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하현과 남궁민, 그리고 취월걸개가 남궁세가를 떠난 지 정확하게 다섯 시진 후.
겨울이라 해가 짧아져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쯤, 그들은 고시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에잉. 요즘 젊은것들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겨우 이것 달려놓고서는 그렇게 힘들어하고.”
하현은 이미 기진맥진해 보였고, 남궁민도 조금은 힘들어하는 모양새였건만, 취월걸개는 마치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남궁민은 새삼 취월걸개에게 경외심이 일었다.
단순히 그의 무공과 신법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하현의 한계를 끌어낼 정도로만 속도를 유지하셨어. 역시 신법에 있어서는 최고의 스승이다.’
하지만 남궁민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었다.
취월걸개가 하현의 수련을 위해 완급 조절을 완벽하게 한 건 아니었다.
‘어? 이러다가 잔치에 늦을 것 같은데? 속도를 높이자.’
‘아니. 이대로 가다가는 하현이 쓰러지겠는데? 쓰러져서 멈추면 잔치에 늦는다. 속도를 낮춰야지.’
철저하게 목적이 있는 완급 조절이었건만, 절묘하게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고시에 들어와서도 쉴 수 없었다.
목표는 고시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장 영감의 집이었기 때문에.
한참을 더 들어오고 거대한 장원 앞에서 서고 나서야 그들은 신법을 멈출 수 있었다.
둥 둥 둥-
띠링 띠링
장원 안에서는 북소리와 비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잔치가 한창인 것으로 보였다.
“옳지. 아직 늦지 않았나 보구나. 빨리 들어가자.”
취월걸개는 얼굴에 화색이 돌아 활짝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갔다.
“와아-.”
하현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단순히 사람이 많은 곳은 이미 이전에도 많이 보았다.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이나, 하북팽가가 있는 북경의 시장에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거대한 장원에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펴고 앉아 먹고 마시며 잔치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현이는 이런 모습 처음 보지?”
남궁민의 물음에 하현은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가장은 그쪽 지역의 유지이긴 했으나, 본디 검소한 집안이었기에 이렇게 큰 잔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남궁세가도 마찬가지.
남궁세가의 장원은 이곳 장 영감의 장원보다 몇 배는 더 크지만, 남궁무룡이 워낙 시끄러운 것도 싫어하고, 사치하는 것을 싫어하여 이렇게 큰 규모의 잔치는 연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자자. 얘들아 이리 오너라. 이렇게 자리를 잡고. 저기 끝에 보이지? 저기서 음식과 술을 받아오면 되는 것이다.”
취월걸개는 시범이라도 보이려는 듯 스윽 줄 끝에 서더니 접시 몇 개를 받아왔다.
“장 영감은 이렇게 인심이 좋아. 나 같은 거지가 가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음식을 주고 말이야.”
“다른 사람은 거지들한테는 밥을 안 주나요?”
“아니. 주긴 주지만, 이렇게 정상적인 밥을 주진 않지.”
“그럼요?”
“거지들은 뒷문 근처에 모여서 따로 음식을 내어준다. 거기엔 먹다 남은 찌꺼기가 있을 수도 있고, 음식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들이 섞여 있기도 하지만, 그것도 감지덕지하지.”
취월걸개는 받아온 음식 중 전병 하나를 꿀꺽 삼켰다.
겉보기에는 분명 평범한 전병이건만, 그가 먹는 것을 보니 천하일미처럼 보였다.
그는 입안에 든 음식을 다 씹어 넘기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나? 여기 장 영감이 고시현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라고.”
“그러셨죠.”
하현이 그의 입에서 튀는 음식물들을 잽싸게 피하며 대답했다.
“첫 번째가 누군지 아느냐?”
“누군데요?”
“너도 본 적 있을게다. 혹시 정가라고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너한테 화섭자 가격을 사기 치려던…….”
“아! 그 잡화점의 할아버지. 기억나요. 그분이 그렇게 부자였어요?”
