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취월걸개가 떠난 지도 이틀이 흘렀다.
‘스승님께서 왜 오시질 않지?’
떠날 때는 곧바로 돌아올 것 같았던 그였건만,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통에 하현은 취월걸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평소와 똑같이 수련하며 할아버지에게 물어봤을 땐
‘취월걸개는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란다. 방주에게 허락을 받지 못했으면 지금쯤 떼를 쓰고 있을 것이고. 방주에게 허락을 받았으면…. 소림과 무당에 자랑하러 갔을 것이 분명하다.’
라고 말하고는 걱정하나 하지 않았다.
하현도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해 주자, 비로소 마음을 놓고 다시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무애(無涯)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 해보아라.”
“네. 할아버지.”
남궁무룡은 겉으로는 괜찮은 듯 보였지만,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혈랑이 심어놓은 마기가 조금씩 빠지고는 있었지만, 자연히 치유되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빨리 취월걸개 스승님이 오셔야 소림에 갈 텐데요.”
“아마 곧 올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나름대로 좋구나.”
“어떤 것이요?”
“내공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말이다.”
남궁무룡의 활짝 웃었다.
무림인 검존으로서가 아니라, 노인 남궁무룡의 웃음이었다.
“내공이 없어지니 나는 그저 평범한 늙은이일 뿐이더구나. 그런데 그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게 좋았다.”
그는 조금은 침울한 표정의 하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래도 빨리 회복하셔야죠…….”
“그것도 맞다. 내가 좋다는 건 어쩌다가 한 번 해보니까 좋다는 거지. 이렇게 살고 싶다는 건 아니니까.”
그는 하현을 보며 눈을 찡긋했고, 하현은 쿡쿡 웃었다.
“할아버지. 그러면 십팔나한진을 깰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제가 열심히 준비해볼게요.”
“십팔나한진을 파훼하는 방법이라…. 솔직히 말해 방법은 아주 많을 수도 있단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그 방법을 다 일러주기를 원하느냐?”
잠시 생각하던 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제가 혼자서 해볼게요.”
“하하. 그래. 이것 마저도 네가 발전하는 계기로 삼거라.”
“네! 할아버지. 그리고 만약 내기에서 저 때문에 진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아프다는데 주원대사님께서 하나는 주시지 않을까요?”
“하하. 그래. 주원이 생각보다 정이 많은 친구란다.”
남궁무룡은 기특하다는 듯 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단서를 주마. 내력을 일 점에 응축하는 법을 알게 되면, 좀 더 수월해질 것이다.”
“아……!”
취월걸개가 떠나며 해준 것과 같은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볼게요!”
“그러려무나.”
남궁무룡은 하현을 두고 먼저 연무장에서 빠져나갔다.
하현은 할아버지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린 후에 다시 검을 세웠다.
‘내력을 일 점에 응축한다라…….’
그저 일 점에 힘을 다해 찌르라는 뜻은 아닐 것이었다.
이미 하현의 실력으로 한 점을 연속해서 찌르는 것은 눈을 감고도 가능한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온몸의 내력을 한 번에 쏟으라는 건가…….’
하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그는 소환단을 꼭 가져오겠다고 다짐하며 검을 휘둘렀다.
* * *
중원에서는 흔히들 다섯 개의 명산을 가리켜 오악(五岳)이라 칭한다.
그중에서도 중원의 중심부인 하남성에 위치하여 중악(中岳)이라 불리우는 숭산의 중턱에는 거대한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소림사(少林寺)가 그것이다.
“헥, 헥. 아이고. 힘들다. 이 땡중들은 이걸 오르락내리락하려면 힘들지도 않나.”
천하의 취월걸개라 해도 처음부터 소림까지 뛰어 올라가지는 못했다.
사실, 어젯밤 안휘에서 개봉에 있는 개방 총타까지 달려간 다음 방주와 하현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아냈고.
그리고 한 시진 정도만 잠시 숨을 돌리며 용두방주와 대화를 나눈 다음 또 곧장 하남 등봉에 위치한 숭산까지 달려오느라 힘든 것이었다.
