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오호단문도를?”
“네.”
도제가 하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하현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는 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듯했다.
이에 하현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가능하다면 되도록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자세히?”
피식-
그러다 웃음을 흘렸다.
하현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그의 막내아들은 하현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내용을 서신에 질리도록 써 보냈다.
혼원벽력도를 단 한 번만 보고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검술을 창안했을 정도라고.
결국, 오호단문도를 자세히 보여 달라는 것은 그에게 도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뜻.
“읏차.”
그는 일어나 몸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영특한 줄만 알았는데, 영악하기까지 하구나. 허나 혼원벽력도를 복원할 수도 있는 실마리를 준 너에게 무엇이 아깝겠느냐?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했으니.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그리곤 하현의 눈을 똑바로 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팽가는 절대 은원을 잊지 않는단다.”
그 언젠가 팽헌홍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건만, 호영이 느끼는 말의 파급력은 사뭇 달랐다.
척
팽길산이 어느새 도를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잘 봐라. 이것이 중원제일도(中原第一刀)니라.”
도제의 도가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틀이 흐르고,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하북팽가를 떠나려 장원 입구에 모였다.
그들을 배웅하는 팽길산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하하. 그러면 다음에 또 오겠네.”
“그래. 자주 좀 오게나. 있는 동안은 편안했나 모르겠구먼.”
“정말 편했네. 이렇게 대접해주어 고맙네.”
“뭘 그런 걸 가지고.”
수십 년 둘의 이어짐이 이어지는 동안, 수없이 많은 헤어짐을 반복했겠지만, 그때마다 항상 헤어짐은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한 번도 남궁세가에 온 적이 없지 않은가? 자네가 한 번 오게나.”
“껄껄. 내가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자네가 이렇게 찾아와 주니, 내가 갈 기회가 없지 않은가?”
“하여간 말이라도 못하면.”
작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둘 사이에 하현이 끼어들어 말했다.
“할아버지! 저도 다음에 꼭 다시 올게요.”
하현이 도제에게 너무 친근하게 말해서일까?
남궁기철은 흠칫 놀라 어깨가 떨렸다.
그가 아는 팽길산은 괴팍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으니까.
어릴 적 팽길산에게 많이 혼났던 기억이 그렇게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를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팽길산은 진짜 손자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며 하현에게 말했다.
“그러려무나. 하현이가 온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네 할애비처럼 연락도 없이 찾아온다 해도 내가 반겨주마.”
“뭐? 이 늙은이가.”
“아! 아니지. 하현이를 보기 위해서라도 내가 남궁세가에 한 번 들러야겠구나. 껄껄.”
“자네. 나랑 차별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하하. 오십 년을 봐온 늙은이랑 하현이가 같아?”
하북팽가에 있었던 사흘간 하현은 팽길산과 많이 가까워졌다.
팽길산의 예상대로 하현은 오호단문도를 한 번만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법(刀法)에 대한 많은 것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하현아. 내가 도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것. 잊지 않았지?”
“네. 할아버지. 도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박력이라고요.”
“그래! 박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네 연약한 육체도 키워야 한단다. 항상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거라.”
“네. 감사합니다.”
팽길산은 하현에게 숨기는 것 없이 그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하현은 마치 가뭄의 논에 물 주는 것처럼 그의 가르침도 맘껏 흡수하였다.
한편, 그들만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이들이 또 있었으니.
팽길산의 조카 팽용소와 남궁기현이었다.
“자네의 근육 단련법은 정말 대단한 면모가 많더군. 중량보다는 횟수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 내 절대 잊지 않겠네.”
“나야말로 지금까지 남궁세가는 여리여리한 검술만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점 다시 한번 사과하겠네. 자네 같은 남자다운 남자가 있음을 이제야 알다니. 역시 중원은 넓다는 걸 깨달았네.”
“…….”
“…….”
“흐읍!”
“하압!”
이번에도 둘은 동시에 온몸에 힘을 주어 근육을 부풀렸다.
역시 둘에게는 말보다 더 통하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자. 그러면 정말로 가겠네.”
“그래. 멀리 나가지 않겠네. 모용세가와의 가문전은….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군.”
“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걱정을.”
남궁무룡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모용세가와의 가문전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전혀 고려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모용세가와는 핑곗거리였을 뿐.
검존은 이렇게 식솔들과 복잡한 무림의 잊고 떠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요녕까지는 급히 간다면 하루 거리지만, 우리가 급할 건 없으니 천천히 가자꾸나.”
“네. 아버지”
그렇게 남궁세가 사람들은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뭐라고? 결국은 혼담을 파기해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네. 아버지. 저는 서문세가의 둘째 공자와는 혼약을 맺을 수 없어요.”
언영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며칠 전 하현을 만났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문자 그대로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과장을 조금 보태어 선녀가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려한 자태였다.
“이 녀석이……!”
진주언가의 당대 가주 언형철은 말문이 막혔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그의 딸 언영이 순순히 집으로 돌아왔다기에 생각을 바꿔먹은 줄 알았더니 전보다 더 완강하게 나올 줄이야.
“내가 이번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잘 알지 않느냐. 서문세가 둘째 공자라면 미남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고, 무공에 대한 자질도 뛰어나다고 한다. 게다가 서문세가도 지금은 오대세가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명문가일진데, 무엇이 그리 싫다는 것이냐?”
언영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가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도 아버지의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본인의 의사는 전혀 묻지도 않고, 가문의 발전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태도 때문에.
“그래도 어떻게 얼굴도 보지 못한 자와 혼인을 하라 하십니까.”
“다들 그러고 산다. 언니들도 다 그렇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왜 너만 유별나게 그러는 것이야.”
