시 보자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현 역시 할아버지가 오신다는 소식에 들뜨기는 했지만, 지금은 오늘의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현은 이제 대장간에서 받아 온 검을 제법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이질감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고, 백 번을 휘두르면 아흔다섯 번 정도는 하현이 원하는 곳을 벨 수 있었다.
나머지 다섯 번도 손가락 한 마디도 넘어가지 않는 정도의 차이였으나, 하현은 그에 만족할 수 없었다.
‘백이면 백.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해야 기본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무공에 대한 끝없는 집념 덕분에 하현의 무공은 점점 더 단단해져 갔다.
한창 성장기의 하현이기에 온몸의 근육 역시 검을 휘두르기에 적당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이지만 키와 팔도 제법 자랐다.
지금껏 수많은 무인들을 키워 낸 남궁규현도 하현의 집념과 성장에 하루가 다르게 새삼 놀라곤 했으니까.
“오늘 수련은 이만 끝내겠다. 내가 오후에는 할 일이 좀 있어서. 자율적으로 수련하고 싶으면 수련해도 된다.”
“넵!”
남궁규현이 수련에 한창인 수련생들에게 말했다.
몇몇은 그 말에 주섬주섬 연무장을 나갈 준비를 했고, 또 몇몇은 자율적으로 더 수련하려는지 그 말에 개의치 않고 하던 행동을 계속했다.
하현 오후에도 계속 수련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할 때, 남궁규현이 하현을 불렀다.
“하현.”
“네. 스승님.”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알겠습니다.”
하현은 군말 없이 검을 갈무리하여 검집에 넣고는 남궁규현에게 다가갔다.
남궁규현은 하현이 따라나서자 별말 없이 연무장을 나서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스승님. 어디에 가는 겁니까?”
“너는 저번에 승급 시험을 보러 갈 때도 그렇고, 꼭 나중에 물어보는구나.”
“기다렸는데 말씀을 안 해주시니까요.”
남궁규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궁금하지 않아서 물어보지 않은 줄 알았지. 궁금한 걸 참고 있는 거였구나.”
“네.”
“앞으로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먼저 물어봐라. 배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문과 호기심이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서 지금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남궁규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식 대원이 되고서 정말 오래 걸렸지? 네 사부님을 만나러 가자.”
“사부님이요?”
하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놀라느냐.”
“사실 저는 오늘 할아버님이 오시는 날이라고 하시기에, 할아버님을 뵈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부님이라니······.”
“하하하. 이제 궁금한 건 다 풀렸느냐? 사부님이 누구냐고는 물어보지 말아라. 그건 가서 가르쳐줄 테니.”
“네엡.”
남궁규현은 더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고, 하현은 부루퉁한 얼굴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잠시 후 남궁규현과 하현이 도착한 곳은 경각전이었다.
하현이 남궁세가에 처음 도착한 날 가장 처음 들어온 이곳.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다시는 올 일이 없었던 곳.
‘여기서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지.’
몇 달 전 일인데 마치 며칠 전인 것만 같다.
‘이곳에서 할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증표를 보여드리자 안아 주셨었는데.’
하현은 그때가 참 따뜻했다고 느꼈다.
남궁무룡이 자신을 와락 안았을 때 진짜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졌으니까.
아무리 총명하고 맹랑하다고는 해도 아직 하현은 열 살 아이.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때였다.
‘바로 저 문을 여니 할아버지가 계셨지.’
하현이 아련하게 생각에 젖어 있을 때 남궁규현은 마치 하현의 생각을 읽은 듯 하현이 보고 있던 문 앞에 서서 작은 소리로 외쳤다.
“가주님. 규현입니다.”
하현이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안쪽에서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하현은 그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할아버지?’
분명히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하현은 얼떨떨하게 남궁규현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
“하하. 하현아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남궁무룡은 예전의 그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하현은 검존의 뜻에 부응하듯,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신법을 펼치고 자시고 하는 것 없는 단순한 달리기.
하현은 남궁무룡에게 달려가 폭 안겼다.
“아이고. 현아. 이 할애비가 그렇게도 반가웠느냐.”
“네. 조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하현은 퍼뜩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남궁무룡은 하현을 귀엽게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사이에 키가 제법 자란 거 같구나. 가진 기도도···. 이전과는 또 사뭇 다르고.”
남궁무룡 정도 되는 수준의 무인이라면, 수준 차이가 크게 나는 상대는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가진 무공을 가늠할 수 있다.
그가 보았을 때, 기도만으로 본다면 무림맹으로 떠나기 전의 하현과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할아버지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요.”
