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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60화 (60/304)

60화

하현은 떨어진 혈랑의 목을 잠시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이것은 강호의 흔해 빠진 생사결의 평범한 결말일 뿐이었으니까.

스윽

하현이 고개를 돌려 전장을 훑어봤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전장에 하현만이 숨 쉬는 듯한 감각이었다.

심지어 무림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그의 조부 검존마저 이 상황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모습이었으니까.

하현의 검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팟!

하현은 땅을 박차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혈검대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사고가 정지된 듯 얼빠진 표정을 하고 하현을 바라보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날아오는 검을 막아내었다.

카앙-!

병기끼리 부딪히는 쇳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네놈들의 주인이 죽었다!”

남궁기철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일부러 웅혼한 내력을 가득 담아 소리 지르듯 모두의 뇌리에 깊이 박히는 목소리였다.

꽈릉!

남궁기철의 발걸음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남궁기철은 원래 있던 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혈검대원의 지척에서 나타났다.

푸학!

푸른 뇌전이 감도는 그의 검이 혈검대원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혈랑이 어린아이에게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는지, 변변찮은 반격도 못 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하압!”

남궁환이 그의 아버지를 도우려는 듯, 남궁기철과 대치하고 있던 또 다른 혈검대원에게 달려들었다.

그 덕분에 남궁기철은 나머지 혈검대원들과 이대일의 상황이 되었다.

셋으로도 동등한 싸움이었을진대, 일대일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남궁기철의 무공은 섬전(閃電)의 무공.

남궁기철은 순식간에 남은 혈검대원을 정리했고, 곧이어 남궁환이 겨우 버티고 있던 나머지 하나도 손쉽게 베어냈다.

콰앙-!

터지는듯한 큰 소리에 남궁기현을 돌아보니, 남궁기현은 이미 둘을 상대로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하현은 단 한 명 남은 혈검대원과 동등하게 검을 나누고 있었다.

아직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검존과 남궁민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있는 소화를 보며, 남궁기철은 하현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 급작스러운 혈전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 * *

잠시 후.

혈랑을 포함한 이곳에 왔던 모든 이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최대한 생포하여 무언가 정보라도 캐내고 싶었건만, 남궁기철이 하현을 도와 혈검대원의 몸에 검을 박아넣은 순간, 남궁기현과 싸우던 나머지 둘이 손쓸 새도 없이 자신들의 가슴에 소도를 박아넣어 자결해버렸다.

그러나, 그것에 아쉬워할 틈도 없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할아버지!”

“민아. 너는 괜찮으냐!”

싸움이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들은 남궁무룡과 남궁민에게 달려갔다.

“나는 괜찮다. 아주 약한 내상을 입었을 뿐이야.”

“저도 괜찮습니다. 상처가 그리 깊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바보처럼 방심하고 말았습니다.”

미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남궁무룡과 달리, 남궁민의 표정은 참담했다.

십육 세에 강호에 나서서, 처음으로 입어보는 큰 상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의 속을 더 쓰리게 만드는 것은 순간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일이었다.

태산이라고 생각했던 조부가 쓰러진 모습을 보자, 감정의 동요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괜찮다. 소화가 처치를 잘했구나. 움직이지 말고 있어라.”

“네. 아버지.”

둘의 대화가 끝나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식솔 모두는 자연스럽게 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하다. 하현아.”

그 침묵을 깬 것은 남궁무룡이었다.

그는 진심을 담아서 하현에게 말해주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현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혈랑과 그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남궁무룡과 혈전을 벌이며 모든 기운을 소모했고, 혈랑이 하필 그 순간에 하현에게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다. 마지막의 한 수는 정말…. 대단했어.”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궁무룡은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현의 능력이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

항상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싸우는 것.

그것보다 더한 재능이 있을까?

“형님. 사람을 부르러 갔다 오겠습니다.”

남궁기현이 남궁기철을 향해 말했다.

현재 상황으로는 남궁무룡과 남궁민이 당장은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고, 또 언제 적의 증원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이곳에서 북경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팽가로 갈 생각입니다.”

