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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70화 (70/304)

70화

하현이 소림사로 떠나기 하루 전.

그는 지금도 공터에서 검을 들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력을 한 점에 응축하라는 게 무슨 말일까?’

마치 선문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애매하다.

이제는 진짜 사부님이 된 취월걸개에게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려 했지만, 취월걸개는 물어보면 진짜로 대답해줄 것 같아서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까.

바스락-

하현이 검을 휘두르지도 않은 채 검을 들고 서 있으려니, 뒤에서 마른 나뭇잎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가운 얼굴이었다.

“현아.”

“누나. 이제 다시 수련 시작하려고?”

남궁소화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먼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휴식을 취할 것이라며 침실로 들어가 밥때를 제외하고는 나오질 않았다.

그러기를 일주일.

드디어 목검을 들고 이곳으로 나온 것이다.

“현이 너, 모레에 다시 떠난다며?”

“응.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네.”

“피이.”

소화는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지 입술을 삐죽였다.

“왜 그래 누나?”

“또 같이 수련하고, 놀고 그럴 줄 알았는데 바로 떠난다고 해서.”

“어쩔 수 없네.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

소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련하시겠어. 민 오라버니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민 형님?”

“응. 내가 어릴 때도 내가 놀아달라 그러면 민 오라버니는 항상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서 임무를 나가곤 했거든. 하여간 넌 참 민 오라버니를 닮았어.”

“그래?”

하현은 왠지 남궁민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너 없으면 누구랑 수련하나. 혼자 하기는 심심한데.”

“환 형님이 있잖아.”

소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너 환 오라버니 얘기 못 들었어?”

“무슨 얘기?”

“너 몰랐구나?”

그녀는 하현에게 몇 발자국 더 다가가 방금 전보다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 오라버니. 폐관 수련에 들어갈 거래.”

“폐관?”

“응. 시기는 길지 않고, 석 달 정도?”

“아니, 형님이 무슨 일로……?”

남궁세가에서는 어지간하면 폐관 수련을 권장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남궁무룡은 무공 수련에 있어서는 혼자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그들처럼 어릴 때는 혼자서 수련하다가는 잘못된 습관을 키울 수 있기에 지양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간혹가다가 폐관 수련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한 폐관 수련이다.

“아……!”

하현은 문득 얼마 전 보았던 남궁환의 눈빛을 떠올렸다.

혈검대원들과 싸울 때, 야생의 짐승과도 같던 그 눈빛을.

소화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하현에게 말했다.

“맞아. 그때 오라버니는 분명히 뭔가 얻은 것이 있는 거야.”

“그랬구나. 나는 사실 그때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난 그때 미치도록 심장 뛰던 것밖에 생각이 안 나.”

그때 하현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간질거리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남궁환이 그 전투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하현도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감각을.

하지만 소화가 말을 걸어오는 통에 하현은 계속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취월걸개 할아버지한테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할까?”

“아마 데려가 달라고 하면 분명 데려가 주시긴 할 건데. 누나 거지소굴에 들어갈 수 있어?”

“거지소굴은 왜?”

“이번에 소림으로 가는 길에 개방에 총본타도 들릴 거라는데? 취월걸개 사부님께서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거지를 보여준다고 하셨어.”

소화가 뒷걸음질 치며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안 갈래.”

“안 가는 게 낫겠지?”

소화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팽 형이랑 수련하면 되잖아.”

“팽가?”

“으응…. 팽가.”

심경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행히 호칭에서 놈 자는 떨어져 있었다.

“몰라. 아주 꼴도 보기 싫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어제 거의 일 년 만에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뭔지 알아?”

“뭔데.”

“나를 이기려고 죽도록 수련했다면서 나한테 검부터 들이대는 거 있지?”

하현은 큭큭 웃었다.

팽헌홍의 진중한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엄청나게 발전했던데? 같이 수련하면 효과가 엄청 좋을 거야.”

하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제 잠깐 만난 팽헌홍은 말 그대로 괄목상대(刮目相對)였다.

하현이 세가에 없는 동안 얼마나 피를 깎는 수련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소화의 좋은 상대가 되어줄 터였다.

“에잇! 몰라. 나중에 하고 싶을 때 할 거야.”

“그래. 누나 하고픈 대로 다 해.”

소화는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 돌연 여기서는 집중이 잘 안 될 것 같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냐는 하현의 질문에 그녀는 그냥 다른 적당한 곳을 찾는다고 했지만, 그 방향은 청룡각 정식대원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을 향해 있었다.

‘팽 형한테 가는군.’

하현은 진작 눈치챘지만, 소화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소화가 떠나고. 하현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일 점에 응축.”

하현은 다시 한번 이 말을 되뇌었다.

그러자 문득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일 점의 응축이라는 게, 추상적인 게 아니라, 정말로 한 점에 내공을 쏟아부으라는 말인가?’

가설을 세웠으면 다음은 시행하는 것뿐이다.

하현은 양손으로 검을 잡고 서서히 내공을 방출했다.

목표는 검첨(劍尖). 즉 칼의 끝이었다.

스스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이 온몸을 타고 돌아 팔을 통해 검에 주입된다.

그리고 검으로 들어간 하현의 기운은 검의 면을 타고 돌며 검 주위를 휘감는다.

고오오오-

내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진동하며 소리를 내고, 곧 검풍이 인다.

검풍은 소맷자락을 나풀나풀 휘날리며 더욱 커졌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달랐다.

원래 검에 기운을 담는다고 하면, 그것은 지금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검의 주위에 기운을 빽빽하게 둘러내는 것.

하지만 하현은 지금부터 그 둘러진 기운을 검첨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으윽.”