“허허. 그래 보이는구나. 장하다.”
남궁무룡은 진심을 담아 하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어린 것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인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조부님. 저 대원 승급 시험에서 통과했습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멋지구나.”
“그래서 오늘 제 사부님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는데···. 스승님이 농을 치신 모양이로군요.”
남궁무룡이 깊은 미소를 지었다.
“농이 아니다.”
“네?”
“규현이가 어디 이런 농담을 할 사람으로 보이느냐?”
하현이 남궁규현을 슬쩍 바라보자 수련시간에 기본!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그렇다는 말씀은······.”
“이 할애비가. 너의 사부라는 말이지.”
하현이 어찌나 놀랐는지 눈이 주먹만 해졌다.
어지간해서는 평정을 잃지 않는 애늙은이 하현이건만, 이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왜. 싫으냐?”
“아닙니다!”
“좋아?”
“예! 좋아요!”
하현은 무척이나 기쁜 얼굴이었다.
규현은 지금껏 하현이 이토록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
하현은 무언가 생각난 듯, 남궁무룡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지더니 풀썩 절을 올리려 했다.
그때 벽 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배은망덕한 녀석을 보았나! 이 몸은 뵈지도 않는 게냐? 내가 제자를 하라고 할 때는 그렇게 단번에 거절하더니. 아이고! 누구 손주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취월걸개 어르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취월걸개가 하현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현이 그 표정에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어물쩍거리자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취월걸개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것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취월걸개의 등장에 하현이 놀라 저도 모르게 남궁무룡을 돌아보았는데, 할아버지의 표정은 무언가 흐뭇한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하현은 그 얼굴 속에 든 흐뭇함을 깨닫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는 내 가르침을 받을 생각이 없느냐!”
“저, 저는….”
“확실히 말해라!”
취월걸개의 호통에 하현은 굳은 표정을 짓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남궁세가에서 살고 싶습니다. 취월걸개 어르신께서 가르침을 주신다는 말씀도 너무 감사하지만···. 개방에 가서 살고 싶지 않아요.”
“왜. 개방이 거지 소굴이라서?”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무엇이냐?”
취월걸개의 목소리는 언제 호통을 쳤냐는 듯 어느새 손자를 대하듯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현은 잠시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이곳이 이제 제집인걸요. 집을 두고 다른 곳에 가고 싶지는 않아서요.”
“흐흐…. 무룡아. 네 외손자를 어떻게 이렇게 홀린 것이냐.”
“홀리다니 이 사람아! 원래 피가 그토록 진한 것이다. 혼인도 안 해보고, 자식도 안 낳아본 너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억울해서라도 나도 혼인이나 할 걸 그랬다.”
“평생 좋다는 여자는 있었고?”
“이놈이!”
둘은 서로를 놀려대지만, 얼굴은 방긋 웃고 있었다.
사실 둘은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취월걸개는 남궁무룡과 조금 더 농을 주고받다가 하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계속 살게 된다면 내 가르침을 얻을 생각이 있느냐?”
“네…? 그게 무슨….”
하현은 이번에도 취월걸개의 물음에 한 번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오성을 가진 하현이라고 하여도, 취월걸개는 계속 그의 상식 밖에 있는 얘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한동안 여기 머무르며, 너에게 무공을 하사해주겠다 이 말이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멀찍이서 대화를 듣고만 있던 남궁규현에게서 깜짝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왜.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어?”
“어느 곳에서 수련을 받든 간에, 하현은 우리 남궁세가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취월걸개 어르신의 제자가 되라고 하면….”
“내가 언제 내 제자가 되라고 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남궁규현은 슬쩍 남궁무룡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취월걸개가 제 멋대로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전에 남궁무룡과 협의가 된 사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궁무룡은 규현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꼭 제자한테만 내 무공을 가르쳐줄 필요는 없지 않으냐. 대신에 개방에서 내려오는 무공들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다만….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내가 창안하고 개발한 무공들을 가르쳐 주는 건 문제가 없겠지. 할애비 친구로서 말이다.”
규현은 이번에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애초에 이런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가르침이라는 것을 꼭 스승한테서만 배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신에······.”
하지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취월걸개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규현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2년 뒤에 하현이에게 나를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다시 물어볼 거다. 그리고 그때는 하현이 나를 따라가고 싶게 만들 것이다. 나, 취월걸개다! 지금껏 내가 갖고 싶어 한 것 중에 못 가진 것이 없었어! 이봐 무룡이. 내 말이 맞지?”
전 무림에서 검존이라고 불리는 남궁무룡마저 취월걸개의 말에 그저 맞다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