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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25화 (25/304)

25화

“뭐라고···?”

팽헌홍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련에서 패배했을 때도 웃어버렸던 그다.

하지만 조금 전 하현의 말은 웃어넘길 수 없었다.

“솔직히 의문이 듭니다. 왜 익숙하시지도 않은 검을 익히려고 하시는지.”

순간 팽헌홍은 가문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사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형들 사이에서 치였던 일들을.

‘하현이 내 사정을 알고서 말한 건 아닐 테고.’

팽헌홍은 하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를 조롱하거나 놀리려는 표정은 절대 아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팽형.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는지 하현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해 왔다.

“아니다. 무례는 무슨.”

팽헌홍도 그냥 씨익 웃어주었다.

하현이 무슨 악의가 있어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진심으로 그를 생각 해서 말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도(刀)라······.’

팽헌홍은 남궁세가에 오고 나서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 * *

그날 저녁.

팽헌홍은 자신의 숙소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놓았던 것을 찾아 꺼내놓았다.

“아버지······.”

그것은 한 자루의 도였다.

아버지 도제 팽길산에게 그가 남궁세가로 떠나온 날 받은 도.

도신에는 멋들어진 글자로 벽력도(霹靂刀)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언뜻 보더라도 매우 귀한 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보도였다.

하지만, 팽헌홍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늦둥이 아들이었으나, 팽가에서의 생활은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팽헌홍의 눈이 어둠 속으로 침잠해갔다.

‘재능 좀 있다고 기고만장하지 말아라.’

‘네가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가주가 될 수 있을성싶으냐.’

그의 형제들은 나이 어린 그를 시기했다.

팽헌홍과 형들의 나이 차는 거의 부모 자식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와 가장 가까운 셋째 형과도 스무 살 터울이고, 첫째 형과는 스물다섯 살 터울이었으니까.

‘보통은 나이 차가 많이 나면 사랑받는다던데······.’

하지만 호전적이고, 실전적이며 패도 적인 분위기의 하북팽가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다.

자칫하면 아들뻘의 동생에게 가주 자리를 빼앗길지도 몰랐기에 그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진 뒤부터는 항상 견제받으며 살았다.

물론 그 무한경쟁의 분위기가 하북팽가를 지금 오대세가의 위치까지 올려놓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최소한 팽헌홍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직선적인 성격이고,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한눈에 보기에도 빼어난 자질을 보이는 팽헌홍에게 영약을 하나라도 더 구해주었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 했다.

물론 그럴수록 형들은 그를 더 핍박했지만.

“후우······.”

팽헌홍은 깊은숨을 내쉬며 그를 괴롭히는 심마를 겨우 억눌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잊고 있던 하북팽가를 떠오르게 한 장본인인 하현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곳 남궁세가의 직계들도 함께.

‘이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현은 이곳에서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밝혀질수록, 또 그가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그런 일을 겪을수록, 같은 중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림세가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곳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그의 아버지가 왜 남궁세가에서 힘을 기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큰 성취를 이루면, 자신보다 앞질러 나갔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격려해준다.

그리고 그를 따라잡기 위해, 뛰어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련한다.

팽헌홍은 이것이 남궁세가가 무림제일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드륵-

한참을 잠자리에 들지 못한 팽헌홍은 결국 문을 열고 방을 나와버렸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기에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연무장으로 향했다.

지난 몇 개월간 지겹도록 갔었던 수련생용 연무장이 아닌, 오늘부터 출입을 허락받은 정식 대원용 연무장.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었기에,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팽헌홍은 그 한가운데에서 방에서 들고 온 벽력도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의 도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휘익-

팽헌홍은 남궁세가에 온 뒤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도법을 펼쳤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예기가 예사롭지 않은 도가 허공을 가르자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인다.

우뚝-

한참 도법을 펼치던 팽헌홍은 초식을 펼치다 부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그리고는 벽력도를 억울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어째서 이 무공을 나에게······.”

혼원벽력도는 미완의 무공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전에는 완벽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곳곳이 실전된 무공.

그렇기에 팽헌홍은 온전히 익힐 수 없었다.

팽길산에게 도제(刀帝)라는 별호를 안겨준 성명 절기는 혼원벽력도가 아닌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였다.

아버지는 형들에게는 그 오호단문도를 가르쳐 주었다.

끼이익-

팽헌홍은 연무장 문이 열리며 하던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연무장에 찾아왔기 때문에.

“팽 형.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하현?”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을 줄 어찌 알고?”

하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보통 저랑 이야기를 나누고선 그런 표정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밤에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하시더군요.”

얼핏 들으면 참으로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팽헌홍은 그만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상대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멋진 도입니다.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봐도 좋다.”

“우와······.”

하현은 팽헌홍의 도를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아이인데.’

