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으윽, 써.”
“그걸 왜 생으로 먹어? 그것도 여기에서?”
“하루라도 빨리 먹어야, 하루라도 빨리 강해지지.”
달리는 마차 안에서 백년설삼을 오독오독 씹어먹는 소화를 보며 하현과 남궁환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나 진짜 대단하다.”
“그래. 고마워.”
“할아버지. 누나 저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건 없지. 오히려 생으로 먹는 게 더 흡수가 좋을 수도 있다. 백년설삼은 가진 기운이 비교적 적은 영약이기 때문에 잔뿌리까지 통으로 먹는 경우도 있단다.”
잔뿌리까지 하나하나 씹어먹던 소화가 울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효과가 적어요?”
“하하. 그래도 지금 소화한테는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넵!”
소화는 쾌활하게 대답하고서는 다시 백년설삼과의 전투에 들어갔다.
밝았던 대답 소리와는 달리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남궁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해…. 나는 그냥 삼도 써서 못 먹겠던데. 그치 하현아?”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현은 소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누나. 어때? 좀 느낌이 오는 거 같아?”
“음…. 효과가 있는 거 같아.”
“정말?”
“응 뱃속이 지금 따끈따끈 한 게…….”
하현의 두 눈이 커졌다.
할아버지와 함께 자소단을 흡수했던 때 저런 느낌이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누나! 나 조금만 주면 안 돼?”
“내껀데…….”
하현은 불쌍한 표정으로 남궁소화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몇 초간 바라보던 소화는 결국, 먹던 삼의 뒤쪽을 조금 뚝 분질러 하현에게 내밀었다.
“자. 이만큼 만이야. 더는 못 줘.”
“고마워 누나!”
겨우 오 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였건만, 하현은 싱글벙글 받아들었다.
삼을 입으로 가져가기 직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자소단을 섭취했을 때 같은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끄덕-
할아버지는 하현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설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 같아 보였기에 하현은 안심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독
“으윽 써.”
“그치? 엄청 써.”
“그래도 꼭꼭 씹어먹어야겠지? 씹을수록 더 쓰네.”
그리고 두 남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환은 또 한 번 고개를 내저으며 남궁민에게 말했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니라 쟤네가 이상한 것 같아요.”
* * *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댁까지 모셔드리고 싶습니다만….”
“하하. 괜찮네. 여기까지만 해도 편하게 왔으니.”
남궁무룡이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인 모용주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웃었다.
모용세가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모용주가 그들을 바래다준 것이다.
다만, 심양이 끝나는 지점이 아닌 요녕성이 끝나는 지점까지였다.
최대한 남궁세가 식속들의 편의를 봐주려는 것 같았다.
“읏차. 안 그래도 가만히 마차에만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시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남궁기현이 거대한 몸집을 마차에서 끄집어내자 남궁기철도 바로 그 뒤를 따라 내렸다.
모용주는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모두 내려, 짐을 챙기는 것까지 꼼꼼하게 챙겨준 다음에 다시 남궁무룡의 앞에 섰다.
“편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돌아가게.”
“네. 잠시나마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나 같은 늙은이를 마차 태워 온 것이 무슨 영광인가. 앞으로는 자네가 영광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게.”
“……!”
모용주는 대답도 못 하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남궁무룡을 바라보았다.
“험험. 민망하구만. 그럼 가겠네.”
“네. 검존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모용주가 돌아가고, 출발할 채비를 마친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현재 위치는 내몽고 국경과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오녕성과 하북성이 맞닿아 있는 곳에는 숲이 넓게 이어지기에 올 때는 그곳을 통해서 걸어올 수 있었지만, 마차로는 지나갈 수 없어 부득이 이곳으로 온 것이다.
“할아버지. 우리 돌아갈 때도 팽가에 들리나요?”
맨 뒤에 있던 소화가 종종거리며 가장 앞으로 달려와 남궁무룡에게 물었다.
“왜 그러냐. 팽가에 또 가고 싶어?”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궁금해서요.”
“들리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요?”
남궁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산의…. 그러니까 팽 가주의 성격을 보지 않았느냐. 그에게 잡히면 꼼짝없이 며칠은 눌러앉아 있어야 할게다.”
