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다음 날.
하현과 남궁환, 소화는 북경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아…. 하현!”
“으, 응 누나.”
“무슨 생각을 자꾸 그렇게 해. 저기로 가자니까.”
“아, 미안.”
그런데 하현은 소화가 하는 말도 잘 듣지 못할 정도로 다른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다.
‘오늘 저녁에 중앙 연무장으로 오라고 하셨었지.’
하현은 오늘 저녁이 몹시도 기대되었다.
현재 정파무림에서 검의 최고를 고르라면 누구나 의심 없이 검존 남궁무룡을 꼽는다.
그리고 도의 최고는 당연히 도제다.
하현은 지금까지 할아버지 수준의 무인은 취월걸개를 제외하고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또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하…. 얘 또 내 말 안 듣네. 하현아. 무슨 일 있어?”
소화가 걱정스레 물었다.
평소에 정신을 놓고 사는 법이 없는 하현이 이러니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아니. 자꾸 내가 정신을 놓지. 미안 누나.”
“아냐.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야?”
하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괄괄한 성격이고, 가끔은 더 동생 같을 때가 많은 소화였지만, 가끔 이럴 때는 또 제대로 누나 노릇을 하곤 했다.
“누나. 그냥 나 팽가로 돌아갈게. 자꾸 신경 쓰이게 하는 거 같아서 미안해서 안 되겠어.”
“흠…….”
“미안 누나.”
“그래. 알겠어.”
소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있었다면 분명히 그녀에게 먼저 말해주었을 거라 믿고서.
“그럼 환이형이랑 재밌게 놀다 와 누나.”
“알았어. 현아 이거 받아.”
하현은 소화가 손에 쥐여준 것을 보았다. 몇 개의 동전이었다.
“돈은 왜?”
“들어가는 길에 뭐 많이 팔더라. 뭐라도 사 먹으면서 들어가. 너 돈 없잖아.”
“고마워 누나.”
매일 티격태격해도 하현을 챙겨주는 건 역시 소화였다.
“그럼 나 간다. 이따가 팽가에서 봐!”
“그래!”
하현은 소화에게 몇 번 더 손을 흔들어 준 뒤에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오라버니. 현이 별일 없겠지?”
“그럼. 우리가 왜 현이 걱정을 해. 우리나 잘해야지.”
“흐음…. 아니, 평소에는 세상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가끔 결정적인 순간에 눈치가 없어서 쟤는.”
“그런가? 뭐. 별일 있겠어?”
“그렇겠지?”
소화는 하현이 사라진 방향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에잇 모르겠다. 걔가 길 잃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오라버니 가자!”
남궁소화는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렸다.
북경은 그녀로서도 처음이었기에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한편, 팽가로 돌아가던 하현은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경단이나 좀 사 갈까?”
하현은 사 남매 중 홀로 팽가에 남아있는 남궁민을 떠올렸다.
남궁민은 절대 주전부리는 안 할 것 같은 얼굴로 생각보다 단 간식을 좋아했다.
대놓고 찾지는 않지만, 얼마 전 제남을 거쳐올 때 시장에서 경단을 흡입하다시피 했던 모습이 떠올라 하현은 피식 웃었다.
“돌아가는 길에 경단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하현은 팽가로 돌아가는 길에 봐두었던 길을 떠올렸다.
그는 한 번 지나온 길도 모두 외워버렸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하현이 경단 가게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하현은 특이한 행색의 아이 하나를 보았다.
‘거지?’
나이는 하현 또래로 보이는데, 입고 있는 옷의 행색이나 꾀죄죄한 몰골로 보아서는 거지라고 부를 만했다.
개방 소속인가 싶어 허리를 확인했지만, 허리춤에는 어떠한 매듭도 없었다.
‘개방 소속이 아니거나, 백의개인가?’
하지만 백의개일 가능성은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취월걸개에게 들은 바로는 개방에 처음 들어가 백의개 활동을 하며 일결 제자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절대 개별행동은 시키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가만히 보니 저 아이는 거지가 아니다.’
하현은 거지가 아니리라 판단을 내렸다.
아이가 거지가 아닌 결정적인 이유는 배가 고픈지 경단 가게 주변을 서성이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저 침을 꼴깍 삼키며 뚫어지게 경단만 쳐다볼 뿐.
