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한 번, 두 번…. 아홉 번. 사부님에게 올리는 구배지례.
하현이 아홉 번의 절을 모두 할 때까지 남궁무룡과 규현은 물론, 취월걸개마저 흐뭇한 얼굴로 하현을 지켜보았다.
“네가 세가에 온 첫날 바로 이 자리에서 하현이 네가 청룡각에서 잘한다면 나에게 무공을 배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구나. 이렇게 빠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남궁무룡은 진중한 하현을 보고 허허 웃었다.
“실은 나도 이렇게 제자를 들이는 것은 처음이라 어색하구나. 앞으로도 사부가 아닌 할애비라고 불러줄 수 있겠느냐.”
“네. 조부님.”
남궁규현은 서로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두 조손(祖孫)을 보며 감격에 겨워 생각했다.
‘남궁세가의 더욱 창창한 미래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만약 저 둘이 욕심이 많았다면···. 천하는 남궁세가의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때 취월걸개가 그들의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며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흠흠, 나한테는 스승이라고 해도 된다.”
“예?”
“너희 남궁세가에서는 스승이랑 사부를 구분한다면서? 사부는 무룡이한테 뺏겨버렸지만, 나도 가르침을 줄 예정이니, 너에게 스승 소리는 들어도 되는 것 아니겠느냐?”
“아…. 그것도 그렇군요.”
“그것도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거다.”
“네. 이제부터 스승님이라 하겠습니다.”
“낄낄, 그것참 듣기 좋구나.”
규현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월걸개를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곧 생각을 달리했다.
‘저것이 하현이 가진 가장 큰 무기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그리곤 곧 자조적으로 웃음 지었다.
‘이미 나도 하현에게 홀린 게 분명하군.’
* * *
남궁무룡이 돌아오고도 애석하게도 며칠간, 하현은 남궁무룡에게서 어떠한 무공도 전수 받을 수 없었다.
많은 일을 남궁기철이 가주 대리로서 도맡아 했다고는 해도, 가주만이 해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다.
남궁무룡은 세가의 무인들에게 인사를 받고, 밀린 업무를 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현은 이에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궁무룡이 없었을 때도 남궁규현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수련했던 하현이다.
그런 그에게 며칠 더 기다리는 것쯤은 큰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또 한 명의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발바닥에서 온 힘을 터뜨린다고 한 것이 용천혈에서만 기를 뿜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발 전체에서 기가 나온다고 생각하란 말이야!”
“이렇게…. 말입니까?”
쿵-
하현이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범인이 보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신위였건만, 취월걸개의 얼굴은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아니 아니! 아직도 일부분만 쓰질 않느냐. 이렇게 하라니까?”
쾅-!
취월걸개가 답답했는지 가슴을 몇 번 쿵쿵 치고는 다시 시범을 보였다.
하현이 발을 굴렀을 때보다 훨씬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순간 취월걸개의 신형이 사라지는듯한 착각마저 일게 했다.
“어떻게 했는지 알겠지? 그치?”
“음…. 그러니까, 발바닥 전체가 거대한 혈이라고 생각을 하라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그게! 음…. 맞나? 그건가?”
정말 애석하게도 취월걸개는 훌륭한 무인이었지만, 좋은 스승은 아니었다.
아니, 평생 누구를 가르쳐본 적 한번 없었기에 오히려 못 가르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래! 그것보다는 발바닥에도 땀샘이 있지 않느냐? 그 땀샘. 거기에서 기운이 땀처럼 스며 나온다고 생각을 하면 될 것 같다!”
“땀샘! 그렇군요.”
쾅-!
하현은 취월걸개가 조금 전에 한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굴렀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소리.
많이 미숙한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취월걸개의 요령을 어느 정도는 따라 해낸 것이다.
“맞다! 바로 그거다.”
취월걸개는 하현이 무언가를 배워 갈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하현은 굉장히 좋은 제자였다.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고, 깨달음이라는 과정 따위는 사치라는 듯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 기재 중의 기재.
‘나도 개방으로 돌아가면 정말 제자를 하나 구해봐?’
덕분에 취월걸개도 인제 와서야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질 정도였다.
* * *
취월걸개는 온 무림에서 경공의 대가로 소문이 퍼져 있다.
물론 개방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장로라는 직책에 있을 정도이니, 가진 무력 역시 온 무림에서도 알아줄 수준이지만, 무림에서 누가 가장 빠른가에 대한 물음에 취월걸개의 별호는 항상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취월걸개는 하현에게 신법과 보법 위주로 가르쳤다.
자신이 평생을 갈고 닦은, 그래서 가장 자신 있는 것을 하현에게 직접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그것만 봐도 매사에 제멋대로였던 취월걸개가 하현만큼은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 주가 흘렀다.
그 이 주 동안, 하현은 혹독하게 굴렀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땅을 굴렀다.
취월걸개의 보법을 익히기 위하여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땅을 굴렀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하현은 그 짧은 시간 만에 취월걸개의 묘리를 이해해낼 수 있었다.
쾅-!
연무장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거운 돌덩이가 연무장에 떨어진 것 같은 소리지만, 실상 이 소리는 하현이 연무장 바닥을 박차는 소리였다.
스슥-
하현이 발을 박차는 순간, 그의 신형이 아주 살짝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현은 이 장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지!”
취월걸개는 체면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많이 미숙하고, 또 앞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것투성이지만….
‘이 녀석이라면 정말로 이형환위(移形換位)를 구현해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감탄 다음은 흥분감이었다.
