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냉혈검(冷血劍) 모용비산은 그의 별호처럼,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대단하다.’
그는 속으로는 솔직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연무대에 올라온 남궁무룡은 어떠한 기수식도 취하지 않고, 아무런 기운을 끌어올리지도 않으며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박력은 대단했다.
‘일 년 전 무림맹에서 보여준 신위가 그저 인사였다는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검존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떠한 감정도 없는 그 눈빛을 보며 모용비산은 소름이 오소소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닿을 수 없다…….’
진심으로 싸우기 위해 연무장에 올라온 검존을 보며, 모용비산은 닿을 수 없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꾸욱
하지만 모용비산은 이내 검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비록 다른 가주들 보다 한 배분이 낮다고는 하나, 그도 어엿이 실력으로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의 가주가 되었다.
이대로 세가의 식솔들에게, 또 관람하고 있는 양민들에게 겁에 질린 꼴을 보여줄 순 없었다.
“시작!”
군자검의 여섯 번째 시작 선언이었다.
모용비산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선수필승(先手必勝)!’
모용비산은 이 비무를 그가 이기든, 지든,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었다.
괜히 길게 끌고 가서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첫수부터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검술을 구사했다.
건곤백절검해(乾坤百絶劍解)
그의 손에서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장 깊이 있는 검술이 펼쳐졌다.
얼마 전 오 성의 깨달음을 얻어낸 그는,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무룡은 틀림없는 검의 귀재다. 여태까지 내가 봐왔던 수천, 수만의 무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지. 하지만, 건곤백절검해는 남궁세가의 검법에 전혀 뒤처지지 지지 않는 검법이다. 만약 오 성의 깨달음만 얻는다 해도, 능히 남궁무룡과 몇 수는 겨룰 수 있으리라.’
연무장에 남궁무룡이 올라온 순간, 모용비산의 계획은 바뀌었다.
‘지더라도, 무언가는 보여주고 지자.’
온 무림에 명성을 떨치는 검존 남궁무룡과 대등하게 합을 나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마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쒜엑-!
모용비산의 검이 빛처럼 남궁무룡에게 쏟아져 간다.
건곤이라는 이름이 붙은 검법답게 하늘과 땅, 음양의 조화를 한 번에 담은듯한 검이었다.
“와아-!”
“역시, 모용세가의 가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무공을 모르는 양민이 보기에도 모용비산의 검은 신묘했다.
분명히 하나의 검이 찔러 들어갈 터인데, 몇 갈래로 갈라지는 것 같이 보였다.
모용비산은 확신했다.
남궁무룡은 분명히 이 검을 튕겨내거나 피해낼 것이라고.
건곤백절검해의 무서움은 그때부터이다.
검을 퉁겨내어도 진드기처럼 적에게 바짝 붙어버리고, 만약 피해버리면 원래 가려고 했던 길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간다.
“허허. 제법이군. 건곤백절검해라.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스윽
남궁무룡이 여유롭게 말하며 지금까지 양팔을 떨구고 아래로 내리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강하게 올린 것도 아니다.
마치 기지개를 켜듯 자연스럽게 들어 올렸다.
‘걸렸다. 이렇게 막으려 들면 그다음은…. 엇?!’
카가가각!
모용비산은 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건곤백절검해는 검이 퉁겨지는 그 힘을 역으로 이용하는 태극의 묘리를 담은 검이다.
그런데 남궁무룡의 검은 모용비산의 검을 튕겨내는 게 아니라, 그의 검을 완전히 멈추게 했다.
“하하. 제법 수련을 했구나. 검술만으로 본다면 자네가 휘 형님보다 훨씬 낫겠군.”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궁무룡을 바라보며, 모용비산은 아버지가 그때 오성만 익혀도 남궁무룡과 합을 겨룰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다음 말을 상기해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 무룡이 발전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내린 추측이다. 뭐, 그 나이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무룡과 한 판 붙으려면 이것만은 확실히 해야 한다. 내가 짠 판을 모두 엎어버릴 만한 변수가 없는지.’
그의 머릿속에 변수라는 말이 스쳐 갔다.
그리고 그 동시에 아까 전 모용청을 이긴 남궁하현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조금 위험할 뻔했군.’
남궁무룡은 얼마 전, 하현과 창궁무애검법을 수련하며 작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을 상기했다.
만약 그때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면, 지금쯤 모용비산과 합을 주고받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도 공격을 허용할 것 같아서 위험했다는 것이 아니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는 모습을 보일 뻔한 것이 위험하다고 한 것이다.
