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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64화 (64/304)

64화

하현이 남궁세가를 떠날 때는 꽃과 나비가 완연한 봄이었다.

그리고 다시 안휘성에 발을 들인 지금은 매서운 추위가 불어오는 겨울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일을 겪은 하현은 출발할 때보다 키가 한 뼘 정도나 더 자랐다.

“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쉬어가자꾸나.”

안휘성에 진입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남궁세가가 위치한 성도 합비까지는 또 꼬박 하루는 가야 하기에 그들은 객잔에 짐을 풀기로 했다.

“안휘에 있는 객잔에 머문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집에 온 것 같습니다.”

“하하. 코앞이긴 하지.”

남궁무룡은 먼저 객잔으로 휘적휘적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뒷모습이지만, 남궁기철만은 그 뒷모습이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혹시……?’

조금 더 유심히 보자 미세하게 오른쪽 다리를 끄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평생을 봐온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안 들어올 게냐?”

그가 제자리에 서서 생각하고 있자, 남궁무룡이 뒤를 돌아 의문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아, 아닙니다. 들어갑니다.”

재빨리 남궁무룡의 뒤를 따른 그를 따라 나머지 식구들도 객잔에 들어갔다.

* * *

그날 밤.

남궁기철은 남궁무룡이 오늘 머물기로 한 방 앞에 섰다.

객잔에 남는 방이 세 개였기에, 남궁무룡이 혼자 한방을 쓰고, 남궁기철과 기현이 한 방을.

나머지 손주들이 큰 방 하나를 쓰기로 했다.

“아버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들어오너라.”

남궁기철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의복도 갈아입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남궁무룡이 맞이해 주었다.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여쭐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남궁무룡은 대답 대신 남궁기철을 잠시 바라보았다.

“…….”

잠시의 침묵.

하지만, 곧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넌 이미 알고 있었구나.”

“저도 긴가민가했었습니다. 혈랑 때문입니까?”

“맞다. 정말 한 끗 차이였다.”

남궁무룡은 잠시 그때를 떠올렸다.

혈랑의 기세는 정말이지 무서웠다.

30년 전 그는 채형석과 싸움에서 그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히고 패퇴시켰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채형석과 비교하면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그자는 진원지기까지 모두 끌어다 썼기에 그런 신위를 보인 것 아니겠습니까?”

남궁기철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남궁무룡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래도 삼십 년 동안 무슨 수련을 한 것인지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더구나. 비단 채형석 그자뿐만 아니라,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마교의 고수들이 그렇게 강해졌다고 생각한다면…….”

남궁무룡의 미간이 좁혀졌다.

비록 혈랑과의 전투에서 얻은 내상도 모두 회복하지 못했지만, 마교에서 그 누가 튀어나오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는 그였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고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을 때다.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하.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느냐.”

“우리 정파의 힘을 믿으시지요.”

“정파의 힘?”

남궁기철이 맑게 웃었다.

“물론 그때 저는 어린아이였지만, 삼십 년 전의 일은 저도 익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비교한다면, 정파의 힘도 크게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성장이라…….”

남궁무룡은 어느새 중년을 바라보는 그의 아들을 다시 한번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히 무인 역할을 할 수 있을법한 늠름한 자태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도 작은 깨달음을 얻어 진일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녀석. 그것도 알고 있었던 게냐?”

남궁무룡은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하현을 떠올리고 있었다.

혈랑과의 마지막 합을 겨룰 때, 조금만 깨달음이 모자랐더라면 이기기는 어떻게 이길 수 있었다고 쳐도, 아마 지금보다 더욱 큰 피해를 입고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현이 만들어준 그 작은 깨달음이 그를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그러니 아버님 혼자서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저랑 기현이가. 그리고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남궁기철이 남궁무룡의 손을 꼬옥 잡았다.

정말 오랜만에 잡아보는 아버지의 손.

어렸을 적엔 그렇게 크고 따뜻한 손이었건만,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작아지고 거칠어졌다고 생각했다.

“허허…….”

