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표행에서 돌아오는 길.
겨우 사흘간의 짧은 임무였건만, 하현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도 남궁민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형님이 강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
남궁민이 또래보다…. 아니,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남궁세가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가 된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였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나 하기 힘든 것.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기본을 충실히 하는 것.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 땐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서 행동한다.’
하현은 이것이 말은 쉬워도, 막상 해보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임무에서 많은 것을 느낀 것은 비단 하현뿐만이 아니었다.
소화 역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느꼈다.
특히나 이번에 가장 확실히 알게 된 것은…….
‘현이와 너무 큰 격차가 보여. 따라잡아야 해.’
평상시에도 거의 매일 함께 수련하면서 보기는 했지만, 그동안은 당연하게만 여겼던 하현과의 실력 차이를 직접 피부로 겪어보니 소화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말로만 민 오라버니를 뛰어넘겠다느니, 나중에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어보겠다니 했던 말들이 괜스레 부끄럽게 느껴졌다.
‘난 어린애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어.’
소화는 이제야 무공에 진지하게 임할 마음을 먹었다.
훗날 ‘여제’라고 불리는 무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하현 일행은 정덕현으로 갈 때와는 다르게 남궁세가로 돌아가는 길은 모두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다.
하현은 하현대로, 소화는 소화대로 생각이 많았기 때문인데 남궁민은 그런 둘의 상태를 알아보고 그들을 배려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걷는 속도가 결코 느렸던 것은 아니다.
올 때보다는 확실히 조금 더 빠른 속도를 내고 있었다.
남궁소화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그 속도를 따라갔다.
몇 시진을 더 걷다 보니, 그들은 익숙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정덕현으로 향할 때 잠시 쉬어갔던 바로 그곳.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자연스럽게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하현이 전처럼 수통에 시원한 물을 떠 오고, 모두 목을 축였을 때쯤 소화가 입을 열었다.
“난 이제 괜찮아. 바로 출발하자.”
“소화야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리 아니야. 할 만하니까 가자고 하는 거야. 쉬어도 집에 가서 쉬려고.”
남궁소화의 표정은 결연했다.
“규현 스승님이 항상 그러시잖아. 힘들어야 수련이라고. 난 항상 힘들면 멈췄던 거 같아. 이젠 진짜 힘들어서 못 움직일 때까지는 해보려고.”
소화의 말에 남궁민과 하현은 잠시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소화가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었는지 모두 이해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 침묵을 깬 것은 하현이었다.
“맞아 누나. 이제야 조금 무인 티가 나는 거 같네.”
“뭐?”
소화가 발끈하며 일어나자 하현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며 쉬느라 잠시 풀어놓았던 짐들을 챙겨 들었다.
“멋지다고 하는 거야. 정말 멋져.”
“흐음…….”
하현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는지 소화가 가자미눈을 뜨고 하현을 바라보았으나, 하현은 애써 못 본 척하며 남궁민에게 말했다.
“형님. 여기서 남궁세가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이제 얼마 안 남았지. 두 시진 정도면 도착할 거야.”
“그러면 두 시진 동안은 속력을 조금 더 높여서 경공을 쓰면서 가보는 건 어떨까 싶어요.”
“좋다. 경공 수련도 할 겸, 집에도 빨리 갈 겸. 소화도 괜찮니?”
소화가 개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원래 내가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하현이가 내가 할 말을 또 뺏어 간 거야.”
“내가 뭘 뺏었다고 그래. 이게 이심전심이라는 거지. 안 그래?”
“으이구. 그렇다. 그래.”
하현의 너스레에 둘은 금방 웃음을 되찾았다.
남궁민은 그런 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구석이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처음 무공을 배울 때 내 또래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까?’
그는 지금까지 무공을 익혀오는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심적으로 서로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가 청룡각에 입관할 때만 하더라도 지금 하현이나 소화처럼 어린 수련생은 없었기도 하거니와, 그나마 나이가 비슷한 남궁환과도 터울이 꽤 있었으니까.
