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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74화 (74/304)

74화

하현과 남궁민이 취월걸개를 떠난 남궁세가.

언제나 사람이 가득했던 숙소 옆 공터에는 소화 혼자였다.

“여기가…. 이렇게 넓었나?”

소화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지박령처럼 언제나 수련하고 있던 하현은 소림을 향해 떠났고, 남궁환은 폐관 수련을 들어갔다.

그리고 하현이 없으니 팽헌홍도 자연스럽게 오지 않게 되었다.

“하현이는 원래 이런 곳에서 혼자 수련을 해왔던 거구나.”

생각해보니, 아무도 없을 때 하현이 혼자서 수련한 적은 있어도, 하현이 없을 때 그녀 혼자서 수련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소화는 요즘 잘 때도 옆에 두고 자곤 하는 그녀의 애검을 뽑아 들고 공터의 한 가운데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휘익-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이년 전과 비교해보면 이곳의 광경도 사뭇 달라져 있다.

원래는 공터에 짧은 풀이 가지런히 나 있던 곳이다.

그런데 수련하며 얼마나 밟고 쓸었는지,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풀도 나지 않는 흙바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면에는 목검이나 간단하게 덧대어 방어할 수 있는 각반 같은 물품들이 들어있는 상자도 놓여 있었다.

어느새 이곳은 그들만의 연무장이 된 것이다.

“하압!”

그녀는 기합을 외치며 삼재검법을 펼쳤다.

청룡각의 정식대원이 되고 나서 그녀는 수많은 상승이 검법을 배웠건만, 하현을 생각할 때 항상 떠오르는 것은 이 삼재검법이었다.

그녀는 그때 하현이 만들어낸 바람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화악-!

그녀가 일으키는 검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일었다.

때로는 난폭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마치 바람을 부리는 풍신(風神)이라도 된 듯, 소화는 무아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만족할 만큼 검을 휘두른 소화가 검을 갈무리했다.

“후우…. 후우…….”

비록 거친 숨을 몰아쉬고 굵은 땀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이지만…. 보이는 것 같아.”

소화는 그녀가 일 년 전쯤의 하현과 같은 수준에 도달했다고 확신했다.

이번 혈랑과의 전투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비단 하현과 남궁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감정이 일었다.

첫째로는 이제 겨우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뿐 하현은 아직도 저 멀리 앞서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는 ‘누나. 이제 작년의 내 수준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조금 더 수련하면 되겠어.’라고 말하며 그녀를 놀려 줄 하현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내일부터는 여기 말고 청룡각 연무장에나 가서 할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현과 함께 수련하기 전에는 혼자서 수련하는 걸 좋아하던 소화였건만, 지금은 오히려 이 적막한 분위기가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녀가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돌아설 때, 그녀는 누군가 공터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소화야.”

“팽 오라버니?”

팽헌홍이었다.

그는 소화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항상 세가 내에 있었는데, 왜인지 오랜만인 것 같네.”

“그거야 뭐, 내가 연무장에 가질 않았으니까. 오라버니는 왜 여기에 안 온 거야?”

“나는 네가 이제 여기서 수련을 안 할 줄 알았거든.”

“내가?”

팽헌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좋은 연무장을 놔두고 굳이 이곳에서 수련하는 이유가 하현과 함께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하현이 오랜 임무를 나가기로 했으니, 자연히 연무장에 올 줄 알았어.”

“뭐. 그런 것도 있는데. 여기가 이제 연무장만큼 편해져서. 그런데 내일부터는 나도 연무장으로 가려고.”

“그래? 하하. 잘 됐다. 내일부터는 연무장에서 보자.”

소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잠깐. 그러면 오라버니는 나랑 같이 수련하려고, 청룡각 연무장에 가 있었다는 거야?”

“그래. 나는 너랑 같이 수련하고 싶으니 말이야.”

“왜 나랑 같이하고 싶은데?”

“그건…. 나한테는 너밖에 없으니까.”

소화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어느덧 소화의 나이 열넷.

소화는 팽헌홍의 갑작스러운 말에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뭐, 뭐지? 하긴. 민 오라버니나 하현이한테 못 미쳐서 그렇지 제법 남자답게 생긴 것 같기도…….’