보통 사람, 아니. 어지간한 무인은 생각도 못 할 거리를 단 이틀 만에 주파한 것이다.
“주원 이놈 자식. 나를 무시했겠다?”
하지만 취월걸개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주원대사는 한평생을 그가 제자를 들이지 않은 것을 가지고 놀려댔다.
한 오십 살 때부터 그래왔으니, 벌써 사십 년간 같은 소리를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내공이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나, 올라가서 쉬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숭산의 초입부터 소림사까지는 계단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소림은 무림 방파로서도 정파제일문(正派第一門)으로 통하지만, 일반 양민들에게도 명망 높은 사찰로 통했다.
그래서 소림의 승려들은 수련의 일환으로 나무를 깎아 산의 초입부터 계단을 하나, 하나 손수 쌓았다.
그 덕에 이 이른 아침에도, 취월걸개는 수많은 불자(佛者)들을 지나쳐야만 했다.
‘이 사람들은 주원의 실체도 모르고.’
취월걸개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도 인상이 써졌다.
이 사람들은 분명 주원대사를 고매하고 불심 깊은 승려로 알고 있을 테니까.
그가 속으로 꿍얼거리며 한참을 더 올라오자, 눈앞에는 거대하고 붉은 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벽 한가운데에 있는 현판에는 소림사라고 적혀있었다.
드디어 소림사에 도착한 것이다.
“드디어 도착했군. 도대체 몇 년 만이야?”
그는 어림짐작으로 약 이십 년 정도는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문인 개방 총타에도 들리기를 싫어하는 취월걸개다.
게다가 소림은 향냄새가 너무 심하다며 거의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무당에는 곧잘 가곤 했지만.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 승려가 취월걸개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직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겉보기에는 누가 봐도 거지이건만, 거지가 구걸하러 이 높은 산을 탔을 리는 없으니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조금은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취월걸개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듯했다.
“흠흠. 사람을 만나러 왔네.”
취월걸개가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승려는 그사이에 취월걸개 허리의 매듭을 발견했다.
칠결.
그는 평생 본 적도 없는 일곱 개의 매듭이었다.
하지만, 그는 칠결이 개방의 장로를 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미타불. 취월걸개 장로를 이제야 알아뵈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엥? 우리가 구면이던가?”
“그건 아닙니다. 이곳까지 홀로 오실 개방의 장로님이시라면 취월걸개 장로님일것이라 유추한 것입니다.”
“호오. 제법 똘똘하구만. 자네. 이름이 뭔가?”
“원진이라는 법명을 쓰고 있습니다.”
본디 취월걸개는 후기지수에게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현을 제자로 맞이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는 자연스럽게 그를 하현과 비교했다.
‘하현이보다는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눈빛이 총명하고 골격이 좋구나. 좋은 무인이 되겠어. 하지만…. 하현이보다는 아니야.’
그 혼자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 원진이 그에게 물었다.
“누구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안에 주원 있는가?”
마치 친구네 집에 마실이라도 온 듯한 말투였다.
주원대사는 현재 소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승려이자, 소림 방장의 사제이기도 했다.
원진은 그런 주원대사를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보았다.
“주원 큰스님 말입니까? 아마도…. 요사(療舍)에 계실 겁니다.”
“요사(療舍)라고?”
취월걸개는 자기가 되묻고는 그만 큭큭 웃고 말았다.
요사라는 어려운 말을 써서 그렇지, 요사는 승려들이 생활하는 건물을 일컫는 것이었다.
평소 불경을 외고, 공부하고, 기거하는 곳을 모두 요사라고 하는데…….
“결국, 숙소에서 땡땡이를 치고 있다는 소리구나.”
“땡땡이라니요……!”
원진의 얼굴이 조금 벌게졌다.
취월걸개의 말이 하등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하하. 주원의 실체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나를 주원에게 데려다주겠나? 아니면, 주원을 이곳으로 불러주겠나?”
원진은 고개를 두리번 거려 주변에 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있나 확인부터 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오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원진은 재빨리 취월걸개를 소림사 안으로 들여 어느 건물에 데려다주었다.
