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흔히들 이런 상황을 속된말로 이렇게들 말한다.
개족보라고.
무림에서는 생각보다 이런 경우가 왕왕 있는 편이다.
은거한 전대의 고수가 뜬금없이 어린아이를 데려와 제자로 키워 나이 어린 사숙이나 사숙조가 생기게 되는 경우가.
개방에서는 무당이나 소림처럼 항렬자를 돌려쓰지는 않지만, 배분 구분은 확실한 편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특이한 편인데, 백의개 때는 따로 배분을 구분하지 않지만, 일결로 승급하는 시기에 따라 대를 구분한다.
“사숙조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속가제자지만.”
“속가제자?”
마윤철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취월걸개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는 한참을 웃었는지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아이고, 배야. 너무 웃었나 뱃가죽이 다 당기는구나.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하현이 너 방주님이랑 같은 배분이로구나.”
“……!”
그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마윤철이었다.
“어르신. 그런데 보통 속가제자는 항렬에 안 끼지 않습니까?”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듣고 있던 남궁민이 취월걸개에게 말했다.
“그건 문파마다 다른 법이지. 청성이나 종남은 속가제자도 다 항렬에 들어간다. 소림이랑 무당은 안 들어가지만.”
“장로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우리한테도 속가제자가 있었습니까?”
“얼마 전에 생겼다.”
“네……?”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라. 이후에 더 생길지는 미지수지만.”
“……?”
취월걸개는 마윤철의 얼빠진 표정이 웃긴지 낄낄 웃고는 말했다.
“얼빠진 얼굴은 그만해라. 나는 복우를 한 번 만나야겠구나.”
“분타주님은 왜…….”
“왜긴!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어. 이만한 자질을 가진 제자가 있는데, 아직도 분타에서 놀려?”
마윤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취월걸개가 한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아니지. 굳이 복우를 족칠 필요가 없구나. 그렇지 않아도 지금 총타에 가는 중이다. 내가 가서 적당한 사람을 보내도록 할 테니. 너는 동냥이나 잘하고 있거라.”
“장로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마윤철이 처음에 인사할 때보다 더욱 납작 엎드리며 취월걸개에게 절을 올렸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헤이! 아까도 말하지 않았느냐. 이런 걸 제일 싫어한다고.”
취월걸개의 너스레에도 마윤철은 한참을 더 엎드려 있다가 일어났다.
“사, 사숙조. 감사합니다.”
그는 하현에게도 고개를 푹 숙였다.
대련할 때, 그의 실력을 맘껏 취월걸개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손에 사정을 둔 것을 사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숙조는 반쯤 농담이었어. 앞으로도 잘 지내자는 뜻으로…….”
“아닙니다. 평생 은인이신데. 사숙조로 모시겠습니다. 얘들아 뭐하냐. 사숙조께도 인사를 올려라.”
“사숙조님께 인사드립니다!”
거지들이 앞다투어 달려 나와 하현에게 인사를 올리는 통에 이번에는 도리어 하현이 당황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 모습을 본 취월걸개만 신명 나게 웃어댔다.
거지들은 하현이 인사를 받아주기 전까지는 허리를 펴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하현은 마지못해 그들의 인사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복우에게 전해라.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곧 손님이 갈 테니 맞을 준비를 하라고.”
“네. 장로님!”
마윤철과 거지들은 취월걸개와 하현에게 한 번 더 인사를 올린 뒤에 사라졌다.
물론 그들이 얻어온 음식 바구니를 챙기는 것은 당연히 잊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구경이었네.”
“그래? 재미있게 봤으면 값을 치러야지.”
“뭐? 자네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자네에게 값을 치러? 하현이한테면 몰라도.”
“제자가 한 것을 사부가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지. 그렇지 않으냐. 하현아?”
하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취월걸개는 정씨에게 그날 결국 술까지 한잔 얻어 마시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 * *
다음 날.
취월걸개와 하현, 남궁민은 정씨와 작별하고 고시현을 떠났다.