소화는 그 짧은 순간에 도제 팽길산이 팽헌홍은 엄마를 닮아 그처럼 덩치가 커지지 않는다는 말까지 상기했다.

당황하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 소화를 빤히 쳐다보던 팽헌홍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전력을 다했을 때 대등하게 대련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뭐?”

“내가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지금 상황이 조금 애매해서 말이야.”

팽헌홍은 농담이 아닌 듯 눈빛이 진지했다.

“우리 기수들은 이제 아무도 내 상대가 못 되고, 그렇다고 선배들은 나보다 많이 앞서있고. 나와 현재 실력이 엇비슷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밖에 없다. 소화야.”

“그게 다야?”

팽헌홍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또 뭐가 있어?”

“후…. 그럼 그렇지. 난 또 뭐라고.”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부웅-!

“으악! 갑자기 왜 이래?!”

팽헌홍은 소화가 급작스럽게 검집째로 그를 향해 휘두르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찍으며 겨우 피해낼 수 있었다.

“왜. 대련하고 싶다며? 그 소원 바로 들어주는 건데.”

“나, 나는 아직 준비가.”

“무림에서 적이 준비하고 공격하디?!”

부앙!

“그, 그만해!”

“아하. 적이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하는가 보다?”

팽헌홍은 평소에 보법 수련을 열심히 했는지 가까스로 소화의 검집을 피해냈지만, 아쉽게도 소화의 보법이 한 수 위였다.

그녀는 뒤로 밟아 도망치는 팽헌홍의 보법을 코앞까지 따라가, 검집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을 팽헌홍의 복부에 내질렀다.

퍼억-!

“으윽! 쿨럭, 쿨럭.”

소화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는지, 매섭게 내지른 주먹 한 번에 팽헌홍은 바닥을 구르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소화는 그 광경을 보고, 조금은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대련은 더 못하겠네. 내일 연무장에서 봐. 내일은 한 대로 안 끝날 테니까. 흥!”

그녀는 바닥에 앉아 배를 부여잡고 있는 팽헌홍에게 콧방귀를 뀌어 주고는 숙소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팽헌홍은 소화에게 대꾸도 못 하고, 망연자실하여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소화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팽헌홍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그런데 그의 얼굴은 웃는 얼굴이었다.

분명히 얻어맞은 그이지만, 그 일은 까맣게 잊은 듯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는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리다가 다시 배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았다.

“아이고…. 아파라.”

머리는 소화에게 얻어맞은 것을 잊으려 했건만, 몸의 고통은 잊히지 않았다.

팽헌홍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 고통을 삭이고서는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 * *

하남성 개봉.

하현은 드디어 개방 총타에 도착했다.

“이 언덕만 넘으면 총타다.”

취월걸개를 따라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와아……!”

하현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짚이나 나무를 가져와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움막들이 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경이었다.

“이곳이 개방의 총타다. 멋지지?”

“네. 정말 멋져요!”

개방의 총타는 솔직히 말해 곧 거지 소굴이다.

남궁민은 어디가 멋지다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하현이 눈을 빛내며 좋아하고 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굉장해 보이긴 했다.

‘온 무림에서 문도의 수가 가장 많은 것이 개방이라더니.’

정말이지 움막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지들뿐만 아니라 온 중원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거지를 생각하면 이것도 새 발의 피지만.

“저기 멀리 절벽이 보이느냐.”

“네. 사부님!”

“저 절벽 바로 앞에 방주님이 계신다.”

“저기를 가야 하는군요.”

“그렇지.”

취월걸개는 자신만만하게 언덕을 내려갔다.

평소에도 잔뜩 올라가 있는 어깨가, 오늘은 한층 더 높아 보였다.

그 이유는 당연했다.

잊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지만, 취월걸개는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인 개방에서도 서열 순위로는 손에 꼽히는 무인이다.

사실상 당대의 방주마저도 한 수 접어준다고 하는 정파 무림의 영웅.

이렇게 대낮에.

그것도 잘 나타나지도 않는 취월걸개가 나타나자 수많은 개방 거지들의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장로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장로님!”

일부 거지들은 며칠 전 만났던 마윤철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하기도 했고, 또 어떤 거지는 취월걸개와 익히 알고 지냈는지 친근하게 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하. 하현아. 잘 보았느냐?”

“와. 엄청나요. 사부님!”