“이곳은 손님을 맞이하는 별채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큰 스님을 모셔오겠습니다.”
“고맙네. 자네 이름은 내가 기억하지.”
“감사합니다.”
원진은 고개를 숙이고 총총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취월걸개가 무림에서 제일가는 기인이라고 하더니, 잠시 만난 것만으로도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취월걸개가 동자승이 내준 차를 홀짝이고 있자, 누군가 우당탕 별채에 들어섰다.
덩치는 승려답지 않게 커다랗고, 각진 얼굴이 근엄하지만, 두 눈만은 감긴 것처럼 보이는 노승이었다.
“어쩐지 법당에서부터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여 공불을 드리기 힘들다 싶었건만, 취월 자네가 와서 그랬구만.”
“법당은 무슨! 요사에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고 있었던 주제에.”
“허허. 거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또한 부처님의 뜻이겠지. 아미타불.”
둘은 만나자마자 웃는 낯으로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항상 둘의 사이는 이랬다.
누군가 보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이지만, 그 말 사이에 숨어있는 반가움을 알아챌 수 있는 친우 사이였다.
“소식도 없이, 별안간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향냄새가 진동해서 다신 오기 싫다고 했던 사람이?”
“우리가 해결 봐야 할 내기도 있고, 또 자네에게 해줄 말도 있어서 왔지.”
“내기라고?”
주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취월걸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둘은 걸핏하면 내기를 운운하며 싸워댔으니, 그중에 어떤 것인지를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전에 해줄 말부터 해주겠네.”
“무엇인가?”
“나. 제자를 들이기로 했네.”
“뭐?!”
주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생 소양을 쌓아온 고승마저 깜짝 놀라게 할만한 소식이었다.
“아미타불…. 자네. 지금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잔소리를 그만둔다는 것?”
취월걸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젠장. 이 생각을 못하다니. 진작 제자를 만들었다고 거짓말했으면 자네의 시비가 절반은 줄었을 터인데.”
“반응을 보니 거짓은 아니구만. 축하하네. 진심이네. 부처님이 도우셨어. 아미타불.”
염주를 굴리며 불호를 외는 그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매번 만나면 시비를 걸고, 말다툼하는 그들이었지만, 친우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래. 고맙네. 이제 내기 얘기를 해보지.”
“좋네. 나도 궁금하니.”
“내 제자가 소림의 삼대 제자들이 펼치는 십팔나한진에 도전할걸세. 기억하는가? 십팔나한진을 파훼하면 소환단을 주기로 한 것?”
“그런 적이… 있긴 한데. 내기의 내용이 그게 아니잖나?”
주원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때가 최근에 싸웠던 일 중에 가장 크게 싸웠던 것이라 그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분명히 십팔나한진을 깨는 것은 취월걸개의 제자가 아닌 남궁무룡의 손주였다.
“그 말이, 그 말이게 되었네.”
“그게 무슨 소리…. 설마?”
“하하. 맞네. 무룡이의 막내손자를 내 제자로 들이기로 했지.”
주원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무룡이 그걸 허락했는가?!”
“그럼. 내가 말하니까 단박에 허락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자를 거지로 만들다니. 이것 제정신인가? 내 지금 남궁세가에 가야겠네.”
취월걸개는 별채에서 나가려는 주원을 겨우 말려 다시 의자에 앉혔다.
“우리 개방에 입방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면?”
“너희 소림에서도 많이 하는 것 있지 않은가. 속가제자.”
“속가제자? 개방에서도 속가제자를 들여?”
“뭐. 그렇게 되었네.”
주원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취월걸개는 귀찮게 모두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어찌 되었든 자네가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구만. 그러면 내가 가서 무룡이의 손자 둘을 데리고 오겠네. 소환단 세 알. 잘 준비해놓게나.”
“세 알? 자네, 우리 제자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겨우 두 명이서 한 명도 쓰러지지 않고 십팔나한진을 파훼해보겠다고?”
주원은 조금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취월걸개가 너무나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월걸개는 계속 그 표정이었다.
그는 표정보다 더욱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림의 제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니네. 다만, 내 제자한테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