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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66화 (66/304)

66화

하현은 당장이라도 떠나자는 취월걸개를 겨우 말렸다.

최소한의 준비는 하고 떠나야 하니까.

그래서 그들은 내일 곧바로 떠나기로 했다.

하인에게 이 소식을 남궁민에게 전하도록 부탁한 뒤, 하현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다시 챙기려 침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기 입으로 몇 번이나 바쁘다고 했던 취월걸개가 하현이 침소까지 따라온 것이다.

“스승님. 여기 앉으세요.”

“됐다!”

취월걸개는 의자나 침상이 아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여 자신 때문에 하현의 침상이 더러워질까 걱정한 것이다.

개방의 누구라도 취월걸개가 이렇게 남을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면 기겁할만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스승님. 바쁘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바쁘긴 한데, 무림의 대소사보다는 나의 대소사가 더 중요한 법이거든.”

하현이 쿡쿡 웃었다.

취월걸개가 정말로 저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제 하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대의 것도 알고 있다.

저 말이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을.

“주원대사님이랑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내기는 또 뭐고요.”

“그 망할 땡중 녀석. 말코도사놈도 똑같아!”

“말코…. 무당의 유엽진인 말씀하시는 거 맞죠?”

하현이 가볍게 물어봤을 뿐인데 취월걸개는 주먹을 꽉 쥐며 분개했다.

“그래! 내 평생에 그놈들한테 꿀리는 거 하나 없었는데, 딱 하나 꿀리는 게 있다.”

“뭔데요?”

“제자!”

취월걸개가 콧김을 흥! 하고 내뿜었다.

그는 평생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자를 둘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기준에서 제자를 둔다면, 적어도 몇 년은 진득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주원 그 땡중은 제자가 넷이나 되고, 그 제자들의 제자가 열셋이나 된다.”

“와. 많네요.”

“소림이 원래 쪽수가 많거든. 그리고 유엽도 마찬가지. 그놈은 제자가 하나뿐이긴 한데, 그 하나 있는 제자 별호가 검성으로 불린다지.”

“아! 들어봤어요. 호북제일검!”

하현의 반응에 취월걸개가 인상을 팍 썼다.

“호북제일검은 무슨! 지 스승보다 못한 놈이!”

“와…. 유엽진인께서 그렇게 강해요?”

“그래. 무룡이한테는 못 미치지만 유엽이 그놈이 칼을 잘 다루긴 하지. 나보다는 쬐금 약하지만.”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헛기침하면 턱수염을 두어 번 쓸고는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고놈들이 나이를 먹으니까 무슨 어른이라도 된 것마냥 굴더라 이 말이다. 걸핏하면 자기네들 제자를 자랑하고, 나는 제자가 없다고 무시하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자 하현도 취월걸개의 맞은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분통을 내던 취월걸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현은 걱정 어린 얼굴로 그보다 여든 살이나 많은 취월걸개를 나무랐다.

“그렇다고 해도, 체면이 있으신데 그렇게 싸우기까지 하시면 어떡해요.”

“나도 처음부터 싸우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땡중이…….”

“주원대사님이 왜요?”

취월걸개의 얼굴이 조금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 그러니까. 고놈이 정도를 모르고 심한 말을 하는 게 아니겠냐.”

“뭐라고 하셨길래 그러세요.”

“나는 제자가 없어서 내 깨달음이나 공부는 다 무위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자식도 없어서 후사를 이을 수도 없고!”

“심하게 말씀하긴 하셨네요…….”

취월걸개가 하현의 말에 격하게 긍정했다.

“그렇지?!”

“네. 아무리 친한 친우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속상하셨겠어요.”

하현은 진심으로 취월걸개를 위로하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취월걸개는 하현의 손이 닿을 때 순간 몸을 움찔하긴 했지만, 굳이 손을 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주원에게 느꼈던 분노가 재현되고 있었는데, 그 응어리가 눈 녹듯 사르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흠흠. 그 땡중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제자를 받으라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겠느냐.”

“그렇죠.”

하현은 이 상황에 쿡쿡 웃을뻔했지만, 겨우 참아내었다.

그 자신도 어린아이지만, 눈앞의 취월걸개는 정말 어린아이 같았다.

주원대사가 처음부터 취월걸개를 욕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자를 들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다 보니 앞선 말을 꺼낸 것인데, 이미 취월걸개가 거기서부터 분개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대화가 되었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럼요? 뭔가 또 있었어요?”

“내가 그…. 제자라고 부를 만한 아이가 있다고 했더니 그게 무슨 제자냐고 무시를 해서…….”

하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취월걸개에게 제자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를 들이셨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요?”

취월걸개는 헛기침을 뱉으며 망설이듯 말을 뱉었다.

“흠흠. 그, 일단은 뭐. 어찌 되었든. 우리 방파는 아니지만, 나를 스승이라고 불러주기도 하고…….”

문득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하현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그래! 네 녀석 말이다.”

취월걸개는 부끄러운지 되레 큰소리를 쳤다.

하현은 그가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스승 소리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도.

하현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보다 더욱 크고 진한 환한 미소를.

“누가 뭐래도 저한테는 정말 스승님이세요. 제가 얼마나 많은 걸 배웠는데요. 아니, 애초에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무사히 이곳에 올 수도 없었을 거예요.”

“때잉! 그건 아닐 거다. 네가 얼마나 똘똘한 놈인데. 시간은 걸렸을지언정 여기까지는 잘 왔을 게 분명해.”

