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하하. 정말 바보 같았다. 바보 같았어. 역시 내 감을 따랐어야 했어.”
그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괜히 발을 바닥에 쿵쿵 몇 번 찍고는 말을 이었다.
“네놈이 뭘 하려는지도 이제야 알겠구나. 네 목적을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그래. 민이가 생포한 놈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한 것이로군! 그놈을 맹으로 데려가면, 정가의 장원을 습격한 너희가 사실은 마교가 아니었다는 게 밝혀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취월걸개는 자신의 정보를 하나하나 맞추어 가는 것이 즐겁다는 듯 낄낄거리며 말했다.
어느새 강맹한 진기가 양손에 모여 웅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의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건만, 그의 눈에 살심이 설핏 어린다.
우웅-
황의인이 검에 진기를 모으는지 검이 작게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 그러도록 가만히 놔둘 취월걸개가 아니었다.
“어딜! 이것도 막아 보거라!”
취월걸개가 정면으로 뛰어들었고, 황의인은 미처 진기를 다 채우지 못한 검을 취월걸개에게 휘둘렀다.
“타아압!”
취월걸개가 터질듯한 경력을 담은 두 육장을 황의인에게 부딪혀갔다.
파아악!
황의인의 검은 취월걸개의 강대한 진기를 겨우 눈앞에서 멈추게 하는 것에 그쳤다.
취월걸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초식을 펼쳐냈다.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항룡유회(亢龍有悔)
‘계속 막아낸다면, 부숴버리면 된다.’
항룡유회는 항룡십팔장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무공이었다.
장을 앞으로 뻗는 것이 전부인 초식이라 단순하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지만, 취월걸개 정도의 경험과 전투 감각이라면 그 정도의 단점은 상쇄하고도 남는다.
단순하다는 뜻은 곧 초고수들에게는 명료하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니까.
타앗-!
황의인도 이번 공격은 막아내기가 쉽지 않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이번에는 공격을 막아내려 하지 않고, 보법을 전개해 횡으로 튕겨 나갔다.
씨익-
하지만, 취월걸개는 그것을 모습을 보고 도리어 미소 지었다.
퉁-!
그는 황의인이 이번에는 피할 것을 예상했고, 가볍게 발을 굴러 황의인이 피한 곳과 같은 방향으로 보법을 전개했다.
보법과 신법이라면 취월걸개는 무림 일절을 논할 수 있는 자였다.
황의인이 피하려는 속도보다 월등히 빠르게 취월걸개가 그를 덮쳤다.
빠악-!!
취월걸개의 진기가 가득 담긴 항룡십팔장이 황의인의 가슴에 적중했다.
‘제대로 들어갔다.’
황의인은 취월걸개의 장을 그대로 가슴으로 받아냈고, 삼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철퍽 널브러졌다.
취월걸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의인은 절명했는지 쓰러진 채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길었던 싸움에 비하면 다소 싱거운 결말.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던 취월걸개는 한참을 지켜보며 황의인이 절명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아이고. 힘들어라. 나도 슬슬 나이를 먹는가 보다.”
취월걸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진 황의인에게 다가갔다.
“살렸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러다간 내가 먼저 힘이 빠질 판이었으니 원. 이건 뭐 하는 놈이야?”
그리고 투덜대며 황의인의 몸을 뒤집어 복면을 벗겨내었다.
“흠……?”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취월걸개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이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본 적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인 탓에 쉬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취월걸개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에잇, 모르겠네. 정말 늙었나? 저놈의 시체라도 들고 가면 뭐가 생각나겠지.”
그는 황의인의 시신을 들쳐메고, 싸움이 있기 전 쓰러진 무림맹 무사에게 다가갔다.
“이봐. 살아있나?”
“장…. 장로님…….”
다행히 제때 점혈로 지혈을 해서 아직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그는 취월걸개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다행히 명이 길구만. 둘을 어떻게 다 데리고 간담?”
취월걸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림맹 무사를 여기에 놓고 먼저 가자니,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라 혹여 산짐승에게 해를 당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황의인의 시신을 놓고 가자니, 흉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아주 혹시나 시신을 놓고 갔다가, 이놈의 동료가 나중에 수습할 수도 있기도 하고 말이다.
“에휴. 망할. 노년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나도 저기 남궁 아무개처럼 손자들 재롱이나 볼 나이인데.”
취워걸개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결국, 방법은 그가 더 고생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쪽 어깨에 황의인의 시신을 들쳐메고, 가볍게 다른 어깨에 무림맹 무사를 얹었다.