하현은 왜인지 처음 신가장에서 도망쳤을 때 고시현에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돈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도 딱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거지는 아니지만, 거지꼴을 하고 있는.
그때 취월걸개를…. 아니, 마윤철이 하현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더라면 그때 하현은 남궁세가에 도착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윤철 그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2년 전, 그와 헤어질 때 하현을 이길 것이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으니, 분명히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 터였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가게에 들어갔던 하현은 있는 돈을 모두 탈탈 털어 경단을 구매하고 나왔다.
경단 가게에서 나오자 아까의 그 아이는 똑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하현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 경단 한 상자를 건넸다.
“저기 이거 먹을래?”
“나?”
하현이 갑작스럽게 말을 걸자 아이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키는 하현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았는데, 아직 변성기는 오지 않았는지 높은 목소리였다.
“응. 너.”
“내가 왜?”
“먹고 싶잖아.”
아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혹시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는가 본데…….”
“아니.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내가 혹여 너를 거지로 아는 것 아니냐고 말할 거 아니야?”
“맞…. 네?”
하현이 씨익 웃었다.
무척이나 따사로운 미소였다.
“그렇지? 넌 아무리 봐도 거지는 아니야. 내가 거지 중에 왕거지 할아버지랑 친해서 잘 알거든.”
“왕거지 할아버지?”
“그런 사람이 있어.”
혼자서 큭큭 웃는 하현을 어이없게 보던 아이는 하현에게 물었다.
“그, 그럼 내가 거지도 아닌데 나한테 왜 먹을 거를 주려는 건데?”
“아까도 말했잖아. 먹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안 먹을 거야? 그럼 나 그냥 가고.”
하현이 상자를 다시 품에 넣으려 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아이는 황급히 상자를 받아들였다.
“아니야! 먹을게.”
“하하. 잘 생각했어.”
아이는 배가 몹시도 고팠는지 하현에게 상자를 받자마자 경단을 꺼내 하나 꿀떡 삼켰다.
“와. 맛있어. 역시 이 가게 경단은 최고라니까.”
“전에도 와본 적이 있어?”
“그럼, 내가 이 동네에서 몇 년을…….”
아이는 말하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뒤쪽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하현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갔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쉿. 들키면 안 된단 말이야.”
“누군가한테 쫓기는 거야?”
“음….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어. 눈에 띄는 행동은 하면 안 돼.”
하현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졌다.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대로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정확히 2년 전의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원래는 묻지 않으려 했는데, 무슨 일이야? 내가 도와줄까?”
“아니! 그러니까 아까부터 네가 왜?”
아이는 하현의 오지랖에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상황이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정말 강하신 분이거든. 어지간한 문제는 다 해결해 주실 수 있을 만큼.”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는 없을걸? 우리 아버지도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인데,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단 말이야.”
“아버지가 계셔?”
“당연하지. 그러면 너는 아버지도 없니?”
하현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측은한 표정이었다.
“응…. 난 아버지가 안 계셔.”
“앗, 윽, 엑, 아니…. 그러니까, 나는…. 미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괜찮아. 이제는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그. 그래. 참 좋으신 분이신가 보다.”
아이는 자신이 엄청나게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하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쪽으로 해주었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람…….”
아이가 허망하게 말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하현은 거대한 기운이 여러 방향에서 이곳으로 접근하는 것을 번뜩 느끼고는 아이를 그의 뒤로 훽 잡아당겼다.
“꺄악!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리 와! 누군가 오고 있어.”
“누가? 설마……!”
하현이 도망갈 곳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지만…….
‘갈 곳이 없다. 방심했어.’
기운들은 마치 천라지망이라도 펼치듯 하현을 가운데에 두고 좁혀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목숨같이 애지중지하던 검도 팽가에 놓고 온 상황.
하현은 급히 기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손에 내공을 잔뜩 실어 우수수 쓸어내렸다.
언젠가 남궁민이 하현에게 보여준 그 방법이었다.
찰나의 순간, 하현은 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지만, 휘두를만한 막대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너, 무공을 익혔어?”
“응. 그러니까, 내 뒤로 숨어.”
하현은 잔뜩 긴장하며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들의 수를 세었다.