하현은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예전에 마을에서 길을 잃어 울고 있던 아이를 달래준 적이 있었다.

마치 그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왜 다른 제자를 안 받으신 거예요?”

“흠…. 말 하고 싶지 않다.”

“왜요. 말해 주세요. 궁금해요.”

취월걸개의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가 펴졌다.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말하기 부끄러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으음…. 그러니까. 널 만나기 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널 만나고 나서는 누구도 성에 안 차서 아무도 제자로 못 받아들이겠더구나.”

“하하…….”

하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은 자신 때문에 제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면 제가 스승님에 진짜 제자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너한테는 이미 무룡이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무슨 사부란 말이냐.”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들어보니까 다른 문파에는 몇 명의 사부가 공동으로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그… 런가? 그렇군! 청성에 진미화소도 스승이 셋이었지! 그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구나!”

기쁜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취월걸개는, 곧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 이전에 너는 개방의 제자가 아니지 않으냐…….”

“하긴 다른 문파에는 속가제자가 있는데. 개방에는 그런 게 없군요. 하긴 거지가 되어야 입방할 수 있으니까…….”

“속가제자!”

취월걸개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현은 그 표정이 왠지 무섭다고 느꼈다.

“그래! 지금까지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지?”

“그, 그렇죠?”

“개방의 방규에 속가제자를 두면 안 된다는 문구는 내 평생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면 결국 우리 용두방주에게 허락만 맡으면 되는 일 아니겠냐?”

“그렇게 간단한 일일 리가…….”

취월걸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간단하진 않지. 아무리 개방이 거지소굴이라고 해도, 방주가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시행하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러면 스승님은 어떻게 하시려고……?”

“하지만 나한테는 간단하지!”

“예?”

취월걸개가 큭큭 웃기 시작했다.

“나는 방주님을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거든.”

취월걸개는 갑자기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스승님! 지금 어딜 가시는…….”

“무룡이한테 간다. 나도 네 사부 할 거라고 해야지.”

“지금 당장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 시간을 끌 이유는 무엇이냐? 무룡이만 괜찮다 하면 바로 개방에 다녀오마.”

하현은 취월걸개를 위로하려 꺼낸 말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갈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럼 금방 다녀오마!”

“스승…! 님…….”

하현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않고, 취월걸개는 쌩하니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취월걸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신법을 극성으로 운용하여 실로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하하…….”

하현은 어이가 없어 그냥 웃어버렸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린 하현은 할아버지의 숙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하현도 남궁무룡의 침소에 도착했을 때쯤.

휘익-!

그의 옆에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제법 고강해진 무공 덕분에 뛰어난 안력을 가진 하현이 제대로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빠른 움직임.

하지만, 하현은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취, 취월걸개 스승님!”

바람이 우뚝 멈춰 섰다.

그제야 그 신형이 똑바로 보였다.

하현의 예상대로 취월걸개였다.

“오냐. 하현아. 이 ‘스승’은 빨리 개방에 좀 다녀오마. 그 후에는 바로 숭산으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아 참! 수련할 거면, 내력을 일 점에 응축시키는 수련을 하고 있거라! 십팔나한진. 그거 생각보다 별거 아니니까!”

취월걸개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또 신법을 전개했다.

잠깐 숨 몇 번 쉴 사이에 그는 이미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현은 사라져버린 취월걸개를 잡으러 갈 수는 없었기에 남궁무룡의 침소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오냐. 하현아.”

남궁무룡의 침소 문은 벌컥 열려있었다.

아무래도 취월걸개가 나오면서 문도 닫지 않고 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 방금 취월걸개 스승님께서…….”

“그래. 들었다.”

“그러면 허락하신 거예요?”

남궁무룡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허락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러면요?”

“넌 나의 손자이자, 제자이지만…. 내 소유물은 아니지 않으냐.”

“네?”

“널 진심으로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둘이든 셋이든 더 받아들이는 건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궁무룡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취월걸개만큼 그 성정과 무공의 고강함을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더욱 환영이지.”

하현은 남궁무룡이 한 말이 더욱 찡하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서운함도 느껴졌다.

그런데 그 마음이 마치 읽히기라도 한 듯이 남궁무룡이 하현에게 다가가 가볍게 끌어안아 주며 말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하현이 너는 내 소유물은 아니지만, 나의 소중한 손자이자, 하나뿐인 제자란다. 이제는 내가 취월과 경쟁해야겠구나.”

“무엇을요?”

“네가 나보다 취월걸개를 더 믿고 따르지 못하도록 더욱 잘해야겠다는 소리다.”

“저는 그래도 할아버지가…. 첫 번째일 겁니다.”

“그러냐? 하하하!”

남궁무룡은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껄껄 소리 내 웃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구나 하현아.”

“무엇이요?”

“취월걸개는 평생을 자유롭게 살았다. 제자 같은 건 구속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 그렇기에 이 나이까지 제자 하나 없이 홀로 살아왔던 것이다.”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취월걸개가 너를 이렇게 가르치고 싶어 안달이 났더구나. 나는 취월의 그토록 간절한 눈을 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취월걸개는 그가 이런 부탁을 한 것이 남궁무룡임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약 주원대사나 유엽진인이었다면 이 일은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고맙구나.”

“저는 별로 한 게 없는데…….”

남궁무룡은 하현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눈빛은 손주나 제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그의 가장 친한 친우가 자신만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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