“아! 맞네요.”
소화는 팽길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여기서 이 길을 따라가면 내몽고지역을 아주 잠시 지나친 후에 바로 하북으로 들어가게 된단다. 북경은 아예 들리지 않고 바로 서쪽으로 가서 산서성으로 들어갈 것이야.”
“산서요? 산동으로 안 가고요?”
“그래. 우리가 올 때는 여행 겸해서 작은 길로 위주로 왔지 않니? 산동성에는 산도 많고, 볼거리도 많으니까.”
“그랬죠?”
남궁소화는 오면서 봤던 기암절벽이나 폭포 등을 떠올렸다.
정말 생각해보니 올 때는 거의 산길 위주로 온 기억들 위주였다.
“산시까지만 가면 산서부터 하남, 안휘성까지 쭉 대로로 이어져 있단다. 우리는 그 길을 타고 돌아갈 것이다. 걷다가 힘들면 마차를 타고, 괜찮아지면 또 걷고 이렇게 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잘 알았어요. 고마워요. 할아버지!”
소화는 꾸벅 인사하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쪼르르 돌아갔다.
남궁무룡은 그런 소화가 귀여워 허허 웃어주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 * *
약 한 시진이 지나고, 그들은 내몽고 경계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멈추시오!”
경계지역을 지키고 있는 자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남궁무룡은 능숙하게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다들 고생이 많네. 조금 지나가도 되겠는가? 여행 중인 가족인데, 바로 하북으로 들어가려 하네.”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있소?”
“여기 있네.”
남궁무룡은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목패 하나를 내밀었다.
“헛. 검존 어르신입니까?”
“그래. 내가 남궁무룡이네.”
검존의 명성은 이곳에서도 유효했는지 경계병이 도리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결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여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시국이 어수선해? 무슨 일이 있나?”
“이곳보다 서쪽 국경에서 피바람이 일어 우리 쪽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피바람?”
경계병의 얼굴이 심각한 것을 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무림인의 소행인가?”
“그런 것 같다고 합니다. 저도 소식만 전해 들어서…….”
남궁무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무림인들이 ‘중원’이라고 칭하는 곳에는 내몽고지역이 들어가지 않는다.
쉽게 말해 세외라고 불리는 곳 중의 하나인 것이다.
협조를 구하지 않고, 세외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않기로 한 것은 중원인들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어쨌든 가시는 길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알았네. 고맙네.”
남궁무룡은 무언가 떠오르는 듯했으나, 갈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남궁무룡은 말없이 걸었다.
아니,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속도를 낼 것이니 잘 따라오거라.”
“네. 아버님.”
그러다 이제는 아예 신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신법 수련에 효과가 있었는지, 그렇게 느린 속도가 아니었음에도 소화나 남궁환도 뒤처지지 않고 잘 뛰어갔다.
- 형님. 아버님께서 왜 이러는지 아십니까?
- 나도 모르겠다. 일단 따라가는 거지.
남궁기철과 기현은 전음을 주고받았지만, 서로 영문을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다행히 한참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은 하북성 경계를 코앞에 두고 일어났다.
잘 닦여진 길이 끝나고, 이제 다시 산길에 들어가기 직전.
“멈추어라.”
남궁무룡은 신법을 전개해 달리던 모두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저 앞을 보아라.”
남궁기철은 눈에 공력을 집중해 앞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길 양옆의 풀을 보아라.”
“아……!”
다시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엔 풀들이 누군가에게 짓밟혀 모두 누워 있었다.
“매복이군요.”
남궁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과거를 떠올렸다.
‘아까 전 경비병들의 말도, 지금 이 상황도. 그때와 같다.’
그가 생각한 과거는 약 30년 전.
한창 마교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도 마교의 주구들은 이런 방식으로 무림맹에 큰 타격을 입힌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서장이었지.’
좀 더 정확히는 운남성에서 곤륜의 협조를 얻어내고, 청해성으로 가는 와중이었다.
그때 당시 사천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기에 서장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교는 서장의 양민들을 모두 도륙하곤 그들을 기다렸다.