팽헌홍은 무기를 들었을 때와 안 들었을 때 하현의 격차가 상당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도를 가지고 있으시면서 한 번도 들고 다니시지 않으셨습니까?”

“검법을 배우러 왔는데, 도를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도로 검법을 배우면 안 되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검법은 양날을 다 쓰는 초식이 있기 때문이지 않으냐. 그리고 검봉을 이용한 초식도 많다. 그에 비교해 도는 찌를 수도 없고, 양날을 다 사용할 수도 없지.”

“그렇다면, 일부 초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초식이 무의 정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팽헌홍은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하현같이 총명한 아이가 분명 그 차이를 모르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않은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검은 도보다 예리함을 더욱 중요시한다. 특히나 검 끝에까지 진기가 전달되게 하여 예리함을 극대화하지.”

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는요?”

“검술이 검에 진기를 싣는다면, 도는 검과 더불어 힘에 크게 의존한다. 그래서 진기를 몸에 많이 할애하지. 무기에 싣는 진기는 예리함을 더해준다기보다는 힘으로 베었을 때 큰 피해를 주도록 투박하게······.”

팽헌홍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무언가 잡힐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현이 그 틈을 타 싱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러면, 지금 팽형은 어떻게 하고 있으시죠?”

“아······!”

그는 나직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수련하실 때는, 이를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맞다, 그렇지만, 대련할 때는 전혀 아니었군.”

“네.”

내력을 병기 전체에 감싸는 진기 운용은 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튼튼하고 부러질 염려가 없는 도에 어울리는 방식이다.

“나는 아직도 도를 버리지 못했군.”

“꼭 도를 버리셔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무리 봐도 팽 형은 도와 잘 어울리시는데 말입니다.”

팽헌홍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나는 세가에서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는 무인이다. 그러니 도는 내려놓아야지.”

“쫓겨나요?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군요.”

“달라?”

“제가 듣기로 팽 형은 남궁세가에 유학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유학이란, 언젠가는 돌아간다는 것을 가정하는 말 아닙니까?”

“그건, 아버지가 나를 쫓아내신 명분이다.”

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분께서, 이렇게 좋은 도를 하사 하셨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총애하는 막내아들에 대한 마지막 정은 아니겠느냐?”

“그보다는···. 보호하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요?”

“보호?”

팽헌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못 되지만···. 세상 어느 곳이든 여기 남궁세가 같지 않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하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삼 본 하현의 눈은 단순히 어린아이의 그것이 절대 아니었다.

세상을 통달한 고승의 눈이었다.

‘마치 인생을 두 번 살기라도 한 것 같군.’

그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여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무림에서 한 분야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으실 정도의 분이시라면, 팽 형을 여기로 보내신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이유라······.”

그는 아주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그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르겠더군. 아버지께서 왜 나를 보내셨을까. 단순히 내가 검술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 단순히 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의 아버지 도제는 그렇게 무른 사람이 아니었기에.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긴 하다.”

“무슨 생각입니까?”

“진정 나를 형들로부터 보호하고 싶으셨다면···. 혹시 이런 건 아닐까? 형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명맥이 끊긴 무공을 완성하고 돌아오라는.”

팽헌홍은 벽력도를 치켜들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자고 생각했다.

“한 번 보겠느냐?”

“네.”

팽헌홍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혼원벽력도를 펼치기 시작했다.

시퍼런 달빛이 검에 반사되며 허공에 빛을 뿌렸다.

후웅- 후웅-

역시 도법은 검법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더 직선적이고, 패도적이다.

장애물이 있더라도 장애물까지 함께 베어 넘기겠다는 의지가 출수마다 느껴지는 듯했다.

‘아, 도법은 이렇게 다르구나.’

하현은 팽헌홍의 동작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기듯 지켜보았다.

팽헌홍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하현 앞에서 이렇게 초식과 진기 운용을 천천히, 그리고 상세히 하는 것은 하현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우뚝-

어느 시점.

팽헌홍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럽게 초식을 멈추었다.

“아······.”

그 모습에 하현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여기까지다. 내가 도중에 멈춘 게 아니라, 내가 전수 받은 것이 이게 전부지.”

“그렇군요.”

하현의 두 눈이 빛났다.

굉장한 흥밋거리를 찾은듯한 눈이었다.

“무언가, 보인 게 있느냐?”

팽헌홍은 별 기대는 하지 않으며 하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현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

하현은 한참 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팽헌홍은 그런 하현을 잠자코 기다렸다.

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하현이 스르륵 눈을 떴다.

“솔직히 도제님께서 어떤 생각이셨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무엇이지?”

“팽 형의 도법을 보는데, 저는 왜인지···. 검법이 떠올랐습니다.”

“검법? 그게 무슨 말이냐?”

스르릉-

팽헌홍의 질문에, 하현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대련용 목검이 아닌, 그가 애지중지하는 진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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