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타닥- 타닥-
어둡고 고요한 동혈에는 횃불 타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취월걸개가 무림맹에서 데려온 고수들은 모두 일류를 넘어서 절정에 다다른 고수들이었기에, 발자국 소리를 죽이는 것은 밥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은 쥐새끼 한 마리 발견할 수 없었다.
한참 동굴 속을 들어가자, 이제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나왔다.
그들이 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들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이거 함정 아니야?”
취월걸개가 투덜거렸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너무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서 의심부터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함정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소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온 길은 온전히 외길이었고, 누군가 매복할 만한 공간도 없었으니 말이오.”
사실 취월걸개도 유엽진인이 말한 그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내려갔을까? 아래에서 미미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싶더니,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아니, 이렇게 넓은 곳이 이 안에 있었다고?”
“인위적으로 만든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우연히 자연 발생한 것을 환현문에서 발견했나 보오.”
그들은 공동 내부를 조금 더 살폈다.
그러다 청성파의 장로배분 무인인 허창파가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음···. 모두 이곳으로 와 보시오.”
지금까지 특이사항 하나 발견한 적 없는 그들이었기에, 모두 서둘러 허창파가 있는 곳으로 모였다.
“으음…….”
“저런!”
“아미타불…….”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지는 참담한 장면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시체들이 마치 짐짝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는데,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말라비틀어진 모습이었다.
“무슨 실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라죽은 시체들이 쌓여 있을 수는 없을 테니.”
“실험이라니···.”
고수들은 경악하는 얼굴을 숨기지는 않았다.
말라죽은 시체들로부터 다들 한 가지 단어가 비슷하게 떠올랐으나, 누구 하나 시원하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취월걸개는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쓰며 신경질 내듯 말했다.
“다들 내가 말했잖아? 흡성대법이랑 비슷한 뭔가를 했다고. 그랬는데 자네들이 기필코 그럴 일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크흠. 그게 아니라···.”
흡성대법은 마교에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무공이다.
만약 이곳이 환현문이 아닌, 마교의 잔당들이었다면 무림은 또다시 정마대전으로 피로 물들 수밖에 없다.
장로들은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쉬이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취월걸개 장로. 그런데 만약 정말 흡성대법이라면 이미 무림은 마두의 출현으로 피로 물들고도 남았을 거요.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지 않소?”
“아니지. 그래서 이놈들이 마교가 아니라는 걸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걸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취월걸개는 답답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흡성대법을 익히려 했지만, 제 것이 아니니 아직 완성을 못 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지.”
“…….”
시끄럽게 떠들던 고수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다만, 취월걸개의 말에 정곡을 찔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 같이 느낀 것이다.
여기에 그들 말고 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주원대사가 별안간 어둠 속을 향해 말을 걸었다.
“시주들이 말해 주시구려.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지 시주들은 알고 있을 것 같으니.”
취월걸개도 어둠 속에 누군가 있었음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쯧쯧. 수준들을 보아하니. 내가 때려잡은 놈들보다 한참 부족한 것 같은데. 그렇게 살기를 내뿜을 거면 숨어있을 필요가 없지 않으냐?”
그의 말이 끝나자 어둠 속에서 인영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동이 매우 어두워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지만, 흑의를 입은 자가 대략 서른 정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맨 앞에는 황의를 입은 사내가 한 명 더 있었다.
“환현문주!”
취월걸개가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취월걸개…….”
“오십 년이 지났는데도···. 한눈에 알아보겠구려.”
그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흡사 그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봉문에 들어가는 날 마지막으로 본 것도 취월걸개 당신이었는데, 이렇게 멸문을 앞두고서도 마지막으로 보는 게 당신이라니···. 악연은 악연인가 보오.”
“오랜만이지만, 결코 반가운 얼굴은 아니군.”
취월걸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사나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봉문의 약조를 깨고 무림을 혼란케 한 죄. 그리고 인간을 가지고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 죄. 두 가지 죄로 환현문은 오늘부로 멸문이다. 스스로 무공을 폐하고 양민으로 살아간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환현문주는 괴로운듯한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큭큭···.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니오? 무공을 폐하라니. 과연 내가 정말로 무공을 폐하면, 나를 살려 둘 텐가?”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하겠네. 나 몰라? 나 취월걸개야.”
“하하하. 언제나 자신만만하군. 취월걸개. 그때도 그랬지. 내 무공을 뺏어갈 순 없다! 너희 중 한 명이라도 길동무로 삼아주마! 쳐라!”
환현문주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환현문주를 포함한 환현문도 전원은 무림맹 고수들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네 이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거늘.”
챙-!
취월걸개가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나머지 고수들도 각자 병장기를 꺼내며 환현문도를 맞이했다.
수적으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건만, 단 한 명도 불안해하는 자는 없었다.
빠악-!
바람처럼 표홀한 신법을 밟으며, 취월걸개는 환현문도 하나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취월걸개의 진짜 특기는 일대일의 대련이 아닌,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무기인 신법을 극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런 아수라장 같은 싸움이었다.
양중호(羊中虎).
그는 말 그대로 호랑이처럼 전장을 날뛰었다.
* * *
무림맹 고수들이 환현문도들과 싸움을 치르고 있을 무렵.
하현은 할아버지인 남궁무룡과 독대하고 있었다.