그들이 떠날 때 정씨가 취월걸개에게 다시는 보지 말자는 애정이 어린 악담을 퍼부어주었으나, 취월걸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제는 잘 먹고 잘 쉬었지?”
“네. 사부님.”
“그러면 또 달리자. 이번엔 허창 까지 쉬지 않고 달릴 것이다.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걸개의 제자가 되고 신법을 제대로 가르쳐주기 시작하면서 취월걸개는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었다.
‘길을 잘 알아야 한다. 길을! 신법만 빠른 자는 이류고, 길까지 잘 아는 사람이 진정 일류다.’
그래서 그는 하현에게 지도를 통째로 외우게 했다.
원래는 이번 숭산행에서도 아예 지도를 가지고 다니며 계속해서 지도를 외우게 하려 했었다.
모두 외우는 데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현은 두꺼운 지도책을 단 이틀 만에 다 외워버리며 취월걸개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럼 가자. 이번에도 속도는 내게 맞춰라.”
“네. 사부님!”
이번에도 취월걸개는 쌩하니 앞서 달려 나갔다.
하현과 함께 그를 쫓아 달리며 남궁민은 또 한 번 감탄했다.
‘안휘에서 고시현. 고시현에서 허창. 그리고 허창에서 개봉. 취월걸개 어르신께서는 의식하고 계시진 않지만, 정확하게 하루에 달릴 수 있을 만한 곳을 목적지로 삼으셨다.’
이번 강호행에서 배우는 것은 하현만이 아니었다.
남궁민 역시 하현 못지않게 총명했기에, 취월걸개의 옆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그의 경험을 전수받고 있었다.
* * *
네 시진 정도가 흐르고, 그들은 허창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속도는 처음 출발했을 때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느려져 있다.
하현이 기진맥진했기 때문이다.
앞서 달리던 취월걸개는 빙글 뒤를 돌더니 뒤로 달리면서 하현을 향해 말했다.
“좋다. 잘하고 있다. 앞으로 다섯 리만 더 가면 목적지다.”
“네엡…. 사부님!”
“힘드냐?”
“아…. 닙니다!”
취월걸개는 그 와중에 피식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안휘에서 고시현에 갈 때보다 반 배는 더 빠른 속도였는데, 하현은 어떻게든 그를 따라오려 애썼다.
이번에는 남궁민도 제법 힘이 들었지만, 옆에서 하현이 이렇게 열심히 뛰는 덕분에 힘든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어르신!”
“뭐?”
휘익-
남궁민이 취월걸개의 뒤에 나뭇가지가 튀어나왔다고 주의를 주려는 것도 무색하게,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고개를 숙여 피하며 태연하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취월걸개가 빙긋 웃고는 다시 뒤를 돌아 앞을 보며 말했다.
“민이도 잘 듣거라.”
“네.”
“잘 달리려면 눈도 좋아야 한다.”
취월걸개는 쉬지 않고 달리며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어떻게 피했나 궁금하지? 지금 우리가 달리는 관도는 계속해서 직선으로 뚫려있지 않느냐. 달릴 때는 바로 코앞만 보고 달리면 안 되고,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멀리를 봐 놓은 후에 어떻게 달릴지를 계획해서 달려야 한다. 그래야 피로감도 덜하고 혹시나 모를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아하…! 감사합니다.”
하현도 옆에서 헐떡거리느라 대답은 못 했지만, 잘 알아들은 눈빛이었다.
그들은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목적지라고 해서 제대로 된 객잔이나 지붕이 있는 집은 아니었다.
거대한 나무 밑에 야영하기 좋게 평평한 공터가 펼쳐진 곳이었다.
“다 왔다. 내가 이 부근을 지나갈 때 곧잘 잠자곤 하는 곳이지.”
“으아아. 죽겠어요.”
하현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털썩 누웠다.
“어르신. 이 주변에 물이 흐르는 곳은 있습니까?”
“그래. 저기 저 나무 사이로 이백 장 정도 떨어진 곳에 개울이 있다.”
“물을 떠 오겠습니다.”