남궁기철은 주변을 둘러다 남궁민을 흘끗 보고는 대답했다.

“내가 갔다 오마. 내가 더 빠를 테니.”

“그래도…….”

“괜찮다. 너는 내가 갔다 오는 동안 이곳을 정리하고, 아버님과 민이를 보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궁기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형의 의도가 무엇인지 느꼈기 때문이다.

남궁민은 남궁기철의 제자이지만, 그 전에 남궁기현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하북팽가에 갔다 오겠다고 했으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남궁민에 대한 걱정이 어려있었다.

“그럼 다녀오마.”

남궁기철은 남궁무룡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고는 곧바로 출발했다.

그가 떠난 직후, 남궁기현은 남궁환과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하현은 야영할만한 곳을 찾아 불을 피웠다.

남궁무룡은 그곳에 앉자마자 내상을 다스리려는지 운기조식에 들어갔고, 소화는 남궁민의 다리에 금창약을 바르고 잘 동여매어 주었다.

그리고 하현은 혈랑이 죽으며 마지막에 내뱉었었던 말이 묘하게 뇌리를 스쳤다.

‘이, 이것은 소교주의……?!’

그 목소리는 틀림없는 경악의 목소리였다.

그가 하현에게서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현의 검이 그의 목을 지나갈 때보다 오히려 그 말을 할 때 더 놀란 표정이었다.

허나 죽은 사람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지금은 알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현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검을 다시 넣지 않고 호법을 섰다.

이 의문이 언젠가는 풀릴 것이라 생각하면서.

* * *

남궁기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겨우 해가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하북이 코앞이라고는 하나, 왕복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속도였다.

“아…! 도제(刀帝) 어르신. 팽용소!”

남궁기철은 홀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양옆에는 거대한 덩치의 도제 팽길산과 팽용소가 함께였다.

남궁기현이 그들에게 훌쩍 뛰어가 그들을 맞이했다.

“무룡, 무룡은 괜찮은가?”

“네. 조금 전에 운기조식을 마치시고 잠시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후.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괜히 깨우지 말아라. 잠시 기다리면 되니.”

팽길산은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는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앉으며 물통을 열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남궁기현은 팽길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남궁기철에게 다가갔다.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다. 별일은 없었고? 아버님은 좀 어떠시냐.”

“정확한 상황은 두고 봐야겠지만, 회복만 잘하시면 별일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민이는?”

“상처 부위가 제법 크긴 하지만, 힘줄이나 뼈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민이도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탈 없이 회복할 것 같습니다.”

남궁기철은 이 말을 모두 듣고야 안심이 되는 표정이었다.

“아버님은 주무신다고 했지? 민이에게 잠시 가봐야겠다.”

“네. 형님.”

남궁기현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이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팽용소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남궁기철과 팽길산을 따라오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는지, 온몸은 땀범벅에 아직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기현은 그에게 하현이 물가를 발견해 떠온 시원한 물을 건넸다.

팽용소는 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 고맙네. 가주님과 자네 형님을 쫓아오느라 죽을 뻔했네.”

“와 주어 고맙네. 자네만 온 건가?”

팽용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네. 우리 팽가의 무인들이 뒤따라 오고 있네. 두 분이 워낙 빠른지 나만 겨우 따라왔고 나머지는 천천히 오라고 일러두었네. 아마 한 시진 정도는 더 걸릴 것이야.”

“그래서 도제 어르신께서 저렇게 여유로운 것이군. 원래 저렇게 느긋한 분이 아니신데 말이야.”

“하하. 그렇지. 마차도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우리 무인들이 들것을 가지고 오고 있네. 검존 어르신과 청룡신검은 걷기가 힘들 것 같다고 해서 말이네.”

“고맙네. 자네도 좀 쉬게나.”

남궁기현은 며칠 전 처음 우정을 나눈 팽용소가 자기 일처럼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 몹시도 고마웠다.