이형환위라 함은 날고 긴다 하는 초인들이 즐비한 무림에서도 전설 속의 신법으로 통하는 무공이었다.
쉽게 말해 순간이동이라고도 하는 비현실적인 신법.
하지만 취월걸개의 생각은 달랐다.
‘상대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 그게 이형환위 아닌가?’
그리고 그는 평생에 걸쳐 이형환위를 연마해왔다.
방법은 단순하다 못해 무식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공력을 다리에 실어, 빠르게 땅을 박차 움직이는 것뿐.
하지만 이 방법은 주효했다.
그 결과 지금 그는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헉···. 헉······.”
하현이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 방법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는데, 내공의 소모가 무지막지하다는 것이었다.
상승의 심법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하현이라고는 하나, 물리적인 시간을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취월걸개나, 검존이 이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앞당기고 싶은 하현이었다.
“꼬맹아. 남궁세가에 처음 오던 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던 것들을 이제는 알겠느냐?”
“네. 스승님 덕분에 어느 정도는 깨달은 것 같습니다.”
“되지도 않는 겸손은 말아라.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취월걸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가 표정에 풀이 죽으며 하현에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말이다.”
“네. 스승님.”
“내가 잠시 맹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맹이라면 무림맹 말씀이신가요?”
“그래. 맞다.”
취월걸개는 정말로 가기 싫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제멋대로 사는 취월걸개일지라도 무림맹에서의 일은 무시할 수 없었다.
평생을 정의감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무림의 안위를 위협하는 마교 같은 단체의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승님의 가르침 되새겨 놓고 있겠습니다.”
“끄응······.”
취월걸개는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했다.
‘네가 문제가 아니라, 무룡이가 내가 없는 새에 널 얼마나 구워삶을지가 걱정이구나.’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자신이 너무 다급한 것처럼 보이기에 말로는 꺼내지 못하는 취월걸개였다.
“그래. 내가 말했지? 반복, 반복이 중요하다. 내가 금방 다녀와서 얼마나 진전이 있었나 확인할게야!”
“네. 스승님.”
“할 수 있으면, 빠르게 움직이는 것과 더불어 발을 박차는 소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 말을 들은 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강하게 땅을 박차는데, 어떻게 소리가 안 나게 합니까? 스승님도 저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시긴 하는데, 그만큼 소리도 더 크게 나는데….”
“그걸 모르니까 너보고 연구해보라는 거 아니야!”
“아···. 넵······.”
하현은 뭔가 억울한 얼굴이었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걸개는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하현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시며 무림맹으로 떠났다.
* * *
취월걸개가 떠난 다음 날.
하현은 드디어 남궁무룡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하하. 사부라고 이름만 붙여놓고서는, 드디어 이렇게 마주 앉는구나.”
“그러게요 할아버지.”
“취월이 너무 열성적이기에 내가 한 번 양보했다. 우리 하현이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
“네.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 이 할애비 생각도 안 났다면, 오히려 내가 서운한걸?”
남궁무룡과 하현은 평범한 조손처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남궁무룡이 우선 한 일은 하현의 현재 몸 상태와 기혈들을 꼼꼼하게 점검하는 일이었다.
그는 온종일 하현의 미세한 기의 통로 하나하나,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하현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대단하구나.”
그것이 그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하현은 특이체질이라는 단어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백회혈이 기형적으로 활짝 열려있고, 경락과 기혈이 장강의 대로처럼 넓다. 이런 체질은 태어나서 본 적도 없다.’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 하현의 상태는 흔히들 말하는 임독양맥이 타통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태어난 그 순간에는 임맥과 독맥이 뚫려 있다.
하지만 성장하며 먹고, 소화하고, 호흡하는 모든 생리적인 행동을 하며 몸에 탁기가 쌓이게 되고, 다섯 살만 되어도 완전히 막히고 만다.
그런데 하현은 양맥이 타통 된, 아니 더 정확히는 막힌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기에 이토록 흡수가 빨랐구나.’
하현의 특이체질을 확인한 남궁무룡은 허탈하게 몇 번 웃었다.
“취월걸개가 널 보고 뭐라 안 하든?”
“어떤 말씀이신지….”
“특이체질이라거나, 혹은 쉬운 말로 천무지체 라던가….”
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양심 없는 놈이라는 말은 많이 했습니다.”
“양심이 없어?”
“네. 취월걸개 스승님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저보고 양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 하하하.”
남궁무룡은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큰 소리로 파안대소했다.
양심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수년, 수십 년의 깨달음을 하루아침에 빼앗긴 것 같기 때문이겠지.’
그가 평생토록 어렵게 이루어낸 경지를 아주 단시간에 따라 한다.
물론 당연히도 아주 어설퍼 보이고 미숙하지만, 그것은 숙련도나 내공의 양 같은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남궁무룡은 하현을 보며 씨익 웃었다.
오늘 그가 가져온 것이 바로 그 시간을 극도로 앞당길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현아. 이것 받거라.”
“이게 무엇입니까?”
남궁무룡이 준 그것은 고급의 종이로 곱게 싸여 있었다.
하현은 그것을 고이 받아들었다.
“이건 자소단이라고 한다. 내 이번에 무림맹에서 돌아올 때 맹주가 하나쯤은 지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뺏···. 아니 부탁하여 받아 왔지.”
하현은 자소단이라는 이름을 언뜻 들어본 기억이 났다.
소림에는 대환단이 있다면, 화산에는 자소단이 있다는 그 말을.
“혹시 이것이 영단입니까?”
“그래 맞다 영단. 나의 제자가 된 기념으로 주는 것이다.”
드디어 하현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남궁무룡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