“그렇지? 잘 봐두거라. 얘네들이 싹 다 네 밑이다!”

“하…. 하하…. 역시 왕거지 할아버지…….”

“방금 뭐라 했느냐?”

하현이 다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싱겁기는.”

취월걸개와 하현은 수천의 거지에게 인사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절벽 앞에 도달했을 때는, 천하의 취월걸개마저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이고, 기 빨려라. 내가 이래서 여기에 잘 안 오는 것이다. 오더라도 밤에 잠깐 왔다 가지.”

그는 고개를 진저리가 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자연이 만들어놓은 관문처럼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 사이를 지나갈 때.

두 사람의 인영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나타났다.

“지환. 노삭. 오늘도 너희들이냐.”

며칠 전에 방주를 만나러 왔을 때도 방주의 호위를 맡고 있던 그들이었다.

“장로님. 오셨습니까?”

“그래. 내 금방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사실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에는 오신다고 하시고서는 잘 안 오셔서…….”

취월걸개가 지환에게 눈을 부라리려 할 때, 노삭이 재빨리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아이입니까?”

“그래. 이 아이가 하현이다.”

하현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남궁하현입니다.”

“하하. 참 잘 생겼구나. 얘기는 들었다.”

“네가 그렇게 총명하다면서?”

지환과 노삭이 하현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취월걸개가 중간에서 그들을 막아섰다.

“그런데, 너희 말이 좀 짧구나.”

“네? 저희가 언제…. 장로님께 말을 함부로 했습니까?”

“아니. 나 말고. 하현이한테 말이야.”

둘의 표정에 의문이 쌓여갈 때, 취월걸개가 말했다.

“너희가 방주님의 사질들이지? 하현이는 내 제자이니 배분으로 따지면 너희 사숙뻘이지 않으냐.”

“……!”

그들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 모습을 본 취월걸개는 낄낄 웃으며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빠진 표정 할 거면 계속 거기에 있어라. 나는 방주님을 뵐 테니.”

“아, 아닙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장로님. 가시죠. 사, 사숙…….”

“감사합니다.”

하현은 아예 체념했는지 한숨을 푹 쉬고는 잠자코 그들을 따라갔다.

그런데 노삭이 남궁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참. 그러면 이쪽은 청룡신검입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남궁세가의 남궁민입니다.”

남궁민은 정중하게 그들에게 포권했다.

“원칙상은 다른 방파의 무인은 무기를 가지고 이 영역에 들어올 수는 없으나, 취월걸개 장로님을 보아 예외로 하겠습니다.”

“배려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남궁민과 노삭은 서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 생각했다.

‘보통이 아니다. 역시 청룡신검의 유명세는 진실이었군.’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개방에도 대단한 고수가 많군.’

그들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후에 방주의 움막으로 함께 갔다.

“방주님. 취월걸개 장로입니다.”

지환이 말하자 곧장 움막에서 개방의 방주 천애신개가 나왔다.

그들이 도착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듯 보였다.

“방주님을 뵙습니다. 현아. 일로 와서 인사드리거라.”

“방주님을 뵙습니다.”

하현은 지금까지 다른 거지들이 취월걸개에게 하듯, 시키지 않아도 방주에게 절을 하며 인사했다.

“듣던 대로 잘 생겼구나. 일어나거라. 우리 개방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

천애신개는 인자한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너를 한 번 꼭 보고 싶어서 너를 불렀다. 이런 거지 소굴로 불러 미안하구나.”

“당연히 찾아뵈었어야 했습니다. 저도 이제 반은 개방의 사람인걸요.”

하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애신개는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짐짓 엄정한 얼굴로 하현에게 말했다.

“아무리 거지들이 만든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개방은 규율이 엄격한 곳이다.”

“네. 그 얘기는 장로님께 미리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규율에 대해서도 들었느냐?”

“그건 방주님께 직접 들으라고 하여 아직 못 들었습니다.”

천애신개는 취월걸개에게 고마움을 담은 눈길을 보냈다.

취월걸개는 지금 이 장면이 기꺼운지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바로 말해주도록 하겠다.”

“네. 방주님. 새겨듣겠습니다.”

“우리의 방규는 단 하나다.”

“하나요?”

“그래. 이것이다. ‘의를 숭상하라.’”

천애신개의 진지한 목소리가, 하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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