게다가 너무 빠른 성장으로 인해 청룡각 동기들은 물론, 정식 대원이 되고 나서도 마음을 나눈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인 남궁기현은 항상 임무와 무림맹의 일 때문에 남궁세가를 비우기 일쑤였다.
외로움.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남궁민은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하지만, 하현과 소화. 그리고 남궁환이 함께 생활하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이 외로웠다는 것을 새삼 깨닫곤 했다.
“형님. 안 가세요?”
“오라버니! 안 가? 내가 먼저 간다?”
멍하니 서 있던 남궁민에게 어느새 떠날 채비를 마친 하현과 소화가 그를 재촉했다.
남궁민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가자.”
이번 임무에서 하현과 소화만 무엇을 얻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남궁민은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하현이 등장하고, 굉장한 재능을 보이자 자신도 다시 무공에 대한 열정이 피어오른 것은 단순한 질투나 위기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세계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게 그의 동생이라는 것.
그것이 그를 수련에 불태우게 한 것이었다.
셋은 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렸다.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향해.
* * *
셋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남궁세가 근처까지 오는 것에 성공했다.
그래서 정덕현에 갈 때는 반나절이 꼬박 들었건만, 올 때는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
남궁세가의 장원 입구가 보일 때쯤 하현은 익숙한 인영에 잠시 멈칫했다.
“조부님께서 나와계시는구나. 아마도 소식을 들으신 것 같아.”
눈에 잠시 내공을 집중해 멀리까지 본 남궁민이 곧 눈부시게 웃으며 말했다.
남궁무룡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는데, 남궁민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엄하게만 보였던 할아버지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는지 몰랐었다.
정덕현에서의 일을 아침에 전해 듣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우리는 모두 괜찮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을 터인데.’
남궁민은 어느새 입이 귀에까지 걸려 우다다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는 하현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참, 매력이 넘치는 아이라니까.’
하현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법을 펼쳐 남궁무룡의 앞에 섰다.
“조부님! 어찌 여기까지 나와계십니까?”
남궁무룡은 하현이 신법을 전개하며 다가오자 곧바로 하현의 몸을 살피며 말했다.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으냐? 저런, 손에 상처가 났구나.”
“별거 아닙니다. 저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걸요. 민 형님께서 다 하셨죠.”
“그래. 민아.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제가 적절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리고 남궁민의 바로 옆에 있는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화에게도 말했다.
“소화야. 너도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구나. 정말 장하다.”
“저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하하. 이제 시작이다. 정말 잘했어.”
소화까지 칭찬을 마치고 나자 남궁무룡은 자신이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흠흠. 모두 얼른 들어오너라. 아침에 출발했다더니 지금 도착했으면 식사도 제대로 못 했지? 마침 밥때이니 식사나 같이하자꾸나.”
“네. 조부님.”
그 모습에 남궁민은 웃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최근 마교와 무림 정세의 일로 많이 힘들어 보이셨는데, 현이 덕분에 웃음을 찾으신 것 같다.’
남궁민은 남궁무룡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하현의 등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조부님. 그런데 걱정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취월걸개 어르신 말입니다.”
“취월걸개가 왜?”
하현이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생포한 자를 무림맹으로 호송한다고 들었는데, 무림맹에서 오신 분은 셋밖에 없으셔서요. 고작 세 분으로 충분할까요? 어르신이 못 미더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걱정이…….”
하현은 말끝을 흐렸다.
얼핏 들으면 하현이 취월걸개를 무시하는듯한 발언을 한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말한 것이다.
남궁무룡도 하현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하현의 머리에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현아. 취월걸개의 별호가 왜 취월걸개인지 아느냐.”
“제가 듣기로는, 술을 좋아하고 달을 좋아하셔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취월걸개는 대외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
“대외적으로라면···?”
남궁무룡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취하면 달까지 닿을 정도로 달리고, 또 달린다고 해서 붙여준 별호다. 취월걸개의 술버릇이 달리는 거거든.”
“그렇…. 군요.”
