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감사합니다.”
“하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앞으로 더욱 많은 영약과 영단을 구해 줄 테니,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네. 조부님.”
“오늘은 그 자소단을 섭취할 것이다. 이런 말 하면 화산의 도사들은 분개하겠지만, 소림의 대환단과는 다르게 영약의 기운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함께하자꾸나. 내가 최대한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지만, 모든 기운을 흡수하지 못한다고 하여 절대 실망하지 말거라. 이른 시일 내에 또 준비해줄 테니.”
하현은 영단을 소중히 손에 올려놓은 채로 가부좌를 틀었고, 남궁무룡은 그 뒤에서 하현의 등에 손을 대고 앉았다.
“지금 바로 먹으면 되겠습니까?”
“그렇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유도하는 것에 반항하지 않고 잘 따르는 것이다. 본디 영단에 깃든 기운은 흡수해 내기가 힘들다. 굳이 무리하여 모든 기운을 흡수하려 하다가는 그대로 주화입마에 빠지게 되니, 내가 기운을 몸 밖으로 흩으려 하면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따라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너는 진기를 온몸으로 끊임없이 돌리거라. 임맥부터 독맥은 당연하고, 손끝 발끝까지 네 진기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해라. 힘들겠지만, 그것이 자소단의 기운을 온몸 구석구석 닿게 해줄 테니까.”
하현은 포장지를 고이 까 거무튀튀한 영단을 입에 넣었다.
입에 넣자마자 향기로운 꽃향기가 팡 하고 터져 나온다.
‘이것이 매화 향기구나.’
하현은 매화꽃 향기를 맡아본 적은 없지만, 이 향기가 매화의 것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꿀꺽-
영단은 별 무리 없이 목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현이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악-!
하현의 몸에서.
정확히는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폭발하는 것을 느껴졌다.
‘이게 무슨?’
남궁무룡은 순간 당황할 뻔했다.
화산의 자소단은 아주 귀한 물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히 희귀한 물건은 아니다.
남궁무룡이 팔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자소단을 족히 다섯 개는 섭취했고, 주변인들의 섭취를 도와준 것도 다섯 개는 되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본디 자소단의 섭취 방법은 단단히 언 얼음을 녹여가듯 운기 하며 약 기운을 흡수해야 한다.
그렇기에 시간도 매우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었다.
‘이건 마치···. 불 구덩이 속에 기름을 부은 격이 아닌가?’
그리고 자소단의 기운 역시 그에 맞는 빠른 속도로 녹아버렸다.
하현은 고통이 엄습했지만, 남궁무룡의 조언대로 온몸에 기운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운기를 한 바퀴 할 때마다 고통은 점점 커져 나갔다.
‘이건 말도 안 돼.’
몸에 흐르는 진기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남궁무룡은 지금껏 살아오며 기를 푸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운기를 하거나 무공을 펼칠 때 온몸에 푸르스름한 기가 흐른다고 상상하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붉다···. 마치 타오르는 불처럼.’
그의 눈에는 마치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끄윽….”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현은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남궁무룡은 황급하게 하현의 상태를 점검했다.
하현의 기운과 만난 자소단의 기운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크기는 점점 하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다.
척- 척-
남궁무룡이 하현의 혈 이곳저곳을 짚으며 자소단의 기운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의 능력으로도 그 속도를 줄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빠득-
이를 악물어서라도 고통을 참아내는 하현에게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 충분히 단련되지 않은 하현의 혈맥을 무지막지하게 커진 자소단의 기운이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며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흡······!”
남궁무룡은 숨을 들이켜며 자소단의 기운을 통제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이대로라면 기운을 견디지 못한 혈맥 어딘가가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운이 나빠 머리나 심장 쪽의 혈맥이 터져 버린다면, 자칫 주화입마로 죽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
스스스-
남궁무룡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진기를 사용해 하현의 기를 통제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그의 의복이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된다.’
그리고 잠시 후.
자소단의 기운이 점점 힘을 잃어가며 남궁무룡은 하현의 기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뚫려 있는 하현의 임독양맥으로 끊임없이 기를 순환시키며 계속해서 자소단의 기를 하현에게 흡수시켰다.
‘그런데 이건······?!’
남궁무룡은 극도로 집중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하현의 기의 통로가 자소단을 섭취하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져 있었다.
기운이 비집고 들어가며 억지로 넓혀버린 혈맥을 다시 기운이 흡수되며 보호해낸 결과였다.
“후우······.”
잠시 후.
남궁무룡은 하현의 등에서 손을 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의복은 이미 흘러내린 땀으로 인해 다 젖어 있었고, 그의 수염마저 번들거릴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땀을 흘려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하지만 남궁무룡은 개운함 마저 느끼고 있었다.
절정고수의 반열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어지간한 움직임에도 땀이 나지 않게 되었고, 그가 마음을 다할만한 싸움도 가장 최근의 것이 이십 년은 되었기 때문이다.
“고생했다. 정말 고통스러웠을 텐데…. 장하구나.”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하현이 뒤를 돌아 남궁무룡에게 퍽 안기며 말했다.
비록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하현이지만, 남구무룡이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칫하면 자신도 주화입마에 빠질뻔한 상황이었건만, 할아버지는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축하한다. 기연을 얻었구나.”
