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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33화 (33/304)

33화

“…….”

남궁민이 쉬이 대답을 못 하고 있자, 하현이 추가해서 질문했다.

“생명은 귀중한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궁민은 단번에 깨달았다.

‘아, 아까 정말로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하현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동요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까의 사건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하현은 피비린내, 시체, 그리고 전투 앞에서 어떤 동요도 없었다.

다만 하현의 동요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아 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었다.

“귀중하냐, 아니냐를 묻는다면 당연히 귀중한 거 아닐까?”

“그렇죠?”

“그건 왜?”

“사실 형님께 사과드릴 게 있습니다. 아까 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셨던 질문···. 일부러 모르는 척했습니다.”

남궁민은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긴, 흑의인의 입에 주먹을 꽂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현처럼 총명한 아이가 남궁민의 질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다.

다만 하현은 스스로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현은 조금은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정말로 괜찮았거든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현아…….”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어떨지를 생각해보니···.”

하현이 말 끝을 흐렸다.

남궁민은 하현이 다시 말하기를 한참 기다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대인과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대인은 시체를 보고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고, 벌벌 떨기도 했다.

장사로 잔뼈가 굵어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노인도 그런 반응을 내보인다.

어찌 보면 그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저도 당연히 생명이 중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아까 저는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도, 또 처음으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고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진중한 태도로 하현의 이야기를 경청한 남궁민이 씨익 웃으며 하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까와 같은 의심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하현의 모습을 보며 안도하는 것 같은 모습이기까지 했다.

“네 얘기를 들어보니 알겠어.”

“무엇을요?”

“너는 이미 무림인이라는 것을.”

“네?”

남궁민은 하현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과거를 회상했다.

“내가 열다섯 때, 처음으로 생사결을 치렀고, 상대를 죽였다. 작은 사파문의 문주였지.”

그 태도가 사뭇 진지했기에 하현은 잠자코 남궁민의 말을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가끔 그때의 꿈을 꿔. 검이 살을 뚫고 들어가던 감촉, 마지막 단말마, 생명이 꺼져가는 눈빛.”

남궁민은 그때를 상기했는지 눈빛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본래의 안광을 되찾고는 하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무나도 괴로웠지. 눈만 감으면 그자의 눈이 떠오르고, 검을 잡기만 하면 그의 살을 가르던 감촉이 되살아났으니까.”

남궁민은 옛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때 무공을 배우며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청했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거든.”

남궁민의 말에 하현이는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한 마디만 해 주셨어.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어요?”

하현은 잠시 남궁기현을 떠올렸다.

그의 커다란 몸과 호탕한 목소리도 같이.

남궁민은 짐짓 그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

“민아. 이걸 명심해라. 무림이란, 복수할 줄 아는 짐승들이 사는 야생이다.”

“아···.”

하현은 부연 설명 없이도 그때의 남궁기현이, 그리고 지금의 남궁민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처음 신가장에서 도망쳐 남궁세가로 향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현이 지독한 배고픔을 겪을 때, 그는 산속 짐승들을 사냥해 잡아먹었다.

짐승을 쫓고, 죽이고, 먹고.

그 굴레 안에서 하현은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었다.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너도 모르는 새에 이미 이해하고 있던 게 아닐까? 아무래도 너는 큰일을 겪기도 했으니 말이야.”

남궁민이 하현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하현은 마치 그 웃음이 넌 아무 이상이 없다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네요…….”

하현은 이제야 웃을 수 있었다.

남궁기현의, 남궁민의 말대로 그는 무림이라는 거대한 자연에 사는 한 마리의 맹수일 뿐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비슷한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그에게 위해를 끼치려는 자는 가차 없이 물어뜯으라고.

그래서 하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사는 세상. 즉 무림이 돌아가는 생리를.

오늘 하현은 이미 자신이 무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세상에서 살리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다.

* * *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를 깨웠어야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소화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하현을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아니, 누나…. 깨웠다니까?”

“더 흔들어서 제대로 깨웠어야지! 아이참. 이 손 좀 봐. 흉지겠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무림인한테 흉터는 훈장이라잖아.”

“또, 또 그런 소리 할래? 너는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혼자 그렇게 위험하게 해!”

“혼자는 아니고, 민이 형님이랑…. 아냐. 미안. 내가 잘못했어.”

하현이 잘못을 시인하자 소화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남궁민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웃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알았어?”

“알겠어 누나…….”

한참 소화의 설교가 끝나고, 하현은 어제 흑의인들과 싸울 때보다 더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남궁민이 그래도 자신이 소화보다 나이가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 무림맹에서는 세 명의 무인이 정대인의 장원에 도착했다.

두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한 명은 하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취월걸개 어르신!”

“귀청 떨어지겠다. 얼마 만에 봤다고 이렇게 소란이야?”

“그래도 몇 달은 되었잖아요!”

“그리고, 스승님이라고 불러야지 어르신이 뭐야. 어르신이!”

하현이와 취월걸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마자 티격태격했다.

“소화도 여기 있구나. 다 같이 나들이라도 나온 게야?”

“할아버지! 나들이가 아니고, 임무에요!”

“벌써 소화가 임무에 나설 나이가 되었어? 내가 죽을 때가 다 되긴 했구만.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어.”

“제가 뭐 언제까지 어린 애 일줄 아신 거예요?”

