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청룡각 대원들의 주된 업무는 수련생들과 마찬가지로 수련이다.
세가의 대소사나, 무림의 일에 투입되기 위해서 하는 수련.
당연히 수련생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실전적인 훈련들도 많다.
“현아. 드디어 오늘이야. 너는 긴장 안 돼?”
“왜? 누나는 긴장돼?”
“아니, 어떻게 되어 먹은 애가 이렇게 무신경할 수가 있지. 정식으로 강호출도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이게 첫 임무잖아?”
피나는 노력으로 어느새 정식대원으로 승급한 남궁소화가 덤덤한 표정의 하현에게 물었다.
약 일 년 전.
하현이 처음 남궁세가에 왔을 때만 해도 완전히 앳되어 보였던 소화의 키는 훌쩍 커서 하현보다도 더 컸다.
“첫 임무긴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안 시킬 거 아니야.”
“그야 그렇지.”
“그래서 긴장 안 돼.”
“으이구. 그래 너 잘났다.”
청룡각 정예대원들이 주로 하는 일 중의 하나는 남궁휘연이 맡은 ‘청룡표국’의 표행을 하는 것이다.
무림에서는 수많은 표국들 보다 남궁세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청룡표국을 더욱 높게 쳐준다.
그들이 그렇게 신용을 보내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은 보통의 표사가 아닌 청룡각의 정예대원들이 표행을 나서준다는 것이다.
보통 상승의 무공을 익힌 무인들은 표사를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부분 표국의 표사들은 어중간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표행을 나서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세가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기에 자처해서 나가는 경우도 많을 정도였다.
“오늘 누구랑 같이 가게 될까?”
“그러게. 나 사실 정예대원분들은 많이 보지도 못한 거 같아. 누나는 많이 봤어?”
“아니, 나도 많이는 못 봤어. 그분들은 세가에 잘 있질 않으니까 볼 일이 없잖아.”
남궁세가에서는 청룡각 대원들이 실전 경험을 쌓고, 또 조금씩 세상에 대한 식견을 넓혀주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정예대원들의 뒤를 따르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소화와 하현의 차례였다.
“임무는 무슨 임무를 맡게 될까. 가다가 혹시 녹림채 산적들이라도 만나면 어떡하지?”
“그럴 때를 위해서 수련한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직 사람이랑 싸워본 적도 없고…….”
하현은 소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평소에도 소화가 말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특히 심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불안함을 말하는 것으로 풀려는 것으로 보였다.
“오래 기다렸니?”
그때 하현을 구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오라버니!”
“형님!”
“그래. 오늘은 나와 함께 가게 되었어.”
그 목소리의 근원지는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는 남궁민이었다.
남궁민은 항상 입고 다니는 백색의 단출한 의복 대신에, 남궁세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녹색 의복을 단단히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오라버니가 나오는 거였으면 미리 귀띔을 주면 안 되는 거였어? 오라버니일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하하. 소화야 미안해. 나도 갑자기 정해져서 말해줄 틈이 없었어.”
남궁민은 토라진 소화를 달래주며 하현에게 말했다.
“현아. 그새 또 성장했구나.”
“형님도, 그전보다도 더욱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도무지 따라갈 틈이 보이질 않는군요.”
“누가 무섭도록 따라와서 말이야. 나도 달리지 않으면 뒤가 서늘해.”
남궁민은 하현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하현은 뭔가 그 웃음에 순수하지 못한 무언가가 담겨있다는 생각이 순간 스쳐갔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 그래서 오늘 어디로 가는 거야? 임무는 뭐야?”
“하하. 소화야. 천천히 설명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릴래?”
남궁민은 작은 목함 하나를 들고 하현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그렇게 별다를 건 없는 일이야. 이 목함을 바로 옆 정덕현에 보내면 되는 일이거든.”
“에이. 정덕현이면 여기서 겨우 오백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잖아.”
“그럼 너희를 데리고 가는 임무인데, 얼마나 멀리 갈 줄 알았어?”
