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67화 (67/304)

67화

취월걸개는 평생을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그 역시 지금껏 살아남은 무림인들처럼 평범한 천재였다.

남들보다 무공을 습득하는 속도가 몇 배나 빠르고, 남들보다 전투 감각도 뛰어났다.

한때는 차기 용두방주의 자리인 후개(後丐)였던 적도 있었다.

물론, 절대 개방의 방주를 극구 사양했기에 그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오십 년 전.

그의 나이 마흔이었을 때 그때 당시 개방의 용두방주는 취월걸개를 조금 더 엄하게 다스리려 했다.

무공 실력으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개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때인데 무림을 주유하는 것에만 몰두하던 그였으니까.

그런데 그때 정사대전이 일어났다.

사도의 무리는 양민들을 수탈하지 못하게 하고, 항상 무림의 질서를 위해 그들을 통제하려던 정파 측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때 신성처럼 등장한 다섯 협객이 있었다.

남궁세가의 검존 남궁무룡.

하북팽가의 도제 팽길산.

소림사의 주원대사.

무당파의 검제 유엽진인.

그리고 개방의 취월걸개.

원래부터도 친한 친우였던 그들 다섯은 정사대전에서 말 그대로 일당백의 활약을 펼치며 사도를 척결해갔다.

처음에는 숫자에서 압도당하던 정파였건만, 이 다섯 고수를 위시한 정파세력이 분전을 펼치며 결국 정사대전에서 승리해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당대 개방의 방주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취월걸개의 정신을 차려주려는 계획은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선정된 방주는 취월걸개와 같은 날에 거지가 된 자였다.

쉽게 말해 동기.

그 역시 취월걸개를 잘 설득해 어디 한 곳에 마음 붙이도록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취월걸개는 20년을 도망 다녔고 결국, 정마대전이 발발했다.

정마대전은 정사대전과는 또 다른 양상이었다.

절대적인 고수의 수는 적지만 숫자가 압도적이었던 사도와는 달리 마교는 숫자 자체는 적었지만, 하나하나가 무서운 고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취월걸개를 위시한 다섯은 찬란한 활약을 펼쳤다.

이십 년 전 정사대전때의 그들보다 한층 진일보한 모습으로 마교의 고수들을 차례로 꺾어 나갔고, 그 결과 마교를 와해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또 개방의 방주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그 덕에 다음 방주. 그러니까 현재의 용두방주인 천애신개(天愛神丐)가 방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취월걸개보다 한 배분이 낮은 개방도였다.

그리고 취월걸개는 온 무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바.

결국, 취월걸개에게 훈계를 할 수 있는 거지는 이 세상에 남지 않은 것이다.

휘이익-

깊은 밤 하남성 개봉에 때아닌 광풍이 불었다.

정확히는 개봉에 있는 개방의 총타에서.

그 바람은 거지들이 기거하는 크고 작은 움막들의 위를 건너갔다.

탓 탓 탓

그 바람은 취월걸개였다.

그는 움막들의 위를 아주 가볍게 밟으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흔히 말하는 초상비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은 경이로운 신법이었다.

움막에서 잠을 자는 거지들은 무엇이 지나가는지 느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이놈들. 언젠가 혼쭐을 내줘야겠구만. 일결이나 이결 제자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삼결부터는 무림밥 꽤 먹었다는 것들이 머리 위를 이렇게 뛰어다니는데도 못 알아채?!’

개방의 제자들이 들으면 경악했을 내용을 취월걸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림 일절이라는 그의 신법을 알아채는 건 절정고수들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 것 따위 그에게 알 바 아니었다.

거지소굴을 한참을 더 들어가자, 절벽과 맞대어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움막 하나가 나왔다.

취월걸개는 그 움막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

샤샥-

스윽-

그때 그가 가려던 길목을 두 명의 거지가 나타나 그를 가로막았다.

둘 다 허리에 여섯 개의 매듭이 메어져 있었다.

“멈추시오!”

“이 뒤는 못…. 장로님?”

“지환. 노삭. 잘 있었느냐.”

취월걸개는 그 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육결 매듭은 개방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속한다.

개방의 방도들이 직접 신망이 두텁고 무공이 뛰어나며 정의로운 자를 선출하여 개방도들이 규율을 지키는지 확인하고, 또 그 판결과 집행을 담당하는 법개(法丐)가 육결 제자이며, 또한 용두방주나 후개의 호위를 담당하는 자들에게 육결을 하사한다.

“장로님께서 예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개방의 장로가 방의 총타에 온 것이 잘못되었느냐?”

취월걸개가 인상을 쓰자 노삭이 두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아! 절, 절대 아닙니다. 평소에 장로님께서 이곳에 발걸음을 잘하시지 않기에 여쭤본 것뿐입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가 싶어서요.”

“흐음…. 그래?”

“정말입니다.”

취월걸개가 의심쩍은 눈으로 노삭을 위아래로 훑어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주께서는 침소에 드셨는가?”

“아직입니다. 조금 전까지 연무장에 계셨습니다.”

“그래? 잘 되었군. 깨우지 않아도 되겠어.”

말이 연무장이지 그저 넓은 공터에 불과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무공을 수련하곤 했으니 연무장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 밤중에 방주님을 뵈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는 겁니까?”

지환이라 불린 거지가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총타에 그렇게 불러도 오지 않고, 다른 제자들을 시켜 소식만 전하던 취월걸개가 여기까지 온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희한테 말할만한 것은 아니다. 나 방주님 뵈러 들어간다?”

“네. 알겠습니다.”

취월걸개는 그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주의 움막으로 날 듯이 뛰어갔다.

“방주님. 취월걸개입니다.”