이번 비무에서 남궁무룡의 목적은 단순히 승리가 아니었다.
앞으로 모용세가가 다시는 남궁세가의 위치를 넘볼 수 없도록 최대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이 바로 그의 목적이었다.
덥석!
남궁무룡은 자신의 검으로 제지한 모용비산의 검을 손으로 덥석 집었다.
모용비산은 이런 결과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경악하는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남궁무룡의 손에는 강기가 잔뜩 둘려 있었다.
그랬기에 설사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어도, 손잡이를 잡듯 거침없이 잡아챘을 것이다.
“으윽?”
모용비산이 검을 빼내려 했건만,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은 이리 주게나.”
“어엇?!”
남궁무룡은 모용비산의 손에서 기어코 검을 뺏어내어 저 멀리 목검을 던져버렸다.
“무, 무슨 힘이…! 검존 어르신께서는 무기도 뺏긴 저를 공격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설마.”
휘익-
남궁무룡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자신의 목검마저 저 멀리 집어 던졌다.
그 행동에 둘의 비무를 지켜보던 양민들도, 또 모용세가의 사람들도.
심지어는 남궁무룡에게 검을 잡힌 모용비산마저도 그가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 너무 빨리 끝날 것 같아서 말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이 비무 말일세. 내가 진심으로 검을 들면, 어쩌면 자네가 죽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네?”
“난 자네를 죽일 생각은 없네.”
“그, 그게 무슨.”
“다만,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좀 맞자고.”
까드득
남궁무룡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곤 그 주먹을 그대로 모용비산의 복부에 내질렀다.
퍼억-!
“쿠억!”
모용비산의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떨어질 정도로 강력한 권이었다.
그는 올라오는 욕지기를 겨우 참으며 뒤로 데굴데굴 굴러 남궁무룡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로 도망쳤다.
“모용가주. 내 무림의 선배로서 두 가지만 가르쳐주겠네.”
남궁무룡이 한 걸음씩 다가오며 천천히 말했다.
허나, 모용비산은 고통을 삭이느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첫째. 상대의 수준을 확실히 알고서 덤빌 것.”
빠악-!
남궁무룡은 순식간에 보법을 밟아 모용비산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순간의 고통을 참지 못한 모용비산은 그만 풀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둘째. 상대를 손봐주고자 했다면···. 그건 상대가 공포에 질릴 때까지 해야 하는 거라네.”
남궁무룡의 주먹이 본격적으로 모용비산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퍼억-! 빠직!
“으아악!”
팔을 들어 막아낸다고 막아냈건만, 그 팔이 너무나도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정확히 모용청이 검을 휘둘러 하현을 다치게 한 그 부위였다.
“아참. 꼴사납게 여기서 기권을 하지는 않겠지? 자. 모용세가에도 권법이나 장법이 있을 것 아닌가. 들어와 보게나.”
“크읍! 하아압!”
탁!
털썩!
남궁무룡은 신법을 전개해 들어오는 모용비산의 진로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곳에 다리를 걸었고, 모용비산은 꼴사납게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이런, 자네. 휘 형님께서 이런저런 계책은 잘 가르쳐주셨는데 권법은 제대로 안 가르쳐주셨나 보군?”
남궁무룡이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아, 검존이 취월걸개와 절친인 이유가 있었구나. 아버님께서 저 둘을 조심하라고 하셨거늘……!’
그것이 모용비산이 제정신에서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 * *
일 다경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비무는···. 아니, 일방적인 구타는 계속되었다.
모용비산이 그가 배워온 각종 가전 권법과 장법들을 이용해 남궁무룡에게 달려들었으나, 그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분명히 어떠한 권법이나 장법을 쓰는 것 같지도 않건만, 검존의 타격은 실로 신묘한 수준이었다.
‘와···. 검법을 저렇게 응용할 수도 있구나.’
하지만 하현만은 현재 검존이 어떤 방식으로 무공을 운용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남궁무룡은 창궁무애검법을 권법으로 바꾸어서 모용비산을 구타하고 있었다.
‘하긴, 내가 도법을 검법으로 변환한 것도 가능했으니, 검법을 권법으로 고치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검법들을 권으로 펼쳐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무기의 유무는 엄청난 차이다.
검 대신에 주먹이나 장으로 초식을 펼친다는 것.