잠시 휴식을 취한 팽길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혈랑 채형석의 시신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남궁기현이 정리해서 얇은 천을 덮어둔 그의 시신은 마치 잠을 자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파랗도록 창백한 안색과 목에 간 붉은 선만 제외한다면.

“맞군. 채형석이다.”

팽길산은 한눈에 그가 혈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마교와 전쟁할 당시, 팽길산과 혈랑은 사용하는 애병이 도(刀)로 같다는 이유로 무림에서 수많은 비교를 받았었다.

전장에서는 수없이 얼굴을 보긴 했지만, 둘은 단 한 번도 직접 도를 맞대어 본 적은 없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남궁무룡이 팽길산을 패퇴시켰고, 바로 곧바로 무림맹이 정마대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이 끝나 싸워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 자와는 꼭 붙어보고 싶었거늘. 삼십 년 전에도 무룡이 이 자의 목을 꿰뚫어 기회가 없었거늘, 결국 무룡에게 이렇게 죽어버렸군.”

“어르신. 이 자의 목을 벤 것은 아버님이 아닙니다.”

“뭐?! 그럼 누가……?”

“하현입니다.”

“하현이가?!”

도제는 적잖게 놀란 얼굴을 했다.

하현의 눈부신 재능은 그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현재의 하현은 혈랑과 비교 대상도 아니다.

그는 전대부터 활약하던 초고수.

자신이나 남궁무룡, 취월걸개와 같은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였으니까.

“자세한 건…. 무룡이 일어나면 말해주겠지.”

“네. 그러실 겁니다.”

팽길산은 덮여있던 천을 다시 덮었다.

그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채형석은 분명 적 일진데…….’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와 그의 가족들을 해하려다 죽은 자인데, 어딘가 허한 느낌이 들었다.

‘또 이렇게 내 시대의 무인이 하나 갔구나.’

물론 그 죽음이 애석하다거나 동정이 간다거나 하는 감정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자신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이 최근 들어 조금씩 실감이 아는 도제였다.

“그러고 보니, 하현이는 어디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 보니 아이들과도 같이 없던데 말입니다.”

“내가 찾아보지. 자네는 무룡 옆에 있다가 깨어나면 말해주게나.”

“네. 어르신.”

팽길산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분명 영특한 아이이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소리라도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의 민감한 기감이 반응했을 것이다.

화아아-

팽길산이 기운을 밖으로 끄집어내며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저기 있군.’

그러다 그는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작지만은 않은 기운을 발견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하현의 기운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하는게지?’

그는 혹시 몰라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그 기운을 따라갔다.

수풀이 우거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

그는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수풀을 지나가자 작은 공터가 하나 나타났고 그 공터의 한 가운데에는 하현이 서 있었다.

처억

하현은 두 눈을 감고 검을 앞으로 드리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하현도 기감이 예민한 편이라, 그가 여기까지 왔다면 분명 알아챘을 터인데 어찌나 집중하고 있는지 그가 온 것도 모르는 것으로 보였다.

팽길산은 잠시간 잠자코 있기로 했다.

아니, 오히려 방해될까 싶은 마음에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기까지 했다.

스윽

그가 잠시 기다리자 하현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현의 검이 져가는 석양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횡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또 횡으로, 또 횡으로…. 그저 옆으로 휘두르는 것만 같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도제 팽길산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법(刀法)이다.’

하현은 검을 쥐고 있지만, 검을 쥐고 있지 않았다.

파지법부터 손목과 어깨의 사용까지.

지금 그는 한 자루의 도를 다루는 도수(刀手)였다.

검은 횡으로 움직일 때마다 빛을 뿌렸다.

하늘의 석양빛을 받을 때는 하늘로 솟구치는 듯하였고, 땅의 기운을 받을 때는 또 땅으로 내리꽂는 듯하였다.

이내 검이 하늘과 땅에 선을 긋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갈 때쯤.

츠츠츠-

하현의 검에 안개무리 같은 것이 조금씩 뭉쳐가기 시작했다.

“허업!”

이 광경에는 천하의 도제도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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