“기연이요?”
하현은 자신의 몸을 점검해보았다.
그리곤 그도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자소단의 효능인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많은 내공이 느껴졌다.
이전의 그의 내공이 개천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작은 강 정도는 된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내공의 양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내공이 흐르는 통로가 넓어진 것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부르는 하현의 목소리에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대단하구나. 한 톨의 낭비도 없이 흡수했어.”
뜨거운 물에 소금이 녹아내리듯 자소단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인 하현을 보며, 검존은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현의 체질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인가?’
남궁무룡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지만, 하현에게는 내색하지 않으며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허나, 앞으로 다른 영약을 섭취하는 것은 고민을 조금 더 해봐야 할 것 같구나.”
“네. 알겠습니다.”
하현은 남궁무룡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남궁무룡은 그 모습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더 빨리 강해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릴 줄 알았더니.’
하현 역시 한 번에 알아챈 것이다.
그의 체질 때문인지,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궁무룡이나 그 정도 수준의 무인이 곁에 없을 때 조금 전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꼼짝없이 주화입마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도 지금 얻은 것을 잘 활용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취를 보일 것이다.”
“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내공 수련을 하는 것은 산꼭대기에서 눈 뭉치를 굴리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눈 뭉치가 커지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미미하게 커지지만, 덩치를 불리면 불릴수록 더더욱 빠르게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현은 지금 정도의 내공을 얻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기연이라 할 만했다.
“오늘은, 이만 쉬자꾸나. 부끄럽게도 이 할애비가 오늘은 기력을 다한 것 같으니.”
“네. 정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하지만 하현은 오늘 수련을 여기에서 끝낼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 얻은 것을 한시라도 빨리 이용해서 다른 수련을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남궁무룡은 허허 웃고는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볼 테니, 여기는 쓰고 싶은 만큼 쓰거라. 저녁 먹으러 오는 건 잊지 말고.”
남궁무룡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하현의 얼굴을 보고는 기분 좋게 뒤돌아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나도 저런 열정을 가질 때가 있었지.’
그는 하현을 보며 새삼 과거를 떠올렸다.
하루라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고, 나날이 발전하는 자신에게서 엄청난 재미를 느끼던 자신을.
그리고 왜인지 그도 덩달아 열정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남궁무룡이 떠나고, 연무장에 홀로 남은 하현은 조금 전보다 더 자세하게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우선 이전처럼 졸졸 흐르던 기운이 이제는 과장을 조금 보태어 콸콸 흐르고 있었다.
내공이 충분해지고, 길이 넓어지며 하현이 생각한 것은 하나였다.
‘팔방풍우.’
그는 항상 내공이 다해 뜻하는 대로 펼치지 못하는 삼재검법의 마지막 초식인 팔방풍우를 떠올렸다.
혹자는 기초 중의 기초인 삼재검법을 언제까지 수련할 것이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현의 생각은 확고했다.
청룡관에서도 배웠듯, 무공을 익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삼재검법은 그 기본의 극을 달리는 검법이다.
세상 어떤 상승의 검법이라고 할지라도, 검을 베고, 치고, 찌르는 세 동작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연무장 한가운데에 선 하현은 검을 치켜올렸다.
작다면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결코 작지 않았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영약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하현은 그저 팔방풍우만 떠올린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구체적인 한 가지를 떠올렸다.
바로 남궁민이 펼쳐낸 팔방풍우였다.
그저 평범한 삼재검법이었건만, 그 팔방풍우는 지금껏 하현이 본 모든 무공 중 가장 화려하고 뛰어난 무공이었다.
스윽- 휘익-!
하현의 검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 검로는 남궁민의 검과 정확히 일치했다.
후우웅-!
검이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일었다.
그저 바람이 아닌 저번에 느꼈던 폭풍이었다.
화악!
그리고 검이 여덟 방위로 쏘아져 나가는 절정의 순간, 하현은 있는 힘껏 내공을 분출했고,
휘이이이익-!
모두가 무시하는 팔방풍우가 폭풍이 되어 하현의 손에서 펼쳐졌다.
여기까지가 남궁민이 하현에게 보여주었던 삼재검법.
남궁민은 여기서 검과 기운을 갈무리했었다.
하지만 하현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펼쳐진 기운을 갈무리하기 아깝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회전하기 시작했다.
“큽······!”
순식간에 지금까지 빠져나가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내공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현은 이를 악물고 그 회전에 더욱 힘을 박차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릭-!
곧 하현의 몸은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검에 담겨 있는 기운은 마치 걸리는 무엇이든 양단 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렇게 열 바퀴를 더 돌았을 때.
탁-
천천히 하현의 몸이 회전을 멈추었고, 하현은 연무장 위에 고고하게 섰다.
몸은 기운이 다 빠져버려 비틀거렸지만.
“헤헤.”
하현은 웃음이 났다.
조금 전 자신이 한 것이야말로 무공다운 무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힘은 없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충족감을 주는 듯했다.
“이건 폭풍검이라고 하자.”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이름 말고는 어떤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후, 하현은 남은 힘을 쥐어짜 연무장을 정리하곤 숙소로 돌아왔다.
굉장히 피곤했던 덕분인지 하현은 운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금방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내일 할아버지께 폭풍검을 꼭 보여드리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