남궁민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데도 하현은 미동도 없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힘드냐?”
“네. 제법 수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힘드네요.”
“이렇게 달려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많이 달려야 한 시진쯤이었겠지.”
취월걸개가 킬킬 웃으며 하현에게 다가왔다.
“예전에 남궁세가에서 정덕현까지는 달려서 가본 적이 있어요.”
“정덕? 남궁세가에서 거기는 두 시진이면 가는 곳이지 않으냐.”
“아니. 두 시진이요…? 윽?!”
하현은 놀라다 말고 갑자기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취월걸개가 하현의 다리를 손가락을 꾹 누르며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가만히 있거라. 족삼리(足三里)를 자극해주어야 다리에 피로가 안 쌓이는 법이니.”
그의 말대로 하현은 취월걸개의 손에 다리를 맡겼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기만 하던 것이 취월걸개의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점차 시원해져 갔다.
일종의 추궁과혈(推宮過穴)이었다.
본디 추궁과혈은 하는 자에게도, 받는 자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가는 요법이다.
시술자도 상당한 기운을 빼앗기기 때문이고, 받는 자도 추궁과혈을 받을 때 혈을 잘못 건드리면 심각한 내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궁민은 수통에 진작 받아 왔음에도 추궁과혈이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기에 그 옆에 가만히 앉아 끝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하이고. 힘들다. 말년에 제자가 생기니 쉽지가 않구만.”
취월걸개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하현의 옆에 털썩 앉았다.
하현은 추궁과혈을 받는 도중 잠이 들었는지 곤히 자고 있었다.
남궁민은 그런 취월걸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취월걸개도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궁민에게 말했다.
“왜. 너도 해주랴?”
“하하.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게야?”
“조금 신기해서 그랬습니다.”
취월걸개의 두 눈썹이 올라갔다.
“뭐가 신기해?”
“제가 생각하는 어르신은 뭐랄까….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이었습니다.”
“클클. 괴팍한 노인네였다고 말하는 거냐?”
“그러니까…. 음…. 네 맞습니다.”
남궁민과 취월걸개가 마주 보고 웃었다.
“하여튼 남궁세가 출신들 하나같이 건방진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과거에 그러셨다는 겁니다. 중요한 건 지금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뭐랄까…. 옆집 할아버지 같습니다.”
“뭣이?”
취월걸개가 눈을 치켜뜨자 남궁민이 황급히 부연설명했다.
“그만큼 친근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건 비단 취월걸개 어르신께만 느낀 건 아닙니다.”
“그러면 또 누가 있느냐?”
“저희 조부님입니다. 조부님도 사실 다가가기가 힘든 분이었습니다만, 최근에는 전혀 다른 분이 되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장난도 많이 치시고요.”
취월걸개가 깊이 잠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뻔하지. 이 아이 덕분이지 않겠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라고 뭐 다를 줄 아느냐.”
“하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많이 변했죠.”
취월걸개가 킬킬 웃었다.
“이전에는 무공을 배우지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굴었지.”
“그랬었죠.”
취월걸개와 남궁민은 죽은 듯 자고있는 하현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그들은 하현으로 시작된 변화를 충분히 체감하고 있었다.
사실 둘은 이전까지 말도 몇 마디 나누어보지 않은 사이였건만, 하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마치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손사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데리고는 왔다만, 십팔나한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웬일로 취월걸개가 진지하게 말했건만, 남궁민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전부터 진법을 상대하는 방법은 머릿속에서 구상만 해왔습니다. 그간 제가 세워온 방법이 옳은 길인지 확인할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큭큭. 그래. 이래야 청룡신검이지. 되었다. 네 걱정은 무슨. 어서 잠이나 자자.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
“알겠습니다. 어르신도 어서 주무십시오.”
취월걸개는 이미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침상에 누운 것마냥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후였다.
남궁민도 피식 웃고서는 하현의 옆에 몸을 뉘었다.
빽빽하게 자라있는 나뭇가지들의 사이로 오늘도 별빛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