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뭐, 뭣이?!”
모용주산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조금 전 남궁민의 말은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를 한 초식 만에 쓰러뜨리려 했다고?”
“제 무공은 섬전. 첫수에 공격을 성공시켜야 더욱 의미가 커지는 무공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실패하고 말았군요.”
말의 내용과는 달리 남궁민의 얼굴은 굉장히 즐거운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대로 일 초식 만에 끝났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 같아 보였을 정도였다.
“청룡신검. 자네가 또래에 비해 월등한 무예를 가진 것은 나도 잘 알겠네. 하지만 이 경험이라는 것을 무시하면 큰코다칠 것이네.”
“부디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그 경험이란 것을 보여주시길.”
남궁민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건만, 모용주산은 어째서인지 남궁민이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해주지. 본신의 힘을 너무 믿으면 안 되는 것일세!”
타다다다-!
모용주산이 두 손으로 검을 꼭 쥐고서는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다른 모용세가 무인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는 남궁민을 결코 그의 아래로 보지 않고,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후웅- 후웅-!
그는 앞으로 계속 전진하며 연신 검을 휘둘렀다.
두 번, 세 번…….
지친다는 단어를 모르는 듯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통에 남궁민도 계속해서 뒤로 빠지며 검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오대세가의 검법이라는 것인가?’
남궁민은 뒤로 빼며 모용비산의 검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아도, 검이 휘둘려지고 난 무방비 상태를 최소화하도록 곧바로 검이 쫓아왔다.
탁-
모용비산의 검을 하나라도 더 알아보려 정신이 팔린 통에 남궁민은 연무대의 끝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벌써?”
그 순간 남궁민은 아주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이기는 방법에는 꼭 무공이 강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네. 비무에서는 상대를 밀어 떨어뜨려도 실격이거든.”
모용비산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아무리 남궁민이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젊디젊은 청년이다.
무공과 무공을 겨루는 비무에서 이렇게 나올 줄 상상도 못 했을 터였다.
“하압!”
모용비산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온몸에 힘을 주어 그대로 남궁민에게 돌진했다.
이대로 남궁민을 밀어 넘어뜨릴 작정이었다.
터억-!
그는 상체를 숙여 어깨로 남궁민의 복부를 때리며, 양손으로는 남궁민의 허리춤을 잡았다.
‘됐다. 완벽하게 들어갔다.’
“하아아압!”
이제는 이 자세 그대로 남궁민을 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흐읍! 흐으읍!”
아무리 용을 써도 남궁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용주산이 온몸에 내력을 둘러보아도, 또 힘껏 발을 굴러보아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아, 아니, 어째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밀던 것을 멈추고는 남궁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도 용을 쓴 탓에 얼굴이 시뻘게진 그와는 달리, 남궁민의 얼굴은 평온했다.
“무슨 짓을 한 게야?!”
“평범한 만근추(萬斤墜)입니다.”
남궁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모용주산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저 말뜻은, 이제 겨우 약관을 지낸 남궁민의 내력의 깊이가 나보다 깊다는 것인가?!’
의식하는 순간, 갑자기 남궁민이 더욱더 커 보이는 착각이 드는 것 같았다.
파앗!
모용주산은 재빨리 남궁민에게서 떨어졌다.
계속 그대로 붙어있다가, 남궁민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굉장히 힘들어지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괴, 괴물인 것이냐?”
모용주산의 말에 남궁민은 대답 대신 아름다운 미소를 돌려주었다.
“이제는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치잇!”
숨을 빠르게 훅 내쉰 남궁민이 진기를 끌어 올린다.
빠직- 빠직-
남궁민의 몸 주위에서 푸른 번개 같은 것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가 한계까지 진기를 끌어올렸을 때의 천뢰제왕신공 특유의 진기였다.
“어딜!”
문득 정신을 차린 모용주산은 남궁민에게 달려들었다.
진기를 모으고 가다듬는 시간을 주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다.
‘더욱 빠르게, 더욱 강하게!’
쒜에에엑!
모용주산은 그가 일생에 냈던 가장 빠른 속도로 남궁민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아주 잠깐 낭패한 것 같은 남궁민의 표정이 스쳐 간다.
‘됐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남궁민을 향해 검을 뻗었다.
검이 남궁민의 코앞에까지 도달했을 때.
콰릉-!
결국, 번개는 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번개는 모용주산을 향하지 않았다.
남궁민은 말 그대로 잠시 사라졌다가, 번갯불과 함께 약 일 장 옆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 어어?!”
모용주산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몰아넣은 덕분에 남궁민은 연무장의 끝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남궁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게 되자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 버렸다.
콰당-
연무장 아래로 꼴사납게 떨어져 버린 모용주산.
그런 모용주산을 향해 남궁민이 연무장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배님. 이기는 방법에는 꼭 무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잘 배웠습니다. 몸소 가르쳐주시니 정말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리곤 뚜벅뚜벅 계단으로 연무장을 내려갔다.
“승, 승자는 남궁세가의 남궁민입니다!”
군자 검의 마지막 승리 선언이 떨어졌다.
총전적 칠 전 오 승 이 패.
남궁세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와아! 자네 봤는가? 나는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했네!”
“내가 살면서 이런 광경을 다 보다니. 내 죽기 전에 이런 장관을 또 볼 수 있겠나?”
“그러게 말일세. 평생 이 광경을 잊지 못할 것이네.”
평범한 양민들은 평생 비무를 볼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수준 높은 비무를, 그것도 연속으로 일곱 번이나 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그들은 만족했다.
