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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44화 (44/304)

44화

혹자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 시간이 더디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궁세가에, 최소한 하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광음여류(光陰如流)라더니, 시간은 정말 잡을 수 없게 빠르구나.’

하현은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현이 남궁세가에 온 지도 이 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그동안 하현의 성취는 말 그대로 눈부셨고, 하현의 키도 부쩍 컸다.

언젠가 취월걸개가 하현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커 있고는 했으니까.

그 덕에 원래도 또래보다 훨씬 컸던 하현은 이제 멀리서 보면 남궁환과도 비등해 보일 정도로 컸다.

“현아! 오늘도 한 번 붙자.”

“누나. 내가 환이 형님부터…. 아니, 팽 형부터 이기고 말하라고 했지.”

“역시 너는 건방져! 오늘은 내가 혼쭐을 내줄게. 정말로.”

열네 살이 되어 제법 소녀티를 벗어나고 있는 남궁소화는 피어나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은 청초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하는 행동은 열 아들이 안 부러울 지경이었지만, 소화의 아버지 남궁기철과, 할아버지이자 가주인 남궁무룡은 소화의 그런 모습을 오히려 좋아했다.

‘소화야. 여인이라고 기죽을 필요 절대 없다. 네 능력을 최대한 펼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의 소화를 응원해주었고.

‘영령…. 그러니까 네 고모의 어렸을 적을 보는 것 같구나. 사실 네 아버지나 숙부보다 영령이 무공에 대한 자질과 열정이 더 뛰어났단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 할애비에게 말하거라.’

할아버지는 과거 영령을 키웠던 기억을 떠올려 소화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하현.

하현은 소화에게 있어 가장 친한 친구이자 경쟁자였다.

겨우 한 살 터울이기도 했고, 언제나 소화보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그녀의 목표가 되어 주었다.

딱!

목검과 목검이 부딪쳤다.

둘은 이미 진검을 사용하는 것에 허락을 받아놓았지만, 이렇게 수련할 때는 목검을 이용했다.

혹시나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휘리릭!

소화가 부딪힌 목검에 슬쩍 힘을 빼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현의 검을 축으로 빙글 돌며 목검을 찔렀다.

“팔방풍우!”

하현은 그 번개 같은 찌르기를 목검으로 쳐내면서도, 소화의 신위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금 전 소화가 내보인 초식은 분명히 삼재검법의 마지막 초식 팔방풍우였다.

다만, 그냥 보통의 팔방풍우였다면 하현이 놀랄 리 만무했다.

“이 팔방풍우는……!”

“왜. 이걸 너만 할 줄 알았던 건 아니지?”

그녀가 해보인 팔방풍우는 작년 하현이 남궁민의 삼재검법을 보고 영감을 얻었던 바람을 담은 팔방풍우였다.

일 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소화도 어느덧 하현이 보았던 과정을 밟아오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데?”

“그렇게 쉽게 막아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솔직히, 쉽지는 않았어!”

이번에는 하현의 차례였다.

쿵-

하현이 강하게 진각을 밟는가 싶더니.

스슥-

소화의 시야에서 하현이 순간 사라졌다.

하현과 처음 맞서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당황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소화는 지금껏 하현을 가장 근처에서 지켜보았기에 하현이 조금 전에 보인 무공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뒤쪽으로 크게 목검을 휘둘렀다.

후웅!

빠악-!

소화의 눈앞에서 사라진 하현은 어느덧 소화의 등 뒤에 나타나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 덕에 소화가 휘두른 검과 정확하게 부딪혔다.

“와. 누나. 오늘은 정말 뭔가 다른데?”

“오늘은 내가 혼쭐을 내준다고 했지!”

“이 정도면 팽형과 호각…. 아니, 어쩌면 더 강할 수도 있겠는데?”

하현은 생글거리며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기수식을 취했다.