소화가 자신 있게 허리춤에 찬 검집을 내보이며 말했다.

“지난밤에 누나가 한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야! 하현!”

소화가 하현을 쫓아가려 할 때, 그 모습을 보던 남궁민이 취월걸개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현과 소화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취월걸개는 남궁민에게 속내를 들킨 것이 민망했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큼큼.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자초지종은 전해 들었다. 장한 일을 했더구나. 그래서, 흉수가 어디인지는 파악한 바 있고?”

“아직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의심이 가는 것은 있지만…….”

“마교냐?”

“그렇습니다.”

취월걸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너도 잘 알겠지만, 계속해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취월걸개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했다.

“누가 봐도 대놓고 마교라고 하고 다니는 것 같은 게 말이다. 너도 알겠지만, 마교 놈들은 음흉해서 이렇게 대놓고 활동하는 것들이 아니잖냐?”

남궁민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지금껏 남궁민이 겪어온 마교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근데, 나는 무림맹에 이번 일을 마교가 수면 위에서 움직이는 증거라고 주정할 것이다. 이번 일이 마교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는 증거라고 우기면, 각 문파의 고집불통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남궁민은 그런 취월걸개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야 조사에 더욱 진척이 있겠군요.”

“맞다. 마교가 맞든, 아니든, 무림에 위해를 가하는 것들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 망할 노친네들은 마교의 일이 아니면 통 움직이려 하질 않아서 말이야.”

취월걸개는 자신이 말하다가 심통이 났는지 씩씩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궁민은 그런 취월걸개를 달래주었다.

“그게 모두 우리 정파가 무림에 과도한 통제를 하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알고 있다만, 융통성이 있어야지. 융통성이!”

“하하. 고정하세요. 어르신. 저도 세가로 돌아가 가주님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유지들이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았나 조사해봐야 할 것입니다.”

취월걸개가 같이 온 두 명의 무림맹 무사를 슥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여기 소식을 듣자마자 알아보도록 조치해놨다. 어제 소식을 듣고, 맹에서 일곱이서 출발했지. 나머지 넷은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어.”

“역시 어르신입니다.”

취월걸개는 남궁민 뒤에 기립해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하현을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

“꼬맹이 너는 기세가 크게 달라졌구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한테도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뒤에 있던 소화도 쪼르르 취월걸개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요?”

“우리 소화도 엄청나게 발전했구나. 역시 자질이 있어. 소화 개방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으악. 그건 싫어요!”

취월걸개는 질색팔색하는 소화를 보며 껄껄 웃고는 다시 남궁민을 돌아보았다.

“여기 정가는 합비로 거처를 옮긴다고?”

“네. 오늘 중에 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고시현에 있는 정가 놈이 들으면 깜짝 놀라겠구먼.”

하현은 고시현에서 하현에게 화섭자 가격을 사기 치려다 취월걸개에게 들키고, 나중에는 지게와 육포까지 내주었던 잡화점 주인을 떠올렸다.

“혹시 그 잡화점 할아버지 말씀하신 거예요?”

“옳지. 현이 너는 봤겠구나. 그놈이 여기 정가 동생이다. 동생이랑 친한 덕분에 여기 정가랑도 친해졌지.”

하현은 새삼 무림이라는 곳이 좁다고 느꼈다.

취월걸개는 잠시 앉아서 쉴 새도 없이 아직도 혼절해 있는 마교인을 지게에 지고 자리에 일어섰다.

“자. 쉬었으니 이제 다시 출발해야겠구나. 이놈을 맹으로 데려가서 알아낸 정보는 내가 남궁세가로 직접 전하러 갈 것이니, 너희 할애비한테 기다리라고 전해라. 다른 놈 시키는 것 보다, 내가 달려가는 게 낫지.”

“네. 어르신. 곧 뵙겠습니다. 수고 해주십시오.”

“흥. 뭐 수고는 내가 하나? 나는 옮겨주기만 하면 무림맹에 고문 기술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취월걸개는 남궁민의 뒤에 서있는 하현이와 소화를 보며 인상을 폈다.

“어찌 됐든 간다. 현아. 소화야. 다음에 보자꾸나.”

“네. 할아버지.”

“네. 스승님.”

취월걸개는 스승 소리가 그리도 좋은지 흐흐 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곧바로 무사들을 데리고 출발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현아. 소화야. 그러면 우리도 돌아가자.”

“네. 그런데 형님 조금 안 쉬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난 괜찮은데, 너랑 소화가 힘든 게 문제지. 너도 어제 한숨도 안 잤잖아?”

하현이 크게 고개를 저었다.

“휴식은 집에 가서 하면 되니까요. 지금은 왠지….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요. 그리고 이번에는 표물도 없잖아요. 올 때보다 훨씬 가벼우니까요.”

“나도 돌아갈 때는 절대 뒤처지지 않겠어. 이번에는 나 봐주지 마!”

소화가 당차게 말했다.

사실 그녀도 남궁민과 하현이 그녀를 위해 적당히 속도를 늦춰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민은 맑게 웃었다.

동생들의 착한 심성이 그를 웃음 짓게 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자.”

“네. 형님.”

“응 오라버니!”

정 대인에게 간단하게 인사한 셋은 신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현은 드디어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다 문득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남궁민에게 자연스럽게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도 떠올렸다.

어느덧 그에게 집이란 신가장이 아니라 남궁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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