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리고 내 제자 말고 또 다른 한 명은 민이를 데려올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게.”
“청룡신검 남궁민 말인가?”
“맞네.”
“그건 반칙 아닌가? 청룡신검은 이미…….”
“부처님을 모시는 승려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해도 되는가? 자네는 무룡이의 손자라고 했지, 거기에 민이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소리는 한 적 없네.”
“끄응…….”
주원대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틀림없이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뭐. 어찌 되었는 나는 잘 전했고, 차도 잘 마셨으니. 이만 가보겠네.”
“그러면 언제 오는 건가?”
“자네 제자들이 언제 시간이 되겠는가? 청룡신검도 오는 데 바로 가능하겠는가?”
취월걸개는 여유로운 얼굴이었고, 청룡신검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시간이 모자란 것은 주원대사였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달라 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흥!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좋네!”
“그래? 그렇지만 남궁세가에서 여기는 거리가 꽤 되지 않나. 그리고 오는 길에 우리 총타를 들를 생각이니 한 달 뒤로 하는 게 어떻겠나?”
“한 달? 좋지.”
주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 달이라. 한 달 동안 빡세게 굴려야겠군.’
취월걸개는 빙긋 웃었다.
‘요놈. 민이만 신경 쓰다가는 하현이한테 뒤통수를 제대로 맞게 될 것이다.’
그는 이래 봬도 무림 최고의 정보집단인 개방의 장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는 이미 심리전에 들어간 것이다.
일부러 남궁민의 이름을 꺼내 주의를 그쪽에 쏟게 한 것이다.
“그러면 정말 가보겠네.”
“알겠네. 한 달 뒤에 보세나.”
“알겠네.”
취월걸개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를 나가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취월걸개. 드디어 맘 붙일 곳을 찾았군.”
주원대사는 이제야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평생을 홀로 외로이 살아온 친우의 변화가 이토록 기쁜 적이 없었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는 그의 옆에 별채 앞에서 대기하던 원진이 다가왔다.
“큰스님. 취월걸개 장로님께선 바로 돌아가신 겁니까?”
“허허. 그렇다. 너는 처음 만나보지? 원래 저런 사람이다.”
주원대사는 원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원진. 무공 수련은 열심히 하고 있느냐?”
“네. 부처님의 뜻을 이행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달 동안 나랑 좀 같이 붙어있자꾸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네 사형제들과 십팔나한진을 수련할 것이다.”
원진이 영문을 몰라 대답을 하지도 못할 때, 주원대사는 가만히 미소를 띠었다.
‘형님이라. 내 비록 출가한 불자라지만, 취월걸개에게 형님 소리를 평생 듣는 것은 참으로 귀하군.’
원진은 앞으로 한 달 동안 그에게 펼쳐질 지옥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두 눈만 데굴 굴릴 뿐이었다.
“자. 시간이 없다. 당장 네 사형제들을 모두 모아 대연무장으로 오거라.”
“네, 넵!”
원진이 주원대사의 말에 법당으로 달려갔다.
주원대사는 그 등을 보며 그도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친우가 제자를 들이기로 하여 기쁜 마음인 것은 분명하나, 이 내기에서 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 * *
십만대산(十萬大山).
본디 이 십만대산이 뜻하는 것은 중원의 서쪽 끝, 초록의 산과 붉은 흙이 어우러진 광활한 산지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원의 사람들에게 십만대산이라는 단어를 들려준다면 백이면 백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마교(磨敎)의 본거지.’
그들은 충과 예, 효보다는 힘의 논리를 우선시했다.
그리고 무(武) 자체를 숭상하며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행위도 용납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종교집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천마신교(天磨神敎)라고 불렀고, 중원의 무림인들은 마교(磨敎)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십만대산이라는 것은 어느 지역이 아니었다.
그들이 있는 곳.
마교의 교주가 있는 곳.
그곳이 그들에게는 십만대산이었다.
중원 어딘가, 붉은 기둥이 끝없이 세워진 전각에 누군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오체투지(五體投地) 하고 있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식솔들과 혈랑의 혈전이 벌어지기 직전 자취를 감춘 능후였다.
“능후.”
전각의 맨 끝.
너무 멀어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있는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보통이라면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법한 먼 거리였건만.
“크읍…….”
능후는 귓가에서 울리는듯한 그 소리에 그만 신음성을 내고 말았다.
사내와 함께 있는 이 모든 공간이 그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혈검대주…. 혈랑이 죽었다고?”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어디 한 군데 다친 곳도 없이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다?”
“남궁무룡에게 가려는 것을 제가 극구 말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싸움에 참여한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능후는 벌벌 떨며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했다.
사실 그와 마주한 사내는 이미 이런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는 혹시나 능후가 무림맹의 간자(間者)가 아닌지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능후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이곳의 공기가 그의 폐를 짓이기는 것 같고, 이미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온 듯 손, 발은 벌벌 떨리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더 말해야만 했다.
“남궁무룡과 그 자손들은 누구 하나 죽은 자가 없습니다. 무공이 뛰어나지 못한 제가 가세했던들, 혈검대주를 구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왜 혈검대주가 죽고 나서 곧바로 여기로 오지 않았지?”
“저는 혈검대주 사망을 확인 후에 혈검대로 돌아와 그들을 결속시켰습니다. 혈검대주는 혈검대의 조장 열 명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들의 동요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후욱-
그가 막힘없이 대답하자, 갑자기 공기가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능후는 지금까지 그의 폐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겨우 원활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곤 전각 끝에 있던 자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능후는 그가 코앞에 올 때까지 고개를 들 생각도 못 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전신이 덜덜 떨려왔다.