말은 쉽지만, 실상은 고려해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하현은 절대로 변할 리 없는 진리 한 가지에 집중하였다.
‘검이란, 결국 손의 연장선에 불과할 뿐이다.’
주먹은 검보다 훨씬 사정거리가 짧다.
하현이 결론지은 그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 발자국을 더 걷는 것.’
주먹이 짧아서 닿질 않는다면, 그만큼 다가가면 될 일이다.
실제로 남궁무룡은 굉장히 여유롭게 모용비산을 상대하는 것 같지만, 보법만은 극성으로 밟고 있었다.
잠시 후, 하현이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을 때, 그는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되었는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후후, 월광권법 정도로 이름 붙이면 될까?’
그리고 하현은 문득 연무장 위를 다시 바라보았다.
퍽- 퍽-
남궁무룡의 발길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용비산의 몰골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비무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깨끗했던 그의 의복은 이제 남궁무룡의 발에 밟히고 채여 더러워진 지 오래였고, 곱게 길러 묶어놓은 머리칼 역시 풀어 헤쳐져 봉두난발이었다.
“그, 그만···. 제가 졌습니다.”
모용비산의 입에서 항복의 말소리가 드디어 흘러나왔다.
그가 이렇게까지 맞아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차라리 하현의 일격에 기절한 모용청처럼 기절이라도 하면 일찍 끝났을 것인데, 남궁무룡의 구타는 실로 신묘해서 고통은 고통대로 느끼지만, 정신은 맞을수록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승자는 남궁세가의 남궁무룡님입니다!”
말할 기회를 보고 있던 군자검의 입에서 승리 선언이 떨어졌다.
“고생 많았네.”
남궁무룡은 출수하던 주먹을 우뚝 멈추어 모용비산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후에 자리로 돌아왔다.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시원한 표정이었다.
모용비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연무장을 내려갔다.
“가주님!”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다들 소란 떨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라.”
패배. 그것도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를 보인 완벽한 패배에 모용비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려 몇 년이나 공을 들여 성사시킨 자리다.
그간 정파답지 못하다거나 비열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까지 감내한 자리.
‘어디서 어긋난 거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연스럽게 남궁세가측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의 비무는 마치 없었던 일이었다는 듯,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허허롭게 웃고 있는 남궁무룡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을 가져갔다.
‘저 아이가 첫 번째 변수였다.’
하현의 존재는 이 계책을 마련한 모용휘도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작년 남궁무룡이 가문전을 수락했을 때 당연히 하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현이 천고의 기재라는 것 역시 익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겨우 열두 살짜리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냐는 안일한 마음이었다.
‘결국, 내 안일함이 모두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변수는 검존 그 자체였다.
그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모용비산은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였다.
그 누구와 싸우더라도 이토록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놀 듯 패배할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다.
‘검존이 화나면 하룻밤 새에 문파 하나를 멸문시킬 수 있다더니…….’
모용비산은 두 눈을 감았다.
이미 그가 져버린 지금 시점에 후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번 비무의 승리는 사승이패로 남궁세가의 승리입니다! 하지만, 기존 합의한 규칙대로 승패와는 상관없이 마지막 비무를 진행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모용비산에게는 이편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관중들은 어느새 연무장 위로 올라온 남궁민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모용세가의 무인을 눈앞에 둔 남궁민의 표정은 평온했다.
비무의 승패는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
조금 전 비무를 하기 전 남궁무룡의 표정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모용세가의 장로 모용주산이네. 비록 오늘은 우리 세가가 졌지만, 이번 비무에서라도 승리를 따가려 손속을 봐주지 않을 생각이네.”
“선배님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남궁민은 무척이나 정중하게 말했다.
모용주산은 왜인지 남궁민의 반응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시작!”
군자검은 지체 없이 시작을 외쳤다.
남궁민과 모용세가의 무사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빠직!
번개가 내리칠 때나 들릴 법한 소리가 들렸다.
빠악-!
“크흡!”
모용주산은 부지불식간에 그를 베고 넘어가려는 남궁민의 검을 겨우 막아내었다.
“어, 언제 거기에!”
남궁민은 어느새 모용주산의 뒤에 도달해 있었다.
비무를 지켜보던 관중들도, 당사자인 모용주산도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남궁민 그의 얼굴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는 다시 뒤돌아 모용주산을 보고는 읊조렸다.
“아직…. 스승님께는 미치지 못하는가 봅니다. 저도 첫수에 끝내려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