“민아. 정말 고생했구나. 멋진 대련이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허허. 정말 날로 발전하는구나. 솔직히 말해서 네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가늠이 안 가는구나.”
“과찬이십니다. 조부님.”
남궁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온 것처럼 평온했다.
“승리를 정말로 축하드립니다. 어르신.”
그때 모용비산이 비척비척 남궁무룡의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심려 끼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뭐, 괜찮네. 그래도 자네 덕에 가족들과 이렇게 나와보기도 하고. 좋은 시간이었네. 자네 몸은 괜찮은가?”
“신경 써주신 덕분에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남궁무룡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의 말대로 모용비산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그의 위신을 위해 남궁무룡은 일부러 얼굴 쪽은 때리지 않았고, 뼈나 근골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고통만 주는 방향을 택했으니까.
“그럼, 저희는 장내를 정리할 테니 먼저 들어가서 쉬시지요.”
“알겠네. 그럼 먼저 들어가네.”
남궁무룡이 일어나자 가족들이 모두 그를 따라갔다.
하현도 숙소를 향해 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와…. 생각보다 더 높았구나.”
아까의 감각이 생생히 떠오르는 듯했다.
목검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맞아본 공격의 아픔.
그리고 마찬가지로 처음 사람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을 때의 그 둔탁한 촉감.
마지막으로 승리하던 순간의 그 고양감까지.
모두 하현 스스로 만들어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왜인지 믿기지 않는듯한 기분이었다.
“하현아! 빨리 와!”
“응. 누나!”
하현은 다시 연무대로부터 뒤돌아 힘있게 걸어 나갔다.
지금 이 순간은 앞으로 그가 무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는 것을 속으로 상기하면서.
* * *
숙소로 돌아오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하현은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환이 형님이랑 소화 누나는 비무에서 져서 그렇다고 쳐도, 민 형님의 표정은 왜 그러실까?’
세 누나 형의 표정이 모두 좋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궁환은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서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더 열심히 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여기서 더? 그런데 또 지고 나서 나는 겨우 이 정도라고 만족할 거야? 하….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하기는 싫은데…….”
하현은 청력에 공력을 집중해 그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분위기가 심각하기에 겨우 참아내었다.
소화의 경우에는 오히려 단순했다.
그녀는 순수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꼭 쥔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히 아까 전의 비무를 복기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현아!”
“응 누나.”
“아까 내가 그 아줌마랑 싸울 때 말이야.”
“아줌마?”
하현이 되물었지만, 남궁소화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은 속으로 그렇게까지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상황에 그 말을 꺼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여튼! 만약 내가 진검을 들고 있었다면 내가 이긴 싸움이지? 내가 발목을 먼저 쳤으니까 말이야.”
“그렇겠지? 한 다리로는 아까처럼 반격하지는 못할 거 아니야.”
“그치?! 그래. 난 사실 진 게 아니야. 무림에서, 실전에서 만났다면 내가 이긴 거라고.”
하현은 소화의 승부욕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데…. 민 형님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아무리 하현이 영특하다고 하여도, 남궁민이 말하지 않는 이상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후우…….”
남궁민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결국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기, 형님이 나가셨는데 우리도 따라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형님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대답이 없어 하현은 고개를 돌려 남궁환과 소화를 번갈아 보았지만, 둘은 지금 하현과 같이 나갈 수 있는 상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에효.”
결국 하현도 작게 한숨을 쉬고는 홀로 남궁민을 따라나섰다.
* * *
사실 남궁민은 이번 비무를 굉장히 기대해왔다.
그의 꿈은 훗날 강호를 주유하며 수많은 고수와 합을 겨루어 보는 것.
현재는 가문의 일 때문에 이룰 수 없어 보이는 꿈이지만, 이렇게라도 다른 세가의 사람과 손속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굉장히 기대해왔다.
“그런데 기대 이하로구나…….”
남궁민은 모용주산과의 첫 합에서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진심으로 한다면, 그를 쉽게 제압해낼 수 있다고.
그래서 일부러 그의 공격을 몇 번이나 받아주었다.
분명히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후우.”
그는 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하지만 이번 비무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임무를 수없이 다녀도, 아직 그렇다 할 고수와는 붙어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임무가 잔챙이들을 상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용청…. 그자가 용봉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고 했었지.’
단 한 번 나가본 용봉지회지만, 후기지수들은 그의 갈망을 채워줄 수 없었다.
그래서 용봉지회도 그 이후로는 참가하지 않았다.
“더 고수와 맞붙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장원에 멋들어지게 꾸며놓은 연못을 보며,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연못이 아닌, 그의 등 뒤에서였다.
“삼 년만 기다리세요.”
“뭐?”
남궁민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하현이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딱 삼 년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형님이 만족할만한 고수가 되어 있을게요.”
“하현아?”
하현은 남궁민이 한 혼잣말을 듣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아 챈듯했다.
남궁민은 순간 부끄러워 귀까지 빨개졌다.
“창피하네…….”
“무인으로서 더 강한 상대와 맞붙고 싶다는 게 어째서 창피한 일이에요?”
“하하. 그래. 네 말이 맞아.”
남궁민은 천성이 겸손해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하현이 남궁민을 가르치는 꼴이 되었다.
남궁민은 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현아. 네가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다.”
“제가 열심히 쫓아갈 테니, 형님도 더 멀리 도망가셔야죠.”
하현의 말에 남궁민이 웃음을 찾았다.
너무나도 당당한 하현의 앞에서, 그는 오래도록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현아.”
“네. 형님.”
“너는 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