“그럼! 그치는 고시현이 아니라, 아마 여기 하남성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일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기는 개미 똥구멍만큼이나 쩨쩨해서 잔치도 한 번 열지 않고, 거지들에게 적선도 하지 않는 극악무도한 작자다.”
취월걸개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떠는데, 그 순간 그의 뒤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정신 나간 거지가! 몇 년 만에 얼굴을 보는데 하는 소리가 뭣이 어째? 개미 똥구멍?”
취월걸개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그가 뒷담화를 하던 정가였다.
“아니, 자네가 여기 왜 있는가?”
“허 참. 이 사람아. 나도 장사하는 사람이고, 장 영감도 장사하는 사람인데 내가 너보다는 친분이 있어도 한참 더 있을 것이다. 그러는 너는 여기 왜 와있는 것이야?”
취월걸개가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밥 먹으러 왔다. 왜!”
“이런 거지 같으니라고. 너 때문에 이 기쁜 날 손님들이 냄새난다고 도망가면 책임질 거야? 양심이 없어. 양심이.”
“나 거지 맞다! 양심도 없다! 그런데 네가 보태준 거 있냐!”
취월걸개는 정씨와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했고, 하현과 남궁민은 끼어들 틈도 없었다.
“잠깐, 잠깐. 그런데 여기는 어디 소협들이시오? 행색을 보아하니. 개방도들은 아니실 것 같은데. 어찌 이런 냄새나는 거지와 함께 다니는 것이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혹시 저를 기억 못 하시겠습니까?”
정씨가 둘에게 말을 걸자 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하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누구인지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삼 년 전보다 키도 머리 하나는 더 커지고, 체격도 커졌지만, 저 똘망한 눈빛만은 여전했기에.
“아니, 소협은 그때 그!”
“맞습니다. 화섭자…….”
“지게……!”
하현과 정씨는 동시에 외쳤다.
그 둘은 서로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흠흠. 어찌 되었든 굉장히 많이 컸구려. 못 알아볼 뻔했으니.”
“네. 남궁하현입니다.”
“남궁?! 그렇다면 혹시……?”
“네. 검존 남궁무룡께서 제 조부 되십니다.”
정씨는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
“어쩐지. 이렇게 미남은 중원에 흔치 않으니까. 남궁의 핏줄일 거라 생각은 했소!”
“그때 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지게 하나랑 육포 몇 장 내어준 것밖에는 없소. 하하하.”
“그래도, 그때 저에게는 굉장히 큰 도움이었습니다.”
하현이 정중하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자, 정씨가 기분 좋은지 허허 웃었다.
그의 옆에 있는 취월걸개만이 작은 소리로 ‘그날 업고 뛴 건 난데.’라고 중얼거리며 입을 삐죽였을 뿐.
“그러면 옆에 있는 소…. 대협은 누구시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남궁민이라 합니다.”
남궁민도 포권하며 인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씨의 반응이 남달랐다.
“청, 청룡신검!”
“민망합니다.”
정씨는 남궁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와락 잡았다.
남궁민이 당황하고 있을 때, 정씨가 말했다.
“우리 형님의 목숨을 구해주어 정말 감사드리오. 내가 그 얘기를 듣고서 몇 번 남궁세가를 찾아가려 했건만, 생업이 급해 이제야 감사 인사를 드리오. 정말 감사하오.”
“아……!”
남궁민은 이 년 전, 하현의 첫 임무에서 정대인을 구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언뜻 고시현의 정가가 정대인의 동생이라는 말을 취월걸개가 했었다는 것도 기억났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오! 오늘은 은인을 만났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여봐라! 여기 귀한 손님이시다. 제일 좋은 술과 고기를 내오거라!”
정씨가 자신 있게 소리치자 장원의 하인들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예이!’ 하고 소리치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분명 정씨는 그들의 주인이 아닌데, 저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장 영감과 무언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쯧쯧. 남의 음식으로 생색내는 건 네놈밖에 없을 것이다.”
“허허. 잔치의 주인은 손님이 아닌가?”