‘지금과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
육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림을 주유한 노고수의 육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곧 싸움이 있으리라는 것이 본능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가 바라보고 있던 나무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몇 명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붉은 색으로 일색이었다.
“크크크…. 남궁 늙은이. 못 본새 눈치가 늘었군.”
그가 입을 열자 비릿한 혈향이 풍기는 듯했다.
그는 남궁무룡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마치 오랜만에 친우를 만난 것 같이 반가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혈….랑?”
남궁무룡이 말을 더듬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있어서는 안 될 곳에 그가 있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만 것이다.
“남궁무룡!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네놈이 여기에 어떻게 와 있는 것이냐! 최근 마교가 다시 활동하는 정황은 포착했건만, 그게 바로 너였나?”
“마교가 아니라, 천마신교다.”
채형석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운을 끌어올리자 그의 주변에 마교 특유의 마기가 일렁였다.
그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뒤를 따라 몇 명의 핏빛 무복을 입은 자들이 더 튀어나왔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냐. 마교가 다시 활동한다고 나에게 친절히 말해주러 온 것은 아닐 테고.”
“크크. 그 입은 여전하군. 속으로는 그 거지보다 더하면서 겉으로는 점잔을 떨고 있는 그 입말이야.”
채형석은 스르륵 자연스럽게 도를 꺼내 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궁무룡의 손에도 어느새 검이 들려있었다.
“크윽.”
그때 하현의 머리에 손을 대며 비틀댔다.
“하현아! 괜찮아?!”
“으, 응 괜찮아 누나.”
소화가 깜짝 놀라 하현을 부축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저 사람들은 또 누구고.”
“마교다. 혈랑 채형석이라는 놈이지.”
남궁무룡의 말투가 싸늘했다.
식솔들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말투.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 검존의 말투였다.
“이 기운…. 느낀 적이 있어.”
“뭐?! 언제?”
“그날에……!”
하현이 그냥 그날이라고 했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그날이 언제인지 알았다.
신가장이 멸문하던 날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군소방파의 일은 마교에서 한 짓이 확실하군.”
남궁민도 검을 빼어 들며 말했다.
검이 푸른빛을 내며 반짝였다.
스르릉-
두통이 가셨는지 어느새 자세를 잡고 일어선 하현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하현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다른 식솔들도 모두 검을 뽑고 채형석을 경계했다.
남궁민의 어깨너머로 그들을 보고 있던 채형석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동안 소꿉놀이는 즐거웠나?”
“그 목의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었나 보군.”
“그땐 내가 어렸지. 지금의 너는 늙었고.”
채형석은 뒤의 혈검대원들에게 손짓하며 외쳤다.
“혈검대! 이제는 너희 할 일을 해라! 이 늙은이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
진기를 담은 목소리인지,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생포는 이 늙은이 하나면 충분하다. 모두 죽여라.”
“존명!”
열 명의 혈검대원들은 남궁무룡을 지나쳐 식솔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특히 남궁기철과 남궁기현만을 노골적으로 노리면서 들어갔다.
채앵-!
병장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퍼졌다.
혈검대원이 튀어 들어가며 휘두른 검을 남궁기현이 앞으로 나서며 여유롭게 막아낸 것이다.
남궁무룡은 한달음에 손주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혈랑 채형석이 그의 앞을 떡하니 막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두고 어딜 가시려고 하시나? 우리, 못 푼 은원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남궁무룡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무엇을?”
“무림 군소방파들의 멸문.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채형석이 희번뜩하게 남궁무룡을 노려보았다.
“그때처럼 나를 쓰러뜨려 봐라. 혹시 아는가? 내가 말해줄지도.”
“금방 말하게 될 것이다.”
남궁무룡은 어느새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고, 채형석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순간적으로 공간이동을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신속한 신법이었다.
쒜에엑-!
남궁무룡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남궁기철의 섬전 만큼이나 빠른 검격.
하지만, 채형석은 그 움직임에 반응해냈다.
그는 반사적으로 도를 들어 올리며 남궁무룡의 검을 막아내었다.
카앙-!
남궁무룡의 검과 채형석의 도가 부딪히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