양손이 아닌 한 손으로 검을 잡고, 반대쪽 팔로 그 균형을 잡는듯한 도법에서 자주 구사하는 기수식. 월광검법이었다.

“누나랑 대련하면서, 이렇게까지 한 건 처음인 것 같지만.”

스으윽-

월광검법(月光劍法) 제 일초식 만월타(萬月打)

하현의 검이 큰 원을 그리며 소화에게 부딪혀 간다.

분명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는 아니었으나, 소화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피하면 검에 걸리고 말 거야. 방법은 막아내거나, 쳐내는 것뿐!’

소화도 그 짧은 시간에 대연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대연검법(大衍劍法) 제 삼초식 대연천망(大衍天網)

하현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에 맞추어 느리고 천천히 움직이는듯한 소화의 검이 곧 하현의 검을 에워싸듯 움직였다.

그리고 곧 두 검이 부딪혔다.

카가가가가각-

목검끼리 부딪쳤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탱그랑-

결국, 둘 중의 한 명은 목검을 놓치고 말았다.

“으아! 또 졌어!”

“와…. 누나.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어.”

검을 떨어뜨린 것은 소화 쪽이었다.

소화는 이번에는 정말 아쉽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고, 하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는 정말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게.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검을 놓고 뒤로 빠질 뻔했다니까.”

“진 것도 서러운데, 누구 약 올리니?”

“아니. 진심이야 정말.”

소화는 하현의 얼굴과 목소리에 정말 진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정말로 내가 팽 오라버니…. 아니, 팽가 놈보다 강해?”

“누나…. 팽가 놈이 아니라 팽 형…. 둘이 바뀌었어.”

“바뀌면 뭐 어때서. 둘 다 맞는 말이잖아. 하여튼, 내가 더 강하다는 말 정말이야?”

“응. 며칠 전에도 내가 팽형이랑 대련했잖아. 그런데 지금 누나가 훨씬 무서웠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소화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는 빙긋 웃었다.

“그렇단 말이지? 내가 넌 어쩔 수 없어도. 팽 오라버니는 오늘 가만히 안 둔다.”

소화는 하현과 함께 연무장을 빠르게 정리하고는 시야에서 총총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하현은 팽헌홍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하현은 예상하였지만, 그날부터 숙소 옆 공터에서는 팽헌홍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몇 날이 또 흘렀다.

오늘 세가는 몹시도 분주했다.

마치 청룡각 입관 시험이 있는 날처럼, 무슨 큰 행사가 있는 듯 보일 정도였다.

“후. 힘들다.”

하현이 시원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세가가 이렇게 분주한 와중에도 하현은 연무장에서 아침 수련까지 모두 마쳤다.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인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하현은 장내를 정비하고, 전각으로 돌아갔다.

하현이 거의 도착했을 때쯤, 하현을 기다렸는지 전각 입구를 서성이던 누군가가 신법을 전개하며 달려왔다.

특유의 통통 튀는듯한 걸음걸이. 장칠이었다.

“장칠 아저씨!”

“아이고, 도련님! 오늘 같은 날까지 수련을 하신 겁니까?”

“항상 그렇죠. 뭐. 저 찾으셨어요?”

“아니! 조금 이따가 모용세가로 출발하시기로 하신 거를 혹시 잊으신 건 아닙니까?”

“하하. 설마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현의 여유로운 대답에 장칠이 순간 답답해져 언성을 높였다.

“아니, 가주님을 포함해 직계분들이 모두 떠나시는 큰일을 앞두고서도 어쩜 그렇게 급한 게 없으십니까?”

“아직 시간 많이 않아요? 진시가 끝날 때(대략 오전 9시) 만나기로 했으니 한 시진이나 남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오래도록 세가를 떠나 계시는 건데 짐을 좀 챙기시고 준비 좀 하셔야죠!”

하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허리춤에 찬 검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짐은 옷가지 몇 개랑 이 검이면 충분합니다.”

“허허···.”