남궁소화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가도 남궁민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그런 표정을 풀었다.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이지만, 우리는 이틀 안에 갈 거니까 절대 얕보면 안 돼.”
“얕본 적 없다 뭐.”
소화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고, 남궁민은 그런 소화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하현을 보니, 오히려 하현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누가 보면 하현이 더 오빠로 보겠네.’
항상 발랄한 소화와 애늙은이 같은 하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곧잘 붙어 다녔다.
아무래도 세가에 비슷한 또래가 둘 뿐인 것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직도 출발 안 한 게냐.”
“조부님!”
그때 들려오는 남궁무룡의 목소리에, 무덤덤한 표정의 하현이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우리 임무 간다고 여기까지 나오신 거예요?”
“그래. 소화야. 우리 손주들이 다 같이 간다는데 내가 안 나와볼 수 없지. 환이가 처음 임무에 나섰을 때도 내가 나와봤단다.”
남궁무룡은 뿌듯한 얼굴로 그의 손주들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남궁민이 이토록 성장하여 정예 대원의 자격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임무에 나서는 것, 또 소화와 하현도 첫 임무에 나가는 걸 보니 대견한 마음이 일었다.
“노자는 충분히 챙겼고?”
“네.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챙겼습니다.”
“그래. 아이들과 같이 가는 것이니 꼭 임무라고만 생각지 말고 좋은 추억 쌓고 오거라.”
“네. 감사합니다. 조부님.”
남궁무룡은 이번에는 하현과 소화를 앞에 불러다 세우고 말했다.
“소화야. 현아. 임무에 대해서는 교육 잘 들었지?”
“네. 열심히 들었어요.”
“다, 외웠습니다.”
“도중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현이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칠게요.”
“맞다. 간혹 뒤를 보이고 도망치는 것은 무인의 수치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생사를 넘어본 경험이 없는 겉멋에 취한 사람들이다. 죽음 앞에서는 체면이고 수치고 없는 게야.”
“잘 알겠습니다. 표물은 버리더라도 목숨은 챙기라는 말씀이시죠?”
“그렇다.”
남궁무룡은 하현을 보고 싱긋 웃었다.
표물은 포기하더라도 목숨은 챙겨라.
남궁무룡이 청룡표국에 내세운 첫 번째 원칙이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임무를 완수하라는 다른 표국과는 사뭇 다른 원칙이지만, 이는 남궁무룡이 평소 식솔들을 얼마나 살뜰히 생각하는 바가 여실히 드러나는 원칙이었다.
잃어버린 표물은 돈으로 보상할 수 있지만, 죽어버린 인재는 억만금을 준다 해도 되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다녀오거라. 민아, 동생들을 부탁한다.”
“염려치 마십시오. 조부님.”
남궁민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궁무룡은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운 그의 어깨를 토닥 쳐주었다.
“할아버지 다녀올게요!”
“조부님. 다녀오겠습니다.”
남궁민이 먼저 출발하고, 소화와 하현도 남궁무룡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경쾌한 발놀림으로 남궁민을 따라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궁무룡은 어딘가 가슴 한편이 벅차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미래.’
그들의 뒷모습에서 남궁세가의 미래가 엿보이는듯했다.
* * *
남궁민과 소화, 그리고 하현은 출발하고 한 시진 동안은 길을 따라 내내 걷기만 했다.
임무란 생각보다 고되고 심심한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길, 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하지만 하현과 소화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쾌하게 걸었다.
청룡각에 입관한 후에 마을 밖은커녕 세가 밖도 많이 나가지 않던 둘이었기에 이렇게 밖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로도 기분전환에는 충분했다.
“이제 여기부터는 산길이야. 힘들면 잠깐 쉬어갈까?”
“나 안 힘든데!”
“저도요.”
남궁민은 아직도 활기 넘치는 둘을 보며 미소 지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건만, 소화와 하현은 어떻게 이렇게나 성격이 다를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하현도 그런 힘든 일을 겪었건만, 언제나 밝은 얼굴이었기에 더욱 귀여웠다.