“아, 아니. 장로님.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지금 상태로는 토깽이 새끼가 와도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구먼.”
“감,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다. 무림맹에 돌아가서 회복하면 술이나 사.”
“네! 장로님!”
양어깨에 사람 둘을 들쳐멘 취월걸개는 출발하기 직전, 문득 하현이 생각났다.
‘혹시 군소방파의 멸문도 이놈들의 소행인가?’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멸문한 방파에서 찾은 흔적들에서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마기를 감지해냈으니까.
이놈들은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마교를 사칭하고 다닌 것이 분명했다.
“하긴, 이상하긴 이상했어. 마교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렇게 대놓고 강도질을 한다고?”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그는 비로소 사건의 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무림맹까지는 얼마 안 남았긴 하지만…. 에잇! 이번 일 끝나면 나도 은거하든가 해야지!”
취월걸개는 또 한바탕 불평을 쏟아내고는, 다리를 툭툭 풀더니 신법을 전개에 앞으로 퉁겨지듯 나갔다.
두 사람을 메고 있건만, 바람을 보는 듯 실로 신속한 신법이었다.
* * *
하현이 정덕현에 다녀온 지 열흘은 더 훌쩍 흘렀다.
큰일이 있었건만, 아직도 하현의 일과는 매일 비슷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을 먹을 때까지 운기 하며 머릿속으로 생사결을 붙는다.
그리고 아침을 먹으면 할아버지에게 무공을 사사 받고.
오후에는 혼자서 느낀 점들을 몸으로 행하며 익힌다.
마지막으로 저녁에는 전각 앞 공터에서 형제들과 함께 수련한 후에 잠들기 전까지 또 운기조식을 하며 상상의 무인과 생사결을 치른다.
매일 쳇바퀴 돌 듯 비슷한 하루였지만, 하현은 그에 만족했다.
하룻밤을 자고 깨어날 때마다 조금이라도 발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즈음, 솔직히 말해 하현은 아주 조금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번에 생포한 괴한…. 혹시 마교인일까?’
민 형님께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고 했지만, 아주 혹시 모를 일이었다.
‘만약 정말 마교인이라면…. 무언가 알아낸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하현은 남궁무룡의 말과 가족들의 따뜻함 덕분인지 복수심 자체는 매우 옅어졌다.
가슴 한켠에 복수심을 숨겨놓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테지만, 이제는 복수심에 잡아먹히지는 않을 정도로 마음을 정리한 그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궁금증은 계속 커져만 갔다.
‘어째서 아버지가, 어머니가···. 우리 신가장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던 것이지?’
물론 하현이 그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그 의문은 하현의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뭔가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며칠만 더 있으면 취월걸개 어르신이 소식을 가지고 오시겠지.’
하현은 알아내는 게 있으면 직접 찾아오겠다고 한 취월걸개의 말을 상기하며 오늘도 수련에 몰두했다.
* * *
또 며칠이 흘렀다.
하현이 할아버지에게 한창 창궁무애 검법의 초식을 점검받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검존이자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무룡의 연무장에 허락도 없이 맘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온 무림에 단 한 명밖에 없다.
“허허. 이 늙은이는 혼자 쌔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 두 조손은 팔자가 폈군.”
“취월걸개!”
“스승님!”
드디어 남궁세가에 나타난 취월걸개였다.
“그래. 무룡아. 잘 있었냐. 꼬맹이 너도···. 넌 정말 잘 지냈나 보다.”
“네. 잘 지냈습니다.”
“무슨 죽순도 아니고, 사람이 이렇게 쑥쑥 자라? 아무리 성장기라고 해도.”
“잘 먹고, 열심히 수련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말이라도 못하면 쯧쯧.”
취월걸개가 조금은 능청스러워진 하현을 보며 혀를 차고는 남궁무룡에게 말했다.
“할 얘기가 있다. 따로 얘기하지.”
남궁무룡은 하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 현아. 혼자 하고 있을 수 있지?”
“네. 조부님.”
남궁무룡은 씨익 웃으며 취월걸개와 자리를 떴다.
취월걸개가 나타나서 할 얘기라는 당연히 저번에 정덕현에서 있었던 일이 연장일 것이 당연했기에, 하현도 궁금했지만, 둘의 대화는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면, 조부님께서 어련히 가르쳐 주시겠지.’
정덕현의 일을 생각하자 하현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최근 다시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중인 무공을 떠올렸다.
바로 남궁민과 맞섰던 흑의인의 무공.