공포.
그가 사내에게 느끼는 것은 공포였다.
“일어나라.”
사내의 말에 능후는 마치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즉각 몸을 일으켰다.
“교…. 주님.”
능후는 겨우 입을 떼며 교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굉장히 멀끔했다.
마교라는 온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집단의 수장이 아니라, 산골에서 공부하는 서생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능후는 알고 있다.
이 얼굴 뒤에는 얼마나 잔혹한 성정이 숨어있는지.
그리고 이렇게 평범한 중년의 얼굴이건만, 그의 나이는 이미 팔순을 지났다는 것을.
“혈검대주. 혈랑은 본디 남궁무룡에게 원한이 있었지.”
마교 내에서 혈랑의 목에 길게 나 있던 흉터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평소 나에게 엄청난 불만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이토록 숨어만 지내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
“헙.”
능후는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평소에 혈랑이 은근슬쩍 내비치던 불만을 교주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이 완성되지 않았다.”
“네. 저도 그래서 항상 그를 말리려 했습니다.”
“본디 교의 율법대로라면, 그를 말리지 못한 너도 처분되어야 마땅하나…….”
“……!”
“혈검대를 진정시킨 공을 높이 사 이번에는 넘어가마.”
“감, 감사합니다!”
능후는 목에서 서늘함을 느꼈다.
말 한마디로 파리 한 마리를 잡는 것보다도 더 쉽게 그를 죽일 수 있는 자가 바로 그의 눈앞의 교주였다.
하지만 능후는 정말로 목숨을 구할만한 공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혈랑의 죽음을 알게 된 혈검대가 복수라도 하겠답시고 남궁세가로 쳐들어갔다면, 그 후폭풍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간부로 혈검대(血劍隊)는 마룡대(魔龍隊)에 편입한다.”
“조, 존명!”
마룡대는 교주의 직속 무력단체였다.
혈검대를 마룡대에 편입시킨다는 것은 앞으로 혈검대를 그가 직접 관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너는 따로 할 것이 있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시면, 목숨 바쳐 행하겠습니다.”
“너만큼 현재 무림 정세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없다. 그러니 소교주에게 현재 중원에 대해서 가르쳐라.”
능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역시 이 년 전에 책봉된 소교주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의 성정이 말할 수도 없게 잔인하다는 것.
하지만 무공에 대한 자질과 오성은 단순히 천재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까지.
“어,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합니까?”
능후는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물었다.
소교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선생을 때려죽였다는 얘기는 교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기에 물어본 것이다.
교주에게 죽나, 소교주에게 죽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교주는 빙긋 웃어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기분이 좋아서 웃음 짓는다고 착각할 정도로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네가 알고 있는 중원의 역사부터 각파의 고수. 그리고 현재 정세까지. 대법이 완성되기까지는 앞으로 삼 년이다. 그 삼 년 후에 소교주가 무림에 나갔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알겠느냐?”
“존명!”
능후는 눈치가 빠른 자였다.
여기서 그가 한 마디만 더 질문해도 목숨이 날아가리라는 것을 느꼈는지 그는 곧장 대답했다.
“그러면 나가봐라. 그리고 마뇌를 들라 하라.”
“존명!”
능후는 축객령이 내리자마자 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더듬더듬 그의 목이 잘 부어 있는지 만져보기까지 했다.
“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주저앉고 싶었건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이 순간 그의 목표는 한 가지.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 * *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아홉 번.
하현은 양반다리를 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취월걸개를 향해 구배지례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검존 남궁무룡과 청룡신검 남궁민 모두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럼 사부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래 제자야. 앞으로 잘 해주마!”
평온한 하현의 얼굴과는 달리 취월걸개는 잔뜩 상기한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시현에서 하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하현은 얼굴은 깨끗했지만,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취월걸개는 하현에게 개방의…. 아니, 자신의 제자가 되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물론 그때 하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허참. 일주일 만에 나타나자마자 한다는 게 하현이 절을 받는 거라니.”
“흐흐. 부러우냐? 제자가 되기로 했으면 구배지례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
“나도 전에 받지 않았느냐. 그것도 네 앞에서.”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 나는데? 지금 절 받는 건 바로 이 몸이니라.”
취월걸개는 껄껄 웃었다.
그는 남궁무룡의 예상대로 소림을 떠나고는 기어코 호북의 무당에까지 들려 유엽진인에까지 제자가 생겼음을 자랑하고 왔다고 한다.
‘네 제자는 호북제일검이지? 내 제자는 무림제일검으로 만들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수많은 무당파 도인들이 듣는 곳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부끄러움은 남궁무룡과 하현의 몫이었다.
“무룡아. 딱 이틀만 쉬고 출발하겠다.”
“한 달 뒤라더니,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야.”
“우리 방주한테 하현이를 보여주기로 약속했거든. 개봉을 들렀다가 숭산까지 가려면 넉넉하게 잡는 게 낫지. 민아. 너도 같이 가도 괜찮지? 네가 불편하면 한 달 뒤에 소림에서 만나도 좋다.”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다만, 장로님의 신법은 너무 빠르시니 속도를 조금 늦춰주시지요.”
취월걸개가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참내. 그렇게 잘 생겨서 말도 그렇게 잘하면 어쩌자는 게야!”
소림에서의 결전까지는 이제 이십 칠일.
취월걸개는 즐겁게 웃고 있는 하현과 남궁민을 볼수록 자신이 없었다.
내기에서 질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