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63화 (63/304)

63화

“엇?! 알던 분이야?”

“응. 저번에 왔을 때 우연히 알게 됐어. 그때도 이 근처에서 만났었는데.”

앵앵은 하현이 친근한 듯 말하는 게 기분 나빴는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 유춘이라는 분은 괜찮으세요?”

“공자의 기습에 머리가 깨진 유춘 말씀하시는 거라면 지금은 괜찮습니다. 덕분에 깨어나서 혹독하게 수련하고 있습니다.”

하현은 앵앵의 말에 가시가 돋친 것이 느껴졌다.

“다… 행이네요. 하하하.”

“하현아. 이분은 누구신데?”

앵앵은 팽주은이 거리낌 없이 하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두 눈이 커졌다.

“여기는 진주언가…….”

앵앵이 하현의 말을 가로채며 자신을 소개했다.

“진주언가의 앵앵이라고 합니다. 언가주님의 막내딸 언영의 호위이기도 하지요. 소저가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진주언가 분이시군요. 저는 팽가주님의 손녀 팽주은이라고 해요.”

“도제님의 손녀……!”

앵앵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과 팽주은을 번갈아 보았다.

하현은 ‘오늘은’ 잘못한 게 전혀 없음에도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뒤로 몇 발자국을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하하하.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경단 식기 전에 빨리 가져다주셔야죠. 주은아 가자.”

“응!”

하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팽주은을 부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현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앵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보기에는 하현과 팽주은이 굉장히 가까워 보였던 것이다.

앵앵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주변에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런, 화화공자 같으니라고.”

“예?”

하현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반문했지만, 앵앵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신형을 날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팽주은이 하현을 보고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하현아. 너 저 사람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오늘은 없는데…….”

“오늘은 없다는 건, 저번에는 있다는 뜻이야?”

“으응, 내가 오해 때문에 저 사람의 수하를 때려서 기절시킨 적이 있거든.”

하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팽주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수로 사람을 때려? 너 무서운 애였구나?”

“아, 그게 정말 오해였는데.”

“아무리 오해라도 그렇지 어떻게 기절까지 시켜?”

“그게 말하자면 긴데…. 됐다. 빨리 들어가자. 어른들이 찾을라.”

하현은 말을 하려다 말고 팽가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왜.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주라!”

하현은 귀찮다는 듯 발걸음을 빨리했지만, 집요하게 쫓아오면서 물어오는 통에 하현은 결국, 그날에 일을 설명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팽주은은 깔깔 웃었다.

“아까 그분이 그랬던 게 이해가 가네.”

“난 정말로 걔가 쫓기는 줄 알았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상황도 안 물어보고 냅다 검…. 아니지, 몽둥이를 휘두를 줄 누가 알았겠어.”

팽주은은 어찌나 재밌는지 집까지 오는 동안 쉴새 없이 웃어댔다.

그렇게 웃고 떠들던 그들은 어느새 하북팽가의 현판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그리고 하현은 그 현판 아래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어! 휘연 형님!”

“하현이구나!”

하현은 재빨리 달려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을 맞았다.

남궁휘연은 남궁규현과 청룡각 동기이기도 하고, 나이고 거의 동년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남궁규현과 달리 남궁휘연에게는 형님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소식 들었다. 가주님께서 급히 찾으셔서 말이야.”

“할아버지는 안에 계실 거예요.”

“그래. 이제 막 도착해서 문을 두드린 참인데, 마침 너를 만났구나.”

남궁휘연은 하현을 보고 미소 지어주었다.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장하다.”

“아닙니다. 저도 부지불식간에…….”

그는 하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의 머리를 잔뜩 헝클였다.

“으이그. 이 애늙은이. 현아, 좀 더 자유로워도 된다.”

“자유로워요?”

남궁휘연이 무언가 대답하려 할 때, 하북팽가의 문이 열렸다.

“청풍검이시오?”

“네, 그렇습니다.”

“검존 어르신께 오실 거라는 얘기를 들었소. 들어오시오.”

남궁휘연은 하북팽가의 무인을 뒤따라 들어가며 말했다.

“현아. 조금 이따가 얘기하자. 가주님을 뵙는 게 우선인 것 같다. 여기 숙소에 있는 거지?”

“네. 형님.”

“알겠다.”