남궁무룡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미 모용세가의 가주를 맡은 냉혈검 모용비산과 비슷한 연배의 큰아들이건만, 그를 너무 어리게만 보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모용휘 형님께서 세상의 일을 내려두고, 은거하신 것도 이해가 가는군.”

“아버님께서는 아직 머셨습니다. 부족한 아들들과 세가 식구들을 위해 조금만 더 현역으로 있어 주셔야 합니다.”

남궁무룡은 조금은 놀란 눈으로 남궁기철을 보았다.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그의 아들이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줄 몰랐다.

남궁기철도 그 눈빛을 느꼈는지 조금은 낯이 부끄러웠지만, 그는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하하. 그래. 조금 더 힘내보마.”

남궁무룡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크게 웃었다.

그는 가끔은 이렇게 다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큰아들과 이렇게 얘기해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말해 주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아야겠구먼.”

“네. 제가 바라는 것도 그것입니다.”

남궁무룡이 빙긋 웃었다.

“그래, 민이는 좀 괜찮고?”

“네. 도제 어르신께서 주셨던 금창약이 효과가 굉장히 좋아서 상처가 이미 거의 아물었습니다. 다행히 후유증은 전혀 없습니다.”

남궁민은 최근 큰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다시 수련해도 좋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다행이구나. 그러면 바로 임무에 나가는 것도 문제는 없겠지?”

“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렇게 급한 임무라면 제가 직접 갔다 와도 됩니다.”

남궁무룡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하. 아니다. 네가 가서 될 일이 아니야.”

“그게 무슨……?”

“자. 이것을 보아라.”

남궁무룡이 웃옷을 슬쩍 걷어 남궁기철에게 복부를 드러내었다.

“헛! 아, 아버지!”

남궁기철이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남궁무룡의 복부에는 죽은 채형석의 저주라도 되는 듯, 시뻘겋고 기다란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채형석의 도격을 따라 새겨진 듯한 그 상흔은 그날의 싸움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마기(魔氣)다.”

남궁무룡은 옷을 다시 내리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보이는 대로 정말 지독하지. 이 마기는 운기조식으로도 몰아내기 힘들고, 내상도 잘 낫지 않게 한다.”

남궁기철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걸개가 종종 마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어째서 ‘더러운 마기를 풀풀 풍기는 것들’이라고 표현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 상흔은 치유되지 못하는 겁니까?”

“하하. 그건 아니다. 이게 치유되지 못하는 거였다면, 지금쯤 내 몸은 마교놈들이 새겨놓은 흔적으로 빼곡했을 거란다. 몸에 칼침을 몇 번이나 맞았었으니.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일반적인 상처가 한 달이 걸린다면 마기에 더럽혀진 상흔은 족히 육 개월은 간단다.”

남궁무룡의 말투는 어디에서 넘어졌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으나, 그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면 민이의 다리는 어째서 괜찮은 겁니까?”

남궁기철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도 남궁무룡과 같이 혈랑에게 당했었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채형석은 그때 모든 마기를 나에게 쏟아내고, 원천진기만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원천진기란 즉 생명의 기운. 그 기운에까지 마기가 침투하진 않았던 게지. 채형석이 만약 마공의 극의에 달해 마신의 경지에 올랐다면 그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말이다.”

남궁무룡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기철을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내가 이골이 나서 보기에는 이렇다만 그다지 심각한 상황도 아니고, 치유를 앞당길 방법이 있으니까.”

“치유를 앞당길 방법이 있는 겁니까?!”

남궁기철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 제일 좋은 치유 방법이 있다.”

“무엇입니까?”

“영단이나 영약을 섭취하는 것이다. 영약이나 영단으로 채워진 자연의 기운이 마기를 몰아내 주거든.”

“그러면 어찌 보면 간단하군요. 당장이라도 청룡표국에 영약을 구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아니다.”

남궁무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영약은 그만큼 효과도 적다. 그나마 자소단이 구하기 쉽다고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소단도 소용이 없다. 자소단은 뜨거운 기운을 가지고 있거든.”