“그럼 쉬지 않고 갈 거야. 속도를 조금 더 높여볼까?”
“응!”
“예!”
남궁민은 이번에는 다리에 아주 조금의 내공을 흘려보내며 달려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소화와 하현이 따랐다.
* * *
‘산길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게 보이는구나.’
하현은 오랜만에 지나가는 산길을 보며 1년 전을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 하현은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의식적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절박한 심정이었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던 열 살 꼬마 아이가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고, 부모님마저 살해당했다. 그것도 친삼촌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자에게.
하지만 1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하현도 스스로가 무공에 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당연히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그때 지금만큼만 강했더라면, 적어도 어머니의 목숨만큼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하현은 똑똑하기도 하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하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까지 무공에 열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아! 뭐해. 빨리 안 와?!”
“혹시 힘드냐?”
“아, 아니에요. 갑니다.”
게다가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일 년 전 혼자서 맹수들과 마주칠까 두려워 나무 위에서 잠을 자던 하현에게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가족이 생겼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과거를 생각하던 하현은 이내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둘을 따라갔다.
휘익- 휘익-
셋은 본격적으로 경공을 펼치며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달리니 상쾌하다.’
배경을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자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진짜 상쾌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렇게나 달려도 내공이 충분하다니.’
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게다가 자소단까지 흡수한 하현은 이제 이전처럼 걸핏하면 내공이 고갈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하현은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다.
‘취월걸개 어르신은 분명 달리면서 내뿜은 내공을 다시 회수하라고 하셨었지.’
자신도 사부라며 열심히 우기더니 결국 무림맹으로 돌아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취월걸개가 가르쳐준 경공과 달리는 방법.
처음 배울 때는 그저 따라 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내공이 무엇인지, 또 신법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깨달은 지금은 그 원리를 알 것 같았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 용천혈에 진기를 집중하여 폭발적인 힘을 만들라고 하셨지.’
하지만 취월걸개는 애석하게도 좋은 스승은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던 다음 단계를 하현에게 일러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현은 그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폭발이라고 해서 꼭 분출할 필요는 없는 거야.’
발바닥에서 폭발한 진기를, 도리어 폭발의 힘으로 다시 위로 끌어 올린다.
그 여파로 진기가 족삼리 부근까지 올라왔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발을 다시 땅에 디딜 때, 회수에 성공한 진기에 하현의 단전에서 나온 진기를 합쳐 다시 발바닥에서 폭발시킨다.
회수하고, 폭발하고, 또 회수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일종의 무한동력(無限動力)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현은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퍼엉’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발바닥에서 진기가 폭발한다는 생각이 실현된 것 같은 느낌.
‘된다. 이거다!’
하현은 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자신이 뜻하는 대로 몸과 기가 움직이는 것.
지금의 하현에게는 그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었다.
“자자. 이제 조금 쉬어가자꾸나.”
하현이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경공을 펼치고 있을 때, 남궁민이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화를 바라보니, 소화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정식대원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하현에게 지기 싫어 하현을 죽자 사자 따라온 결과였다.
“오라버니. 나 너무 힘들어. 원래 이렇게까지 달리는 거야? 내가 생각한 거랑 아주 다른데?”
“하하. 소화는 뭘 생각했는데?”
“그야…….”
“뻔하지. 강호를 주유하고, 자연을 즐기고. 뭐 그런 거 아니야?”
“야! 하현이 너! 에효.”
남궁소화는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하현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운도 없는지 그냥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현은 소화가 소리를 지르자 움찔했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씨익 웃고는 말했다.
“주변에 어디 물 흐르는 곳이 있나 찾아보고 올게요. 형님.”
“그래 주면 고맙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곧장 도망 오너라.”
“네. 형님.”
하현은 남궁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산속으로 총총 사라졌다.
그리고 남궁민은 그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그의 시선은 하현의 발에 집중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