하현은 새삼 어제 있었던 일이 큰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어지간해서는 표국의 일 이외에 무림에는 관여하지 않는 남궁휘연까지 불렀을 정도라면.

‘순간적인 보법은 백부님이나 내가 제일 빠르겠지? 하지만, 먼 거리를 달리는 신법은 휘연 형님이 제일이란다.’

하현은 언젠가 남궁민이 해주었던 말을 기억하며 팽주은과 하북팽가로 들어갔다.

* * *

휘연이 팽가에 오고 난 후로도 벌써 나흘이나 흘렀다.

남궁휘연은 하현에게 이따가 얘기하자고 해놓고서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얼굴 볼 새도 없었다.

하현 역시 딱 이틀만 쉬고서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다만, 육체를 움직이는 수련을 곧바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혈랑과 맞붙었던 그 날을.

‘아, 뭔가 알 것 같은데…….’

그런데 하현은 계속해서 지금의 상황이 불만족스러웠다.

마치 안개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하현은 자신이 그때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드르륵-

하현이 한창 고민에 빠졌을 때, 누군가 들어왔다.

하현은 누군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보나 마나 팽주은일테니까.

그녀는 이제는 마치 제 방인 마냥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현을 찾아오곤 했다.

“현아.”

“주은아 맘대로 문 열고 들어오지…. 형님?”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장본인은 남궁환이었다.

그 옆에는 소화도 함께였다.

“이제는 몸 좀 괜찮아?”

“어제도 말했잖아. 몸은 원래부터 괜찮았다니까?”

소화는 하현의 침상에 척 걸터앉았다.

“현아. 우리 집에 간대.”

“그래? 언제?”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은 출발한다는데?”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하북팽가에 있을 수는 없으니, 곧 집에는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응. 아빠가 말 해주셨거든. 아참. 그리고 이것도 아빠한테 들었는데, 이제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마교가 다시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탐사대를 꾸릴 거라고 하더라고.”

“탐사대?”

“응. 이전까지는 물증은 없이 심증만으로 마교의 잔당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한 증거가 있잖아?”

소화가 말하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은 혈랑의 목이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마교가 활동함을 선포한다고 하나 봐.”

“그래?”

하현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혈랑이 마교의 고수라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만약 이렇게 마교를 다시 찾아낸다면, 혹시나 알게 될 수도 있다.

‘우리 신가장이 왜 멸문해야 했는지.’

하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림맹을, 할아버지를 믿고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교와 관련된 것을 알게 되면 꼭 그에게 가르쳐주겠다는 할아버지의 말 역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휘연 오라버니가 그 탐사대의 일원으로 가게 될 거 같아.”

“그렇구나.”

하현은 남궁휘연이 청룡표국도 뒷전으로 하고 여기까지 온 이유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한 번도 찾아오지도 못할 정도로 바빴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남궁세가에서 그만큼 중원의 지리와 정세에 빠삭한 이도 없을 테니.

“엇! 소화 언니! 환 오라버니도 계시네요.”

그때 팽주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 마음대로 열고 들어오지 말라니까…….”

“헤헤. 미안.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다음부터는 안 그런다는 게 벌써 며칠째거든.”

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팽주은은 혀를 쏙 내밀고는 웃으며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었어요? 언니?”

팽주은이 남궁소화에게 바짝 붙으며 말했다.

그녀는 하현과 친해진 것만큼, 소화와도 친해졌다.

둘 다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홍일점인 데다가 나이도 한 살 차이여서 서로 공감할 바가 많았다.

“주은아. 그렇지 않아도 이제 너한테 찾아가려고 했는데.”

“왜요? 무슨 일인데요?”

“우리…. 집에 갈 거래.”

“헙!”

팽주은은 생각도 못 한 말을 들었는지 깜짝 놀라 숨을 크게 들이셨다.

“언제요?”

“오늘이나, 내일?”

“그렇게 빨리요?”

팽주은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며칠만 더…. 아니, 딱 이틀 밤만 더 있으면 안 돼요? 제가 할아버지한테 말해볼게요.”

“우리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야 한다고 하셔서 따라가야 해.”

소화는 겨우 한 살 차이건만, 울먹거리는 팽주은을 제법 어른스럽게 달래주었다.

“주은아. 울지 마. 이번에 가더라도 또 금방 올게. 아니면 주은이가 남궁세가에 한번 놀러 오면 되잖아? 팽가…. 팽 오라버니도 볼 겸.”