“제가 유별난 게 아니에요. 언니들도 지금에야 잘 산다지만, 처음 혼인할 때는 끔찍이도 싫어했다고요!”
쿵-
언형철이 벌떡 일어나자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는 그것엔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뭐 하자는 것이야. 이 아비 속을 뒤집어 놓으려 집으로 돌아온 것이냐?”
아버지의 말에 언영의 머리가 조금은 차가워졌다.
솔직히 이번 가출에 그녀는 머리를 깎고 아미산으로 들어갈까 하는 고민했을 정도로 진지한 마음으로 집을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제가 언성을 높인 건 죄송해요.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무슨?”
“서문세가와의 혼담은 파기해주세요.”
“기어이……!”
“하지만, 혼약은 할게요.”
“뭐?”
순간 언형철의 얼굴이 벙쪘다.
언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서문세가가 아닌 다른 곳에 매파를 보내주세요.”
“다른 곳이라면 어디로……?”
“남궁세가요.”
“남궁세가?”
언형철은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언영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의 막내공자가 있어요. 제 또래고요. 남궁세가라면 서문세가보다 더욱 좋은 혼처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남궁세가에서 무엇이 아쉽다고 우리와…….”
“그러면 꼭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세요. ‘지켜줬으니 책임을 져라’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이냐?”
언영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매파만 보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버지.”
* * *
팽가를 떠난 지 사흘이 지나고,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요녕성의 성도, 심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오래 걸려서 왔군요. 드디어 심양입니다. 아버지.”
“그래. 심양은 나도 처음 와 보는구나.”
수십 년간 강호를 주유하며 수많은 곳을 가보았던 남궁무룡이지만, 그도 심양에 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면 모용세가가 어디 있는지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알아봐야겠군요.”
“우리가 오늘 도착한다는 전갈을 보내놓았는데, 마중 나올 사람이라도 보냈으면 좋으련만.”
“형님. 우리가 그리 좋은 이유로 방문한 것이 아닌데, 모용세가에서 그렇게까지 신경을 썼겠습니까?”
“그렇겠지? 냉혈검의 평소 태도만 보아도 말이다.”
남궁기철과 기현이 대화하는데, 하현이 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백부님들! 저 앞에 모용세가 깃발이 아닙니까?”
하현이 가리킨 쪽에는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모(慕)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깃발을 꽂은 마차가 두 대나 서 있었다.
“모용세가의 깃발이 맞습니다.”
“마차를 보냈다고?”
그때 마차 옆을 지키고 있던 무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신법을 전개해 그들의 앞으로 달려왔다.
“혹시 남궁세가 분들이십니까?”
“맞네만. 자네는 모용세가에서 보내서 왔는가?”
그는 포권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검존 어르신이시군요. 인사 올리겠습니다. 모용세가의 모용주 입니다.”
“반갑네. 모용가주께서 보내서 오셨는가?”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가주님께서 마차를 대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편히 모시고 오라고 저에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흠…. 고맙네.”
남궁무룡을 비롯한 세가 식솔들은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순순히 마차에 올라탔다.
남궁기현은 분명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했지만, 마차가 모용세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은 매우 편하게 모용세가 행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모두 이쪽으로 오시지요. 저희 세가 내에서 가장 좋은 손님용 숙소입니다. 이곳에 짐을 푸십시오. 그리고 시비를 대기 시킬 테니 혹여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음…. 고맙네.”
“아,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연회 준비를 직접 지시하시느라 인사가 늦어질 것 같은 점 죄송하다는 말씀도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모용주는 시종일관 예의 바른 태도로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대했다.
“그럼,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언질을 드릴 테니, 잠시간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모용주가 사라지고,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모용가주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평소에도 간악한 면이 있는 자이니, 무슨 흉계를 꾸미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흠…….”
남궁무룡 역시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인지 턱을 쓸며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그들이 받는 대우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귀빈 대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주체가 모용세가라는 것이 의문이 가지 않았을 뿐.
“하하…. 설마. 아니겠지.”
그러다 남궁무룡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혼자서 실소했다.
“아버님.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으신 겁니까?”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 떠올라서 말이다. 하필 그 사람이 모용세가 사람이기도 했고…….”
남궁무룡은 말을 줄였고, 그 후로는 별다른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시종 하나가 식사 준비가 되었다며 그들을 불렀다.
식당으로 안내받자, 그곳에는 모용세가의 가주인 냉혈검 모용비산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존 어르신. 일 년 만에 뵙습니다.”
“그래. 자네도 잘 지냈나?”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모용비산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는 무림맹에서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심지어 그는 손수 남궁무룡에게 상석을 내어주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봐온 비열한듯한 모습이 전혀 없군.’
남궁무룡은 모용비산이 내어주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생각했다.
그때 모용비산이 남궁무룡을 보며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르신.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예상 못 한 그의 태도에는 천하의 남궁무룡도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주 촌각의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남궁무룡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니네. 이게 그만 고개를 들게.”
모용비산은 고개를 들어 남궁무룡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남궁무룡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재미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네. 솔직히 말해보게.”
“네. 어르신.”
“지금까지…. 일부러 그랬군? 일부러 무림에 논란을 키운 거야. 굳이 우리와 엮어서 말이지.”
이번에는 모용비산이 당황하고 말았다.
아직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사과만을 했거늘, 남궁무룡은 모든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남궁무룡은 입을 떼지 못하는 모용비산을 보며 말했다.
“이 모든 게 휘 형님의 계책이군?”
“.……!”
남궁무룡은 조금 전보다 더 놀란 모용비산의 얼굴을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