최근 머릿속에서 남궁민의 무공은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낸 하현은 그것을 넘어 흑의인의 무공에도 손대기 시작했고,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후우…….”
그때의 상황을 머리로 재현하며, 하현은 그가 쓰던 이상한 무공을 떠올렸다.
마치 나비를 연상케 하는 그 무공을.
* * *
“아니, 그러니까 마교가 아니라는 건 확실한데. 흉수가 어디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그래. 생포한 놈을 깨워 심문하고, 죽은 놈을 조사해봤는데, 아무것도 모르겠어. 다만…….”
“다만?”
“내 손에 죽은 놈이 조금 이상했어.”
“이상했다니 어디가? 자꾸 물어보게 하지 말고, 상세히 얘기 좀 해 주게.”
취월걸개가 재촉하는 남궁무룡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에잉. 쯧쯧. 그토록 매사에 여유 넘치던 검존 남궁무룡님께서 손자들이 엮이니 인내심이 아주 바닥 이로구만. 나도 정확한 사항은 알지 못하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취월걸개는 짐짓 남궁무룡을 보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그놈은 검기를 무슨 젓가락질 하듯 픽픽 쏘아댔단 말일세. 그런데, 정작 기혈도 혼탁하고, 수련을 미친 듯이 한 몸도 아니었네.”
“고수의 몸이 아닌데 무공은 강했다. 이 말인가? 천하의 취월걸개가 고전했을 만큼?”
“맞네…. 아니 그 말은 틀리네. 난 고전하지 않았어. 수월했다고!”
취월걸개는 남궁무룡의 말에 발끈하고는 민망했는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흠흠. 잠시 말이 딴 길로 샜네만, 그래서 떠오른 건 단 하나네.”
“무엇인가?”
“자네. 정말로 생각이 나지 않는가?”
남궁무룡은 과거를 떠올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육체에 비해 과도한 내공이라면…….
“혹시, 흡성대법?”
“맞네. 그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중이었네.”
“허허…….”
남궁무룡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흡성대법은 마교에서 내려오는 독문무공.
그렇다면 이번 일의 흉수는 정말로 마교라는 것일까?
“하지만, 아닐 가능성도 매우 커. 내가 죽인 자는 마공 특유의 마기를 전혀 흘리지 않았네. 오히려 정순한 내공에 가까웠어.”
“그러면 흡성대법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무공일 수도 있다는 소리겠군.”
“그렇지. 내가 지금으로서 알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네.”
취월걸개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팍 썼다.
남궁무룡은 그런 취월걸개를 다독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자는 익숙한 얼굴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맞아. 어디선가 본 것 같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나. 내가 젊을 적에 보았던 것 같긴 한데···.”
천하의 취월걸개라도 기억이 안 날만도 했다.
만약에 그가 삼십 대에 봤던 자라고 해도, 벌써 오십 년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혹시 몰라 그놈의 얼굴을 그려온 종이를 남궁무룡에게 보여줘 봤지만, 그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민이도 그 흑의인이 썼던 무공이 특이했다고는 하는데, 어떤 무공인지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네.”
“그렇겠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초식을 펼치는 데 집중했을 것이야. 민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무공이 어느 무공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었겠지.”
취월걸개가 오히려 남궁민을 두둔했다.
민이 아니었다면, 장원의 모든 사람이 흑의인들에게 도륙당할 뻔했다.
잘한 아이에게 더 잘하지 못했다고 타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남궁무룡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남궁무룡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 이렇게 되면···. 또 원점이군.”
“마교에···. 마교 사칭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 같네.”
“사칭하려는 것들이라도 정체를 알면 머리가 덜 아플 것 같거늘.”
“걱정하지 말게. 우리 개방에서 어떻게든 정보를 알아낼 테니.”
“고맙네. 개방이 아니었다면, 온 무림은 귀머거리고 장님이었을 걸세.”
남궁무룡의 말이 은근히 마음에 드는지 취월걸개가 씨익 웃었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네. 나는 오늘은 갈 길이 바빠 바로 돌아가 봐야겠네.”
“잠깐 앉았다 갈 시간도 없는 게야?”
“나중에 다시 들르지. 그때는 곡주를 준비해 주게. 아 참. 가기 전에 하현이 고 녀석은 한 번 더 보고 가야지. 다시 연무장으로 가세.”
취월걸개는 하현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이 바쁜 와중에도 꼭 얼굴을 보고 가고자 했다.
남궁무룡도 그 마음을 알기에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