하현은 최근 무공만을 배우는 게 아닌, 할아버지에게 다도(茶道)에 대해서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차가 맛이 없는지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대는 하현을 보며 남궁무룡은 파안대소했다.
“맛이 없느냐?”
“음···. 아닙니다. 조부님.”
“하하하. 거짓말할 것 없다. 내 너를 나무라려 했던 질문은 아니니.”
“…맛없어요.”
“언젠가는 그게 맛있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하현은 몇 번을 마셔도 적응이 되지 않는지 연신 인상을 찌푸렸고, 남궁무룡은 그런 하현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현아.”
“네. 조부님.”
“실망했느냐.”
긴 설명이 없었지만, 하현은 남궁무룡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이번 정 대인의 장원에서의 사건이, 진짜 마교의 소행이 아닌, 사실은 마교를 사칭한 환현문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네.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하현은 솔직히 대답했다.
할아버지 앞에서 굳이 마음을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래. 사실 나는 처음 소식을 듣고 조금 걱정했단다.”
하현은 무엇을 걱정했냐고 물어볼까 하다 남궁무룡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남궁무룡은 다지던 백차 잎을 꾹꾹 누르고 나서는 말을 이었다.
“정말로 모든 진실이 밝혀져, 네가 분노에 잡아먹히는 것은 아닐까 말이다. 그런데, 오늘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모두 내 기우였구나.”
“아···.”
“그러니 실망하지 말거라. 이제부터는 마교에 관해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너에게도 공유해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하현이 고개를 떨궜다. 남궁무룡의 진심이 그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무공 수련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단다. 무인으로서 가장 비참할 때가 언제인지 아느냐?”
“언제이지요?”
“힘이 필요할 때에 내 힘이 모자란 것이다.”
남궁무룡은 물론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이라고 말을 덧붙이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후루룩하는 차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하현은 생각이 모두 정리되었는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조부님.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조급한 마음도 점차 사라지고 있고, 진심으로 이곳에서의 생활과 무공을 익히는 것이···. 진심으로 재미있습니다.”
“하하. 내가 바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과 모두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이지만, 저는 그 시간을 더 잘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궁무룡이 싱긋 웃었다.
하현과 이런 대화를 할 때면, 마치 소림사의 노승과 대화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물론 그의 친우인 주원대사는 제외하고 말이다.
‘주원대사는 취월걸개와 비슷한 과니까 말이야.’
그들을 생각하자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
“조부님. 먼저 일어나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못다 한 수련을 할까 싶어서요.”
“그러도록 해라. 내가 너무 오래 잡아두었구나.”
“아닙니다. 항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하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는 다도실에서 나갔다.
남궁무룡은 하현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정말로 입에 맞지 않는지 하현은 차를 마시는 시늉만 했을 뿐, 딱 한 모금만 마시고는 모두 남겨버렸다.
“영령아. 차를 싫어하는 것까지 너를 똑 닮았구나.”
검존은 외손자로부터 그의 딸을 멀리서나마 느낄 수 있었다.
* * *
다시 환현문.
이 각이 채 지나지 않아 흑의인들은 모두 죽거나 제압되었다.
무림맹 고수들은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환현문주 역시 취월걸개의 장에 당했는지 가슴이 함몰되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취월걸개는 그에게 다가갔다.
“환현문주.”
“취월걸개···. 내 아들도···. 죽었나?”
취월걸개는 아들이라는 말이, 며칠 전 산에서 죽인 황의인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내 손에 죽었지.”
“그렇···. 군.”
환현문주가 그의 아들을 떠올렸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기대도 하지 말 것을.”
환현문주의 말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촛불이 꺼지기 직전 가장 강렬하게 타오르듯 그의 목숨줄이 끊기기 전 잠시 또렷한 정신을 찾는 것이다.
“다시 무림에 나가고 싶다는 욕심과 또 그를 위한 천륜을 거스르는 대법은 내 아들을 잡아먹었다.”
“뭣이?”
“대법은 절반쯤은 성공이었지, 수많은 사람을 희생하여 엄청난 공력을 얻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성과 더불어 목소리를 잃게 되었으니까.”
취월걸개는 며칠 전의 황의인이 했던 이상한 행동들이 퍼뜩 떠올랐다.
그는 말도 하지 않고, 목적을 위해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듯했다.
그는 판단이라는 것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듯이.
“정말로 흡성대법이라도 연공 했다는 것이냐?”
“흡성대법이라···. 하하···. 그래. 그랬지. 그것 때문에 돈이 필요했고···. 만약 돈을 구하러 가지 않았더라면 개미 같은 목숨줄이나마 유지했을 것임을···.”
환현문주의 생명이 빛이 점점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그자의 말을 따르는 게 실수···. 였···.”
“그자? 이 사술을 가르쳐준 자가 있다는 것이냐?”
“대법이···. 완성되면 다시 무림으로···. 대법을···. 완성하면···.”
취월걸개는 쓰러진 환현문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라. 그게 누구냐. 말은 하고 죽어라. 이것아!”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환현문주는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털썩-
취월걸개는 환현문주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가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이번 일에 배후가 있었다는 말인가? 방도들을 이끌고 이곳을 샅샅이 수색해야겠구나. 대법을 가르쳐준 자가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마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인가?’
사건이 하나 일단락되었지만, 취월걸개는 이 일이 더 거대한 일의 시작점이 될 것 같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