장칠은 태연자약한 하현의 태도에 헛웃음을 켤 주밖에 없었다.

“어쨌든 챙겨줘서 고마워요. 아저씨.”

“아닙니다. 어떻게…. 챙기는 것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제가 잘 챙길 수 있어요.”

하현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가 남궁세가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넘어 그동안에 키도, 덩치도 눈에 띄게 큰 하현이건만, 장칠의 눈에는 아직도 처음 취월걸개의 등에 업혀 장원의 대문을 두드리던 어린아이였다.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잘 다녀올게요.”

하현은 싱글 생글 웃으며 장칠을 안심시켰다.

“가주님과 함께이니 걱정은 되지 않지만, 모쪼록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저씨.”

하현은 장칠의 따뜻한 진심이 느껴져 고마움을 전했다.

장칠은 그 이후로도 집 밖에서는 함부로 이것저것 먹어서는 안 된다느니, 대도시에서는 으슥한 골목에는 절대 가지 말라는 등 몇 가지 잔소리를 하고는 그의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장칠과 헤어지고는 하현은 그에게 말했던 대로 최소한의 짐만 꾸리자 두 시진은커녕, 이 각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많이 남네.”

하현은 슬쩍 자리에 앉아 그의 숙소를 돌아보았다.

분명 금방 돌아올 터이지만, 장칠의 말대로 처음 이 방을 길게 떠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장칠 아저씨가 내가 없을 때도 내 방 청소를 해주신다고 했으니, 먼지가 쌓이지는 않겠지.”

하현은 내 방이라는 말에 묘한 뿌듯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게 낫지. 방에서는 지루해서 안 되겠다.”

하현은 미련 없이 전각을 떠났다.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 * *

하현이 장원 입구에서 조금 더 기다리자 모두 시간에 맞춰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화와 남궁 환에 이어 남궁민이 도착했고, 차례로 남궁기현과 남궁기철도 등에 봇짐을 한 아름 메고는 나타났다.

그리고 아주 잠시 후.

검존 남궁무룡이 휘적휘적 걸어왔다.

“시간에 맞춰 나온다고 했는데, 내가 제일 늦게 나온 것 같구만.”

“아닙니다. 아버지. 제때 나오셨습니다.”

“허허. 미안하다. 어젯밤에 누군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내 처소까지 들려 잠을 설쳤더니 조금 늦었구나.”

“아! 할아버지. 그건 소화가 팽…. 읍읍!”

무언가를 말하려는 남궁환의 입을 소화가 필사적으로 막았다.

“푸하- 알았어. 누구 숨 막혀 죽일 일 있냐!”

“누나가 그러면 아무도 말 안 해도 누나가 한 일인 거 알 건데···.”

“남궁하현!”

“이크!”

괜히 한마디 보태고 한 소리를 들은 하현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남궁무룡은 그 광경을 보고 진심으로 웃어버렸다.

“자. 그럼 가자꾸나. 갈 길이 멀다. 요녕까지는 그리 가까운 길이 아니니 말이다.”

“네. 아버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러거라.”

남궁기철이 선두로 나서고, 제각기 크고 작은 짐을 등에 멘 남궁세가의 조촐한 식솔들은 첫발을 뗐다.

“아참. 출발하기 전, 너희에게 당부하고픈 말이 있구나.”

“무엇입니까?”

“뭐에요 할아버지?”

“다들 우리가 모용세가와 비무를 하러 간다고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남궁무룡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모두와 눈을 마주치고는 말했다.

“다시는 우리 남궁세가의 위세를 넘보지 못하도록, 철저히 밟아주고 올 것이다. 한 번 본때를 보여줄 때는 본보기가 되도록 철저하게 보여줄 것. 그것이 우리 남궁세가다.”

“예!”

“넵!”

남궁무룡을 제외한 모든 식솔은 한마음 한뜻으로 말했다.

하현도 그 사이에서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짐했다.

그 누구보다도 남궁세가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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