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언영 아가씨!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은자도 하나 없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시면 저희는 어떡합니까! 도대체 열흘이 넘도록 어디서 무얼 하신 겁니까!”
“아버지께서 내 혼약을 철회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나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아가씨. 일단 집으로 돌아가셔서 가주님께 말씀을 드려보시지요.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십니다.”
하현은 지금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니, 솔직히 말해 둘의 대화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닫고 말았다.
“아, 그러니까…. 저기 너 여자였어?”
“지금 그게 중요해? 그리고, 내 미모를 보고도 남자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네 행색이…….”
“내 행색이 뭐 어때…. 서?”
언영은 순간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는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열흘 동안 잘 씻지도 못해 꾀죄죄한 몰골에 눈까지 다 가리는 앞머리, 그리고 열흘 동안 노숙하느라 잔뜩 지저분해진 옷.
그나마 옷도 가출할 때 편하게 움직이려 수련복을 입고 나왔기에 외양으로는 성별을 판가름하기에 힘들어 보였다.
“이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야?”
“내 호위 들이야.”
하현의 질문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호위?”
“응. 아까는 말 못 해서 미안. 나도 급작스러워서. 나는 진주언가의 언영이라고 해.”
진주언가는 하북성 안평에 있는 무림세가로, 당대의 오대세가에 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역사가 깊고 이름 높은 무가였다.
“영?”
“응. 방울 영(鈴)자를 써.”
어머니의 이름에 쓰이는 것과 같은 글자였다.
“그렇구나. 그런데 왜 이러고 다니는 거야?”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집을 나왔어.”
“가출?”
하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언영이 재빨리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은 뭐야?”
“나는 신…. 아니, 남궁하현이야.”
“남궁? 너 남궁세가 사람이야?”
“응”
언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너 엄청 강하다. 여기 기절한 유춘이 내 호위 중에서는 제일 약하다고는 해도, 상당한 실력자인데 말이야.”
언영이 하현 덕분에 혀를 빼물고 기절해 있는 무인을 가리키자, 하현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미안…. 그게 나는 네가 쫓기는 줄 알았어.”
“쫓기는 게 맞긴 했지.”
“아가씨. 이 자는 대체 누굽니까? 당장이라도 제가 이 자를……!”
앵앵은 몹시도 분개하여 말했다.
하기는 그럴 만도 했다.
순식간에 자신의 수하를 두 명이나 때려눕혔으니까.
“앵앵. 그만둬.”
“아가씨!”
“내가 기다리라고 했지!”
언영의 분위기가 살짝 바뀌자 당장이라도 하현에게 달려들 것만 같던 앵앵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둘은 완전한 상하관계로 보였다.
언영이 다시 하현을 돌아보았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한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태도였다.
“고마워.”
“뭐? 나는 네 호위를…….”
“어찌 됐든 고마워. 그건 신경 쓰지 마. 내가 확실히 말 안 한 내 잘못이 더 크니까. 너는 나를 ‘지켜주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언영이 지켜준다는 말에 어째서 저렇게 강조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푸흣. 내 생각엔 네가 여기 계속 있으면 더 복잡해질 것 같은데. 우리 여기서 이만 헤어질까? 우리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언영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녀의 말대로 계속 여기 있다가는 앵앵과 시비만 붙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오늘 일은 미안. 나는 지금 팽가에 있어. 며칠 뒤에는 떠날 거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날 찾아.”
“남궁세가라며? 언젠가는 볼 일이 있겠지. 용봉지회도 있으니까.”
언영이 살풋 웃었다.
꾀죄죄한 얼굴에 가려져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상당히 기품있는 웃음이었다.
“그럼. 간다.”
하현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가씨. 저렇게 보내실 겁니까?”
“아까 못 들었어? 내가 잘못한 거라니까.”
“그래도…….”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가자. 돌아가야겠어.”
“정말요?”
앵앵은 하현에 대해서는 벌써 잊어버린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전에도 언영은 몇 번 가출한 경력이 있었다.
그때도 찾기는 어떻게든 찾아내었지만, 설득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짜 고역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돌아간다니.
“응.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이 생겼거든.”
“가주 님께요?”
“그래.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자. 여기 유춘도 데리고.”
“네. 아가씨.”
앵앵은 몸이 성한 부하 하나를 시켜 기절한 유춘을 업으라고 시키고는 바로 진주언가를 향해 출발했다.
혹시라도 언영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 * *
팽가로 돌아온 하현은 남궁민을 찾았다.
남궁민은 팽가주가 내어준 숙소에서 명상하고 있었다.
하현은 명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경단 상자를 들고 그를 찾았다.
“현아. 오늘 다 같이 놀러 나간다고 안 했니?”
“형님이 혼자 계신 게 생각나서 돌아왔습니다.”
남궁민이 씨익 웃으며 하현의 머리를 헝클였다.
“이젠 이런 말도 다 할 줄 아는구나.”
“헤헤.”
하현은 기분이 좋아져 웃으며 남궁민에게 경단 상자를 건넸다.
“웬 경단이야?”
“형님이 저번에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 돌아오는 길에 사 왔습니다.”
“하하. 고마워.”
남궁민은 경단을 냉큼 집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조금 전 만났던 가출 소녀, 언영이 떠올랐다.
“형님. 혹시 진주언가에 대해 아십니까?”
“진주언가? 상세히는 모르지만, 대략적으로는 알지. 무림에서 꽤나 이름 높은 무가란다. 이곳 하북에서는 팽가 다음가는 위세를 자랑하는 곳이지. 그런데 언가는 갑자기 왜?”
“조금 아까 저잣거리에서 언가 사람을 봐서요.”