“둘, 셋…. 모두 넷이야. 넷 정도면, 어떻게든 내가 잠깐 상대할 수 있을 테니, 싸움이 시작되면 너는 무조건 사람 많은 곳으로 도망가.”
“너….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정말 아까부터 같은 대답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드는구나. 내가 그럴 상황이 되어서야. 네가 도망가고 나면 내 몸 하나는 뺄 자신 있으니까.”
아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지만, 하현은 그것까지 볼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하현은 재빨리 내공을 일주천 시키며 당장이라도 폭발시킬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그가 딱 내공을 일으키기 좋은 몸 상태가 되었을 때.
촤라라락-
하현의 말대로 네 방위에서 네 명의 무인이 튀어나왔다.
‘넷 중에서는 이자가 제일 약하다.’
타앗-!
하현은 무인이 튀어나온 순간 그 방향으로 활처럼 몸을 뒤로 젖히더니 그 탄력으로 앞으로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그리곤 그 속도 그대로 나뭇가지에 내공을 충만히 담아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궁신탄영(弓身彈影)!!”
빠악-!
“커억!”
나뭇가지가 무인의 머리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그리고 맞은 무인은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보통 일대 다의 싸움을 한다고 하면, 가장 강한 적부터 꺾어 상대의 기를 꺾어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괜히 가장 강한 상대에게 덤볐다가 내 공격이 막힌다면 여러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기 마련이다.
다수와 싸울 때는 가장 약한 자부터 공략하여 착실히 적의 숫자를 줄여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후!”
상대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하현은 호흡은 한번 강하게 내뱉고는 발을 굴러 또 다른 이에게 달려들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퍼억-
“크윽!”
한 명이 쓰러지는 것을 보아서일까.
그자는 팔로 하현의 나뭇가지를 막아내었다.
하지만, 팔의 통증이 상당한지 성한 팔로 공격을 막아낸 팔을 감싸 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넌 웬 놈이냐!”
순식간에 수하 둘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비록 검이 아니라고는 하나, 내공이 충분히 실렸는데 팔로 막아냈다. 가진 무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 수공이나 권법을 익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야. 바싹 붙어버리면 내가 할 게 없다. 경신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거리를 벌려야 해.’
하현은 대답 없이 상대들을 분석했다.
‘그런데 얘는 왜 도망 안 가?’
하현은 흘긋 아이를 바라보았다.
분명 싸움이 시작되면 도망가라고 했건만, 놀라서 그런 것인지,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인지 옴짝달싹도 안 하고 있었다.
“네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하북에서 우리 진주언가를 건드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때 무리의 우두머리 여인이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하현에게 점점 다가왔다.
양팔에 집중적으로 기운이 모이는 것으로 보아 하현의 짐작대로 권법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위험해. 나보다도 훨씬 강할 자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검이라도 있었더라면.’
하현은 잔뜩 긴장했다.
그렇다고 없는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
하현은 나뭇가지를 더욱 꽈악 잡았다.
웅웅웅-
여인의 두 주먹에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가 날 정도로 큰 기운이 모였다.
하현도 나뭇가지가 버틸 수 있을 만큼 최대한의 내공을 담았다.
‘어차피 한 번이다.’
이 나뭇가지는 저 여인의 주먹과 단 한 번만 부딪혀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기에 하현은 일격필살을 준비했다.
‘창궁무애검법. 실전에서는 처음이지만…….’
하현은 아직 미완성인 창궁무애검법의 오의를 떠올렸다.
“아무 대답도 못 하다니, 벙어리인 것이냐! 아니, 설사 벙어리라도 봐주지 않는다. 하압!”
여인이 소리치며 하현에게 신법을 펼쳐 들어왔다.
하현도 기수식을 취했고, 둘이 부딪히려는 순간.
“그만-!”
어디선가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가씨! 쿨럭.”
하현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던 여인이 급히 주먹을 회수하며 그 과정에서 초식을 무리하게 거두어 약간의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는 가는 피가 주륵 흘렀다.
다행히 더 여유롭게 내공을 가라앉혀 타격을 전혀 입지 않은 하현이 급히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 그만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하현이 지키려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무서운 표정으로 여인에게 소리쳤다.
“앵앵! 날 찾지 말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