처음 해보는 행위가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내공을 움직이려다 중간에 소실되는 내공이 태반이라 하현은 끊임없이 내공을 밀어 넣었다.

‘내공이 조금만 더 여유로웠어도…….’

하지만 지금 아쉬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애초에 할아버지가 그뿐만 아니라 하현도 소환단을 얻었으면 하는 제일 큰 이유가 깨달음에 비해 모자란 내공을 채워주기 위함이 아니던가.

하지만 하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계속해서 검의 끝에 기운을 모아갔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하현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지만, 표정만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

시도가 쌓여갈수록, 요령을 알아간다.

요령을 알아갈수록, 더 쉬워진다.

하현은 이 와중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내공이 따르는 것.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없으니까.

화악-!

남궁환이 혈검대원들과 싸웠을 때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하현 역시 그때의 그 전투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때, 혈랑 채형석이 도를 다루는 모습이 떠올랐다.

스아악!

하현은 자연스럽게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는 이 순간 혈랑이 되었다.

그러자 마치 오래전 기억이 떠오르듯 혈랑 역시 도 끝에만 기를 모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혈랑의 도법.

하지만, 그 태와 형은 혈랑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전에는 무공의 겉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아니다.

그가 도를 다루던 모습.

기를 다루던 그 동작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츠츠…….

그때, 하현의 검 끝에 미약한 안개가 서리는 듯하더니, 사라졌다.

“후읍! 우웨엑!”

하현은 급작스러운 탈력감과 어지러움에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급격한 내공의 고갈이 그 원인이었다.

헛구역질은 곧 멈추었지만, 하현은 쉬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은 반짝이고 있다.

마치 무언가 보물을 찾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후우…. 후우…….”

한참을 앉아서 숨을 고르던 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금 전 분명히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겨울의 찬란한 햇빛이 검에 반사되는 것을 하현은 가만히 보다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건 깨달음의 영역이 아니야. 이미 그 과정은 거쳤어.”

언제. 어떻게. 라는 질문은 스스로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현은 정말이지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언젠가 올라서 볼 경지라고.

하현은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단 지금은, 내공이 빠져나가다 못해 텅텅 비어버린 단전을 채우는 게 급선무다.

하현은 겨울바람을 맞으며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의 바람이 푸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하현과 남궁민은 남궁무룡의 앞에 섰다.

“이 못난 할애비 때문에 며칠 쉬지도 못하고 바로 떠나게 하는구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꼭 소환단을 가지고 올게요.”

“고맙다. 현아.”

남궁무룡은 이번에는 남궁민의 어깨를 잡았다.

“민아. 네 걱정이 전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서운하겠느냐?”

“아닙니다. 조부님. 보내주신 신뢰에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현이를 잘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점잖게 했지만, 남궁무룡은 지금 남궁민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날 뻔했다.

‘민이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군.’

남궁민의 표정은 기대감과 작은 흥분이 묘하게 섞인듯한 얼굴이었다.

언제나 강자와의 결전을 꿈꿔오는 그였기에 십팔나한진이 얼마나 대단한 진법인지도 기대가 되었고, 정파제일문이라는 소림사의 후기지수들과도 손속을 나눌 생각에 들떠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헤어짐이 길어? 이번에 만나면 무슨 십 년은 못 보는 사람들처럼. 넉넉잡아도 석 달이면 돌아온다. 유난 떨지 말고 빨리 출발하자고!”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취월걸개가 괜히 심통을 부렸다.

취월걸개는 하현을 제자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괜한 체면치레 따위는 하지 않고, 하현에 대한 욕심을 그대로 내비쳤다.

지금 심통이 난 것도 그들의 인사가 정말로 길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하현이 남궁무룡과 애틋하게 인사를 나누는 그 상황에 샘이 나서 이러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위험하면 뭐라 그랬지?”

“무조건 도망부터 치라고요.”

“좋다. 네 목숨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 명예는 그다음이야. 그걸 꼭 기억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하현은 취월걸개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잔뜩 심통이 나 있던 취월걸개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사부님. 빨리 가요.”

“흠. 흠. 그래. 출발하자꾸나.”

그리고 이어지는 사부님 소리에 이미 그의 심통은 절반 이상 녹아내렸다.

남궁무룡은 그 모습을 보고는 소리죽여 웃었다.

“하현아. 고시(固始)현이 기억나느냐.”

“네, 사부님. 사부님과 제가 처음 만난 곳이 그곳 아닙니까?”

“맞다. 기억하고 있구나.”

“거기를 어떻게 잊겠어요.”

취월걸개가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오늘은 그곳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한 번도 안 쉬고요?”

“그래! 이것도 다 수련의 일환이다. 민아. 너도 따라올 수 있지?”

“제가 그저께 말씀드린 것처럼 속도만 조금 늦춰주신다면…….”

취월걸개가 껄껄 웃었다.

“좋다. 내 천천히 가보도록 하지. 고시까지 다섯 시진 안에 갈 수 있다면, 내가 진수성찬을 주마.”

“사부님은 돈 없으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하하! 정확히 다섯 시진 후에 고시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인 장 영감네 막내가 혼인하는 날이다. 오늘 저녁은 그곳에서 먹을 것이야!”

하현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사부님은 그런 걸 다 기억하세요?”

“물론. 부잣집 잔칫날을 기억하는 것이 거지의 첫 번째 소양이니라!”

하현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말은 취월걸개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신법을 펼쳐 저 멀리에 뛰어가고 있었으니까.

“어휴…. 어쩌다가 저런 사부를…….”

“야! 이놈아. 다 들린다! 얼른 안 튀어와?!”

“이크!”

하현은 목을 움츠리고는 신법을 전개했다.

앞으로 꼼짝없이 다섯 시진 동안은 신법 수련을 할 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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