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처음은 적막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는 현재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상황파악이 끝나자.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묵화잠룡이 이런 아이한테 지고 말다니!”
“역시 남궁세가다. 모용세가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남궁세가가 겨우 처음 이긴 것인데, 속단하긴 이른 거 아니야?”
“그 이름 높은 묵화잠룡이 남궁세가의 막내한테 혼절했는데?”
양민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무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짐짓 아는 체하며 현재 상황이 얼마나 이변인지에 대해 떠들었고, 무림에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하더라도 눈으로 보이는 둘의 나이 차 때문인지 하현을 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승자는 남궁세가의 남궁하현!”
군자검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하현의 승리를 선언했다.
하현은 군자검에게 한 번, 관객들에게 또 한 번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한 후에 자리로 돌아왔다.
‘남궁하현. 남궁하현이라 불렸어.’
아무것도 아니건만,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이제야 진짜 남궁세가의 일원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아. 고생했구나.”
“잘했다. 장하다. 장해.”
“제법 하던데?”
가족들의 칭찬세례가 쏟아지고, 하현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기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비무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연무장 위에서의 하현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모용청을 도발할 때는 날카로운 모습이었고, 그를 공격할 때는 무자비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상대가 방심했기에 쉽게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다시 붙으라고 하면 이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현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하현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선제공격을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모용청이 이성을 잃지 않고 냉정한 마음 상태로 싸웠더라면 진지하게 현재 수준으로는 그에 못 미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온 이상 가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이기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잘하고 왔구나. 팔은 괜찮고?”
“괜찮습니다. 조부님.”
남궁무룡은 목검을 막아내느라 조금 부은 하현의 팔을 몇 번 매만져 주었다.
본격적으로 칼밥을 먹고 살기 시작하면 이 정도 경미한 부상은 항상 달고 다녀야 하는 그림자 같은 것이건만, 남궁무룡은 하현이 다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위험했다. 만약 진검이었다면 팔이 잘렸을 수도 있었어. 그리고 목검일지라도 공력이 조금 더 담겼더라면 팔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네.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할아버지.”
하현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남궁무룡은 그래도 하현이 기특한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상대와 격의 차이가 있었는데, 잘 해냈다."
하현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을 느끼며 해맑게 웃었다.
한편, 모용세가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모용청은 분명히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건 분명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졌냐가 그들을 심란하게 했다.
‘이렇게 되면 계산이 어긋나는데.’
솔직히 말해, 모용비산은 모용청이 남궁민과 비슷하거나, 혹은 아주 미세하게 더 강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렇기에 남궁무룡의 손주 넷을 어떻게든 잡아냄으로써 이번 비무의 승리를 가져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계획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으음···.”
“청아! 정신이 드느냐.”
“가, 가주님···. 제가 패배 한 것입니까?”
“그렇다…….”
“하…….”
모용청은 깨질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하현에게 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괴로웠다.
“보통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실력 자체가 상상 밖이었습니다.”
“알았다. 너는 치료부터 받거라.”
“알겠습니다.”
모용청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고 연무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면 다음 비무자는 연무장으로 올라오시오! 이번에는 모용세가부터!”
군자검의 진행에 따라 모용세가에서 무인이 하나 올라왔다.
마치 외공을 익힌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우락부락한 자였다.
“아버님. 이번에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했던가.
남궁세가에서는 모용세가의 무인보다 더 거대한 근육과 몸을 가진 남궁기현이 남궁무룡에게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네. 아버지!”
남궁기현이 쭉쭉 몸을 늘려 몸을 풀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남궁세가의 태백검 남궁기현이라 합니다.”
“모용세가의 견혼수 모용현영이라 하오.”
둘은 서로를 향해 예를 차렸다.
모용현영은 아무런 병장기도 가지고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장법이나 권법을 쓰는 무인으로 보였다.
“시작!”
군자검의 목소리를 신호로, 두 무인이 부딪혔다.
쾅-!
남궁기현의 검과 부딪힌 것은 모용현영의 육장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장법을 쓰는 무인이었던 것이다.
씨익-
남궁기현은 이 한 번의 부딪힘에서 모용현영이 어느 정도의 무인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견혼수가 모용세가의 장로급이라고 했었나?’
분명히 모용세가는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임은 틀림없다.
모용세가의 장로급 무인은 능히 여타의 세가보다는 한 수위라고 일컬어지는 구파일방의 장로와 동급으로 쳐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남궁세가의 태백검 남궁기현이다.
남궁기현이나 그의 형 남궁기철은 겨우 그 정도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나와 형은···. 구파의 장문인 정도는 쳐 줘야지!’
화아악-
남궁기현이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전신의 기운을 끌어올린다.
“하압!”
그는 기합성과 함께 모용현영에게 달려들었다.
쾅!!
또 한 번의 부딪힘이 일었다.
* * *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비무가 한참인 시점.
길림성과 내몽고 지역의 접경지에는 피 냄새 자욱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 대주···.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능후가 처참하게 변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 쓰러져있는 시체만 해도 백 명이 넘어갔다.
“조용히 지나가겠다고 하여도 길을 터주지 않은 것은 이것들이다. 오랑캐들이 말을 안 들으면 따르는 건 죽음뿐이지.”
채형석은 오히려 담담했다.