“하하. 그런데 정말로 달까지도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빠르단다. 그가 마음먹고 달리고자 하면 온 무림에 잡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고시현에서부터 남궁세가까지 그를 업고 온 취월걸개였다.
하현은 그때의 속도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들 간과하고 있는 게 있지.”
“무엇입니까?”
“취월걸개가 신법에 특화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허나…….”
남궁무룡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신법을 주로 익혔다는 것이지, 무력이 약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나와 필적할지도 모르지.”
남궁무룡은 확신에 찬 눈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절친한 친우에게 가지는 확신이 아닌, 오랜 시간 그를 곁에서 지켜보며 생겨난 신뢰였다.
* * *
세가에 돌아온 날 밤.
하현은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하현은 침상에 누워 뒤척이며 어제 정대인의 장원에서 보았던 남궁민과 흑의인의 신위를 떠올렸다.
‘정말 대단했어.’
말 그대로 엄청난 박력이었다.
생사결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했던 남궁민의 말처럼, 진짜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은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때 그 괴한이, 그리고 형님이 어떻게 하셨었더라? 에잇. 모르겠다.’
결국,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한 하현은 침상에 앉아 가부좌로 고쳐 앉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의 싸움을 떠올렸다.
하현의 눈에는 어제의 현장이 그대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섬전…….’
남궁민은 문자 그대로 섬전 그 자체였다.
‘섬전십삼검뢰 라고 했지.’
하현의 머릿속에서 남궁민의 무공이 펼쳐진다.
비록 한 초식밖에 보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남궁민의 일격은 하현에게 충분한 영감을 안겨주었다,
운기조식이 계속될수록 하현은 점점 무의식 속으로 침잠해갔다.
‘후우…….’
하현이 속으로 심호흡하자, 또 공간이 바뀐다.
끝없이 펼쳐지는 것만 같은 연무장.
그리고 그 연무장에는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하현이 만들어낸 얼굴 없는 가상의 무인.
처억-
무인은 어느샌가 검을 들고 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세는 지금까지 하현이 보고 배워온 모든 것을 흡수한 듯했다.
그리고 하현 역시 검을 들고 그와 대치하고 있었다.
씨익-
무인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처음에는 불분명하더니, 점점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로 바뀌어 간다.
어느새 얼굴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남궁민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꽈릉-!
남궁민의 얼굴을 한 무인은 섬전십삼검뢰를 하현에게 펼치며 번개 같은 속도로 다가왔다.
‘커헉!’
번개처럼 날아오는 검을 피할 재간이 없는 하현은 무인의 검에 심장을 꿰뚫리고 말았다.
일초지적.
상상 속이라 망정이지, 하현이 남궁민과 정말로 생사결을 펼쳤다면, 하현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하현은 다시 벌떡 일어나 남궁민의 검을 막을 준비를 한다.
조금 전 검에 꿰뚫리며 생긴 가슴의 구멍은 어느새 수복되어 있었다.
“와라!”
하현이 호기롭게 외치자.
무인은 지체 없이 하현에게 달려든다.
꽈릉-!
한 번 더 번개가 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같았다.
“크윽.”
어떠한 방어도, 반격도 하지 못한 하현은 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일어났다.
‘주변에서 하도 천재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내가 오만했었어.’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상승의 무공을 많이 보았다고는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펼치는 무공과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전력으로 펼치는 무공은 그 결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현은 이번 실전에서, 자신은 남궁민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네 나이였을 때보다 훨씬 성취가 뛰어나다는 말을 위안 삼으면 안 된다.’
남궁환도, 남궁민도. 심지어는 남궁무룡마저 하현에게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런 수준의 무공은 하현의 나이대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현은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생사결에서 나이가 어리다고 봐주는 적이 존재할까?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날아오는 검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니까.
‘결국, 내가 더 수련하는 그것밖에 답이 없다.’
하현은 내일부터 할아버지에게 더더욱 엄하게 가르쳐달라는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검을 바짝 추어올리고 소리쳤다.
“다시!”
꽈릉-!
그리고 보란 듯 또 한 번의 전뇌가 하현의 몸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