주은은 눈물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네. 언젠간 꼭 찾아갈게요.”

팽주은이 소화에게 와락 안겼다.

소화는 하현에게 찡긋 눈짓을 줬다.

빨리 팽주은을 위로하는 데 한 마디라도 말을 보태라는 눈짓이었다.

하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 주은아.”

“응?”

소화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팽주은이 하현을 돌아보았다.

정말 울기 직전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얼굴이었다.

“있잖아.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어.”

“해자…. 뭐?”

“회자정리.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기 마련이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뜻인데…….”

찌릿

남궁소화가 하현을 향해 타오를 듯한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아, 이게 아닌가. 그러니까. 결국, 영원한 이별도 없다는 뜻이지.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고.”

“으응.”

팽주은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이 어려운 말을 꺼낸 것이 도리어 팽주은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였다.

남궁소화가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하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용봉지회에서 만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용봉지회?”

하현의 말에 팽주은은 자연스럽게 말로만 들어왔던 용봉지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림 각지의 후기지수들이 모여 서로 친분을 다지고, 실력을 선보이는 곳.

온 무림의 선남, 선녀들이 만나는 장이라고도 들어왔던 그 용봉지회를 하현이 말하자 팽주은은 울먹임을 뚝 그치고 당차게 말했다.

“응! 용봉지회에서 만나!”

그녀의 눈은 언제 눈물을 흘리려 했냐는 듯 반달로 휘어져 웃음 짓고 있었다.

남궁소화와 남궁환은 하현에게 제법이라고 표정으로 말했다.

하현이 이렇게 완벽하게 주은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맞다!”

그런데 하현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했다.

“뭐야?”

“그런데 주은아.”

“왜?”

“너, 용봉지회에 나올 수 있을까?”

“당연히 나갈 수 있지. 그건 왜?”

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내 생각에는 힘들 거 같은데? 내가 알기로는 어지간히 무공이 고강하지 않으면 용봉지회에 참가도 못 하는 거로 알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네 무공이 그닥…….”

“뭐라고?!”

팽주은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그녀의 옆에 있던 남궁환이 자기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을 정도였다.

“아, 아니. 주은아. 그게 아니고!”

깜짝 놀란 소화가 주은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미 팽주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었다.

“두고 봐! 내가 너 가만히 안 둘 거니까! 삼 년 뒤 용봉지회에서 봐. 그때 꼭 봐!”

팽주은은 이 말만 남기고는 문을 쾅 닫고 방을 나가버렸다.

하현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 문만 바라보았다.

“쯧쯧…. 내 이럴 줄 알았지. 에효…….”

남궁소화가 한숨을 푹 쉬면서 혀를 찼다.

“웬일로 네가 그렇게 말을 잘하나 했다. 넌 감정이라는 게 없니?”

“아니,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됐어! 주은아!”

소화는 하현을 한심하게 바라봐 주고는 팽주은을 따라 방을 나갔다.

하현은 아직 그의 옆에 있는 남궁환을 슬쩍 바라보았다.

남궁환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하현에게 말했다.

“현아. 내가 보기에도 이번 건 좀 심했어.”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

남궁환은 대답 대신 하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었다.

몇 시진이 흐르고.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팽가의 현판 앞에 섰다.

얼마 전 모용세가로 떠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늘도 그때처럼 팽길산과 팽용소가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하현은 팽주은이 나오지 않았나 고개를 기웃기웃했지만, 팽주은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길산. 요 며칠 정말 고마웠네.”

“뭘 이런 걸 가지고. 자네 내상이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 조금 더 있다 가지 그랬나.”

“거의 다 나았네. 세가를 너무 오래 비웠어. 이제는 돌아가야지.”

두 노고수는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별이란 수십 년간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남궁무룡은 배웅을 받으며 발걸음을 떼내었다.

“자. 정말 집으로 가자.”

“네. 아버님!”

“네. 할아버지!”

그들은 비로소 남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남궁무룡의 말처럼 정말 그들의 집으로.

덧붙이는 이야기.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떠난 이후로, 하북팽가의 가장 안채에 있는 연무장은 밤이 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밤중에 북경을 지나간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저 멀리서 하…. 누군가를 타도한다는 말이 들렸다는 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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