“언젠가 네놈이 여는 잔치에서 내가 똑같이 해주마.”
“그래서 난 죽을 때까지 잔치를 열지 않을 생각이네.”
정씨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는 취월걸개마저 혀를 내둘렀다.
* * *
어찌 되었든 그들은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나왔다.
정씨는 자연스럽게 함께였다.
“차는 정말로 내가 대접하고 싶은데. 술도 좋고.”
어느새 정씨는 하현과 남궁민에게 말을 놓기로 했다.
애초에 그들도 취월걸개의 친우인 그에게 계속 경어를 듣는 것이 불편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
“에잉, 풍류를 모르는구만.”
그 말에 남궁민은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차로 하시지요. 술은 기회가 되면 배워보겠습니다.”
“알겠네. 나를 따라오게.”
모두 그를 따라가는 와중.
그들은 골목 어귀에서 열댓 명의 거지 떼와 조우했다.
거지들은 잔칫집에서 음식을 한 광주리나 얻어왔는지 그것들을 나누고 있었다.
“야! 너희들 것만 그렇게 챙기지 말고, 새끼 거지들 것도 챙기란 말이야. 어린애들이 못 먹고 비실대면 되겠어? 우리야 다른 곳에서 동냥하면 된다지만, 걔네들은 동냥 실력도 없어서 굶는 날이 허다하잖아!”
“네. 사형!”
그들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지가 다른 거지들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취월걸개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들었느냐? 저것이 바로 우리 개방의 의리니라. 아무리 우리가 빌어먹는 거지라지만, 언제나 식구부터 챙기는 건 기본이지.”
“그래도 개방에는 입방 안 할 거예요.”
“누가 하라 그랬냐!”
하현이 킥킥 웃으며, 거지들을 보았다.
아까 다른 거지를 나무라던 우두머리의 허리에는 두 개의 매듭이 묶여 있었다.
“오호라. 저 아이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이결(二結)이군.”
정씨가 말을 내뱉자 취월걸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흔히들 개방은 방도의 숫자가 가장 많은 문파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방도가 아무런 무공을 익히지 못한 백의개나 이제 갓 무공을 익힌 일결 제자다.
일결 제자 중에서도 자질을 인정받은 소수의 거지만이 이결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개목(丐目)이군.”
“사부님. 개목이 뭐에요?”
“말 그대로 개방의 눈이다. 무림의 사건과 정보들을 수집하며 개방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러면 이결제자부터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군요?”
“어디 보자…. 너희 남궁세가로 치면, 청룡각 정식대원쯤 되겠구나.”
하현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걸개는 그들을 보더니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가야. 이 길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자.”
“어째서?”
“혹시나 나를 알아보면 또 생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하다. 장로님! 어쩌고 하면서 말이야.”
“귀찮아지겠군. 그럼 돌아가지.”
정씨와 취월걸개가 옆 골목으로 가려 등을 돌렸다.
남궁민도 그들을 따랐는데, 왜인지 하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현아 무슨 일 있어?”
남궁민이 하현에게 물었지만, 하현은 조금 전에 말한 이결 거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 시간 동안 하현은 무엇을 생각해내는 듯한 표정이더니, 입을 열었다.
“마윤철!”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거지들에게 들리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이결 거지가 고개를 홱 틀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콧김을 뿜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넌 누구이길래 이 몸의 이름을 그렇게 친구 부르듯 부르냐? 나보다 나이도 더 어려 보이는 것이.”
하현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랑 똑같네. 그때도 이렇게 다짜고짜 나한테 시비를 걸었는데.”
“뭐? 웃어? 내가 너랑 어디서 봤다고……?”
그의 말끝이 의문으로 올라갔다.
하현의 얼굴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너…. 너……!”
“오랜만이다. 마윤철.”
“하현!”
그는 이제 생각난 듯 하현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다.
그 통에 뒤돌아 걷던 취월걸개와 정씨도 뒤를 돌아보았다.
하현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공 수련은 좀 열심히 했나 본데? 타구십팔초는 극성까지 익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