“이 부근이 그들의 주 무대라고 할 수 있으니, 아마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남궁민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경단을 또 하나 집어삼켰다.
하현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남궁민과 경단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형님.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숙소에서 조금 쉬려고요.”
“그래 하현아. 이것 정말 고맙다.”
하현은 남궁민에게 인사하고는 그의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아까의 일은 이제 덮어두고, 하현은 조금 이따가 있을 팽길산과의 만남이 기다려졌다.
* * *
하늘에는 동그란 보름달이 떠 연무장을 밝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중앙 연무장’이라고 하는 이곳에는 세 사람이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그들은 검존 남궁무룡, 도제 팽길산. 그리고 하현이었다.
“창안한 검법의 이름이 월광검법이라고? 오늘같이 달이 높은 밤과 꼭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하현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헌홍의 혼원벽력도를 처음 보고 월광검법을 떠올린 날도 오늘 같은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스릉-
하현의 검이 반짝이며 뽑혀 나왔다.
기왕 하기로 한 것, 하현은 진검으로 제대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부탁하네!”
팽길산은 아예 제대로 보려는지 연무장 구석에서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앉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초식을 시작하기 직전, 하현은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하현에게 힘내라는 듯 슬며시 웃어주었다.
그 웃음 덕분일까.
하현은 왜인지 오늘따라 검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휘잉-!
검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검 끝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달 모양을 그리더니, 한쪽 날로만 바닥에 강하게 내리친다.
쿵-!
분명 하현의 검은 바닥에 닫지도 않았건만 도제는 쿵 하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탈그락
팽길산은 여기까지만 보고도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지도 모른 채 벌떡 일어났다.
“혼원…. 벽력도?”
팽길산의 말끝에 의문이 실렸다.
하현이 하고 있는 검술의 형태는 혼원벽력도의 그것과 닮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은 혼원벽력도를 익힌 그가 제일 잘 알 수 있었다.
팽길산이 생각에 빠진 와중에도 하현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타압!”
부왕-!
이제는 호흡이 달리지도 않는다.
매일 아침 수련으로 내공의 도움 하나 없이 오로지 육체의 힘으로만 펼칠 수 있게 된 검법이다.
제대로 된 시범을 보이기 위하여 내공을 충분히 끌어다 사용하니 느껴지는 공기의 파동부터가 달랐다.
“으음…. 어허……!”
팽길산은 하현의 월광검법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어떨 때는 생각에 잠기고, 또 어떨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하여 월광검법을 많이 봐왔던 남궁무룡으로서는 하현의 검법보다 팽길산의 반응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지경이었다.
부왕-! 후웅!
하현의 검이 점점 절정에 들어섰다.
하현을 보는 팽길산은 이제 별 반응도 없이 하현이 하는 검술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눈 깜빡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집중하는 눈빛이었다.
지금 하현이 펼치는 부분은 혼원벽력도에서 실전된 부분이었다.
즉 오롯이 하현이 창조한 검술이라는 뜻.
스악- 후욱!
하현의 검이 베는듯하다가 찌르고, 또 위에서 내리치는 듯하다가 어느새 횡을 베는 동작을 끝으로, 하현의 검법 시연은 끝이 났다.
“후우-.”
하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
팽길산은 허공만을 바라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남궁무룡과 하현은 그가 지금 현재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를 잘 알기에 말도 걸지 않고 조용히 그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깨달음.
살면서 몇 번 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으로 보였다.
이각(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초점이 없던 팽길산의 눈이 다시 맑아졌다.
그리곤, 갑자기 연무장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껄껄껄! 무룡! 자네 말이 맞았네. 정말 이 아이는 복덩이로구먼.”
“축하하네. 무언가를 깨달았나 보군.”
팽길산은 진심으로 기쁜 기색이었다.
그는 남궁무룡의 말대로 월광검법에서 정말로 무언가 얻어갔음이 틀림없었다.
“껄껄! 도를 이렇게 해석할 줄은 전혀 몰랐네. 솔직히 말하면…….”
“현이가 휘두르는 것이 검인지 도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오지 않나?”
“바로 그것이네.”
팽길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껏 도와 검은 완전히 다른 병기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다.
아니, 더 나아가 닮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상극의 무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난 지금껏 무엇을 수련했나 돌아보는 시간이었어…….”
해답이 있으려면 의문이 있어야 한다.
팽길산은 도제라고 불려 올 정도로 도(刀)에 있어서는 극의를 본 무인이다.
수십 년간 그의 무공에 의문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정말 오랜만에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그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꽈악
팽길산은 하현에게 걸어가 하현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말했다.
“이렇게 좋은 무공, 볼 기회를 주어 정말로 고맙네.”
“아닙니다. 저는 검을 휘두른 것밖에···.”
“하하! 아무리 겸손이 미덕이라지만, 자네가 겸양을 떨면 그건 기만이네.”
팽길산은 장난스레 씨익 웃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제가 원하는 것 말이죠.”
“그래! 금은보화를 원한다면 주겠다. 혹여 영약을 원한다면 영약이나 영단을 줄 수도 있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그의 말에 하현은 아주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 고민에 빠진 얼굴을 보며 팽길산은 생각했다.
‘자질은 뛰어나다지만, 아직은 어린아이다. 한창 수련에 매달릴 나이이니, 영약을 달라고 하지 않을까?’
무인으로서 내공이란 목숨만큼 소중한 것.
팽길산은 하현이 응당 영약이나 영단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무엇이든 말해도 되나요?”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마.”
“저는…….”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하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제가 검법을 보여드렸으니, 저도 팽가의 제대로 된 도법을 보고 싶습니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제대로 견식 할 기회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