홀로 수십 명을 도륙한 사람이 저리도 평안하게 말하니, 능후는 도리어 자신의 상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신교가 다시 무림을 횡횡한다는 것이 세상에 밝혀지면 어떡합니까? 교주님의 대법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온 게 아니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채형석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것들은 오랑캐들이다. 만약 중원에서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분명 구파일방이니 오대세가니 하는 정파의 위선자들과 더불어 높은 곳에서 뒷짐 지고 있는 황궁 것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채형석이 능후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치들이 이런 몽고 땅에까지 신경을 쓸 것 같으냐? 중원인들은 내몽고와 남만, 서창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같잖은 오랑캐 중의 하나로 볼 뿐.”
“그럼, 그것까지 계산해서 이쪽으로 방향으로 오신 것입니까···?”
끄덕
채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피가 흥건히 묻어있는 도를 슥슥 닦고는 다시 칼집에 갈무리했다.
‘대주님은 그냥 잔인하기만 한 게 아니다. 괜히 별호에 이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능후는 교활하기까지 한 채형석의 술수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듯했다.
“혈검대! 부상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혈검대는 총 열 분대로 나누어져 있다.
한 분대에 서른 명씩, 삼백 명의 무사를 신도 중에서도 추리고 추려 만드는 전투조직이 바로 혈검대였다.
채형석은 그중서도 오직 열 명 만을 데리고 왔다.
그의 목적은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닌, 오직 모용세가와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들만을 처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좋다. 이제 요녕이 코앞이다. 우리 천마신교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 늙은이의 뇌리에 똑똑히 박아 줄 것이다!”
“존명!”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다. 내가 남궁 늙은이의 발을 잡아둘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어린아이들을 찾아 죽여라. 정정당당? 그런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오직 신교만 생각하라. 신교의 영광을 위해 피를 탐하라!”
“존명!!”
비록 열 명뿐이었건만, 대답 소리는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이 대성박력이었다.
앞으로 하루.
그들이 요녕성에 도달하기까지는 오직 하루뿐이 남지 않았다.
* * *
“승자는 남궁세가의 남궁기현입니다!”
남궁기현과 모용현영의 비무는 다소 일방적이었다.
모용현영이 쉴 새 없이 날리는 장을 여유롭게 받아쳐 준 남궁기현은 덩치에 어울리게 웅혼한 내력을 담아 쓸어 담듯 검을 운용하기 시작했고, 그의 검에 모용현영의 기운이 모두 삼켜지며 견혼수는 힘도 써보지 못하고 남궁기현의 검에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싱거웠던 남궁기현의 비무가 끝났다.
벌써 2패째.
처음 두 번의 승리를 가져오고, 두 번의 패배를 한 모용세가는 전적은 같았지만 다들 하나같이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분위기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것을 그들도 눈치챈 것이다.
다섯 번째 비무는 남궁기철의 차례였다.
남궁기철의 비무는 더더욱 싱거웠는데, 단 일 초식 만에 승부가 결정된 것이다.
그는 비무에 오르기 전 남궁민에게
‘섬전이란, 첫수에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무공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연무장에 올라갔고, 그의 말이 곧 현실이 된 듯, 말 그대로 번개 같은 출수로 모용세가의 무인을 한 수만에 패퇴시켰다.
남궁세가에 들어오고 나서 남궁기철의 무공을 처음 견식한 하현이 남궁기철의 일거수일투족을 두 눈에 담으려는 듯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졌군…….’
모용비산은 두 눈을 감았다.
이미 삼 패를 기록하고 있는 모용세가였다.
거기에 모용세가에 검존 남궁무룡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심지어 가주인 본인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비무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스윽
모용비산은 고개를 슬쩍 들어 남궁세가쪽을 훔쳐보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남궁민이 몸을 풀고 있었다.
모용세가쪽에서도 그에 맞추어 장로급 무인 하나가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모용비산 역시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여, 남궁민에게도 지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강호초출임에도 청룡신검이라는 별호로 무림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남궁민이다.
여기서 그가 또 승리한다면, 이번 비무는 결국 남궁세가의 위신만 올려주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래, 질 때는 지더라도 승리 하나는 더 챙기고 져야 한다. 그게 우리 모용세가의 최소한의 체면이다.’
모용비산은 다음으로 출전하기로 한 무인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전했다.
“다음은 내가 나가겠네.”
올라가려 무인은 모용비산이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갑자기 떨려오는 손을 멈출수는 없었다.
그말인즉슨 그의 상대가 검존 남궁무룡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자, 다음 올라오시오!”
군자검이 모용세가측을 보며 외쳤다.
모용비산은 연무장 위를 올라가 남궁민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래, 이번에는 초장부터 최선을 다한다. 청룡신검 남궁민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나마 체면을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니.’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남궁민과의 배분 차이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할 요소가 아니었다.
그저 이번 비무를 어떻게 이겨야 할지에 대한 생각뿐.
저벅저벅
모용비산은 반사적으로 연무장 위를 올라오는 무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뒷짐을 지고, 빙긋 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검존 남궁무룡이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르신이 어째서 지금…···?”
당황한 목소리의 그와는 달리, 남궁무룡은 마치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말했다.
“하하하. 내가 일 년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다음번에는 제대로 좀 맞자고.”
순간 모용비산은 모용세가의 가주가 된 이후에 처음으로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