“그러면 어떤 영약을 구해와야 합니까?”

“자연 그대로의 기운을 담고 있다는 공청석유나…. 소림의 영약이다.”

남궁기철은 소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영약을 말했다.

“대환단, 소환단이로군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참 절묘하게도, 마기를 몰아내는 데에는 소림의 영약이 최고거든.”

“그런데, 소림의 보물이라는 그것들을 쉽게 내놓겠습니까? 특히나 대환단은 황제도 구하기 힘들다고 하는 것 일진데.”

남궁기철의 의문은 타당했다.

소림의 은인이라고 하는 자만 구경할 수 있다는 소림의 보물.

아무리 검존의 내상을 치유하기 위함이다만, 맡겨놓은 것처럼 달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하하하. 생각해둔 방법은 있지만. 쉽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방법입니까?”

“기다려 보거라. 방법은 자연스레 찾아올 테니.”

남궁기철은 남궁무룡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설명해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나도 이제 쉬어야겠구나.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야지.”

“네. 드디어 돌아가는군요.”

“그래. 정말 긴 여행이었구나.”

남궁무룡의 눈앞에는 수 개월간의 여정이 스쳐 갔다.

그리고 그는 맑게 웃음 지었다.

“정말로 좋은 여행이었어.”

* * *

다음 날.

그들은 드디어 남궁세가에 돌아올 수 있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네. 할아버지.”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건만, 남궁세가는 변한 것 하나 없이 있는 그대로였다.

그들이 없는 동안에도 세가에 남아있는 식솔들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 쓸고 닦으며 장원을 유지한 덕분이리라.

오랜만에 보는 장원 식구들과의 긴 인사를 마친 그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왔다.

“집이 편하다 그러던데, 역시.”

하현은 그가 쓰던 방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꼈다.

오래 비워뒀건만, 방에는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았고, 침상 한쪽에는 예전처럼 깨끗한 의복이 고이 개어져 있었다.

“장칠 아저씨…….”

하현은 이 모든 장칠의 배려를 느꼈다.

그는 분명 하현이 없을 때도 매일같이 방을 청소해주고, 의복을 준비했을 것이다.

“나중에 장칠아저씨한테는 좋은 선물이라도 해드려야지.”

하현이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칠은 하현이 이렇게 키가 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예전과 같은 크기의 옷을 준비해 두었고, 그 옷을 입자 손목과 발목이 모두 드러날 정도로 짧았다.

그래도 하현은 오늘은 이 옷을 입고 있기로 했다.

장칠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기에.

“장원이나 한번 돌아볼까.”

하현은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풀어놓고는 다시 방을 나섰다.

오랜만에 돌아온 장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에.

남궁세가의 겨울은 추웠다.

하지만, 이제 제법 많이 들어찬 내공은 추위마저 막아주었다.

평화로움.

하현은 장원을 둘러보며 평화로움을 느꼈다.

불과 두 달 전, 혈랑과 그토록 치열한 싸움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현은 이곳에서만큼은 이 고요함이 계속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 고요함은 빨리 끝나버렸다.

하현이 대문 앞을 지나갈 때였다.

쾅쾅쾅-!

쾅쾅쾅-!

누군가 대문을 부서져라 두들기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문을 닫았나! 어째 아무도 없는 게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남궁세가의 모든 무사가 오랜만에 돌아온 남궁무룡에게 인사하러 자리를 비운 것으로 보였다.

“에잇! 그냥 담을 넘어버리든가 해야지!”

하현이 문을 열어주려고 했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훨씬 빨랐다.

그는 삼 장이나 되는 거대한 높이의 담을 마치 계단 하나 오르는 것처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가 담을 넘는 순간, 하현과 눈이 마주쳤다.

“스, 스승님!”

“하현아!”

그는 취월걸개였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도착한 지 겨우 한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그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는! 고매하신 검존께서 마교의 빨간 강아지한테 물려서 저세상 구경을 하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오지 않고 배길 수가 있나.”

“네……?”

취월걸개는 자신이 말하고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혼자서 박장대소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왜인지 신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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