움막 앞에서 말하는 그의 음성은 사뭇 진중하고 예의 발랐다.

예의 같은 것은 모를 것처럼 보이는 취월걸개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보다 더 배분이 낮은 방장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장로님?”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곧 한 명의 무인이 나왔다.

보통의 무인들처럼 탄탄하고 근육질의 몸이 아닌, 옆집 아저씨마냥 푸근한 몸매에 동그랗고 선한 눈을 가진 사내였다.

방주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 옷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거지들과 똑같이 봉두난발 한 머리에 누더기를 입고 있지만, 그에게서는 심오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 보였다.

“장로 취월걸개. 용두방주님을 뵙습니다.”

취월걸개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누군가 보면 정말이지 충실한 심복으로 보일만 한 태도였다.

“장로님…? 여기에는 어쩐 일로…. 아니, 무섭게 저한테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라니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방주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예의 있게 인사를 올린 것뿐인데.”

“그러니까요. 그게 무섭다는 겁니다. 평소처럼 대해 주세요. 평소처럼!”

취월걸개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빙긋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럴까요?”

“네. 제발요.”

취월걸개가 킬킬 웃었다.

“방주님.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는 방주님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제가 하고 싶으신 임무만 하도록 배려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주님께서 정말 바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천애신개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이 밤중에…….”

“그러니까! 본론만 말하겠다는 겁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천애신개의 두 눈이 흔들렸다.

취월걸개는 부탁이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종종 부탁이라고 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을 가지고 왔었기 때문이다.

‘이십 년 전에는 뭐라더라…. 정마대전에서 피해를 입은 양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발견했다고, 은자로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이 거지 소굴에서 은자를 열 냥이나 뺏어가셨었고…. 십 년 전에는 앞으로 일 년에 한 번 하는 총타 모임에 앞으로는 참가 안 하고 싶다고 하셨고…….’

천애신개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뿐인데 지끈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말씀해보시지요.”

“제자를 받아들일까 합니다만.”

“제자요?!”

천애신개는 그가 잘못 들었나 싶어 자기도 모르게 귀를 후벼팠다.

그런데 귀에서는 귀지만 나올 뿐이었다.

“네.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은 아이가 생겼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열심히 키워보고 싶어서요.”

“경, 경사로군요! 장로님의 진전을 이을 수 있다면 우리 개방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천애신개는 지금까지의 두통이 한 번에 싹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취월걸개에게 제자가 생긴다면 그의 역마살이 조금은 누그러지리라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허락을 받으시는 겁니까? 제자를 받아들이시고, 나중에 말씀만 해주셔도 될 것을. ‘부탁’이라고까지 하시면서.”

애석하게도 천애신개는 취월걸개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그저 평범하게 제자를 받아들인 게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취월걸개가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주님. 우리 개방도 더욱 진일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발전은 좋은 것이지요. 그 방법이 문제지만.”

“그래서 제안하는 건데, 우리도 속가제자를 받아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속가제자요?!”

용두방주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팽팽히 돌기 시작했다.

용두방주는 개방이라는 무림 최고 정보조직의 수장이다.

용두방주의 자질로는 고강한 무공은 기본이오, 각종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명석한 두뇌와 그런 정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 역시 중요한 자질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질들이 모두 검증되어 지금의 이 용두방주의 자리까지 올라있는 것이다.

그는 기억 속에서 한 가지 이름을 떠올렸다.

“혹시 남궁…….”

“하하하! 이미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남궁하현이라는 아이를 가르쳐보고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천애신개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검존 어르신의…….”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룡이랑은 벌써 이야기가 다 된 사항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속가제자를…….”

“방규 어디에도 속가제자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말은 없지요. 하현이가 잘 성장하여 무림에 이름을 날린다면 우리 개방의 이름도 같이 날릴 것입니다. 이 거지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취월걸개는 마치 준비해온 듯 천애신개의 질문을 탁탁 잘라먹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듯 보였다.

“하아…….”

천애신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취월걸개가 하고 싶다고 말한 순간 이미 이야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방규에서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취월걸개는 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든 해냈으니까.

“그럼 몇 가지 조건을…….”

“말씀하시지요!”

“먼저, 속가제자이니만큼 장로님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후개의 자격은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취월걸개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개의, 그리고 용두방주의 자리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던 그였다.

“두 번째. 제자이니 모든 것을 다 전수해주시겠지만, 항룡십팔장만큼은 전수하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취월걸개가 이번에도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룡십팔장은 원래 용두방주의 무공.

그는 전전대 용두방주가 죽기 전 후개에게 전해달라며 구결을 일러주었기에 그도 알게 되었던 것이지, 애초에 항룡십팔장은 하현에게 가르칠 생각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아무리 속가제자라고는 하나 우리 개방의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우리처럼 거지꼴을 하라는 소리는 않겠으나, 정식으로 입방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취월걸개의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했다.

잠시 후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주님. 그건 안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제가 봐온 그 아이는 남궁세가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어렵게 자리 잡은 아이입니다. 제 이기심에 그 아이의 처지를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그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닌, 정말 오랜만에 보는 취월걸개의 진중한 얼굴이었다.

천애신개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취월걸개가 말했다.

“다만, 남궁세가가 관련되지 않은 일에서는 개방의 소속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사부의 사문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시지요.”

그는 말이 끝남과 함께 방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역시 아까의 장난이 아닌 진심이 느껴졌다.

“허허…. 장로님…….”

천애신개는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아주 잠시 생각하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장로님게서 하시는 일이니 알아서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조만간 그 아이를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아이길래 장로님을 이토록 홀렸는지 보고 싶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조만간 데리고 오지요. 분명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취월걸개의 얼굴에서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평생 그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본 천애신개는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