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의를 숭상하라.
얼핏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방규가 겨우 저거 하나인가?
하지만, 개방은 거지들의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 방규 덕분에 정파의 당당한 한 축으로 인정받는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땅히 명문정파의 제자라면 의(義)와 협(俠)을 중요시해야 한다. 특히나 우리 같은 거지라면 더더욱.”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그 하나뿐인 방규를 듣는 그 순간,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으니까.
‘하현아. 우리 무림인들에게는 의와 협이 가장 중요하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칼을 들고 설치는 명분이자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의와 협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 백정이나 다를 바 없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미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하현이었다.
“호오?”
천애신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 하현이 짓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열세 살의 아이가 짓는 표정으로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하현의 얼굴을 보고는 평생 제자에 관심도 없던 취월걸개가 어째서 이 아이에게 빠져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에야 개방에서 가장 높은 방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다지만, 그 역시 백의개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를 지금의 위치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허허…. 영특한 아이라더니…….”
천애신개는 문득 하현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현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이건 개방의 속가제자로서가 아닌, 당당한 정파 무인으로서 묻는다. 세상이 우리를 정파라고 일컬어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조금 더 정확히. 왜 세상이 우리를 사파와 구분하여 불러주는지 알겠느냐?”
어째서 정파라고 불리는가.
평소에는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정파와 사파의 구분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질문 역시 새롭게 다가왔다.
그때 하현이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남궁세가는 명문정파니까.
정파는 좋은 편이고, 사파는 나쁜 편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의 고민이 일었다.
‘그런데, 좋은 편과 나쁜 편은 누가 가르는 것이지?’
그 순간.
하현은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할아버지와 함께 세가 주변의 마을을 거닐던 것을.
그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표현했었다.
‘가족’이라고.
스윽
하현이 눈을 슬며시 떴다.
오래 생각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의 시야에 한가득 커다란 풍채의 천애신개가 들어왔다.
그는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로 방주에게 말했다.
“천하 중원의 백성들입니다.”
“……!”
천애신개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희 조부님께서 말씀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의와 협이 없으면 무림인은 인간 백정과 다를 것이 없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지금껏 제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백정이라…….”
하현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 해주신 질문 덕분에 그 뜻을 이제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천애신개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웃으며 하현을 바라보았고, 하현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양민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무공을 모르는 자들. 그들과 함께 이 거대한 중원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정파이고, 이런 양민들을 유린하고 수탈하여 탐욕을 채우는 자들을 사파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천애신개는 그 후덕한 인상이 녹아내릴 정도로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만약 깨끗한 옷을 입히고 머리를 깎았다면, 부처님의 뜻을 깨달은 고승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인자한 웃음이었다.
“더 해보거라.”
“우리가 정파라고 불리우는 까닭은. 우리가 양민들의 군림하려는 것이 아닌, 그들과 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천애신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취월걸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취월걸개 장로님.”
“네. 방주님.”
“여태 이 아이를 데려오시려 평생을 그리 외롭게 사셨군요.”
“그렇게 외롭지는 않…. 그랬나 봅니다.”
천애신개는 깊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 아이에게는 더 해줄 말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방규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미 당당한 정파의 무인이군요.”
취월걸개가 활짝 웃었다.
용두방주가 하현을 칭찬하는 것이, 그 자신을 칭찬하는 것보다 더욱 기분이 좋았다.
“잠시 하현이와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하현아 너도 괜찮지?”
“네. 사부님.”
하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려있었다.
“자, 그러면 따라서 오너라.”
“네.”
천애신개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릿느릿하게 보이는 걸음이, 걸어서는 따라가기가 힘들어 하현은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갔다.
실로 신묘한 신법이었다.
그는 절벽 위를 향해 올라갔다.
하현은 그를 따라가며 그의 발걸음을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방주님. 개방 분들은 다들 이렇게 신법이 대단하신가요?”
“하하! 동냥질하다가 제일 힘든 게 무엇인지 아느냐?”
“춥고, 배고픈 거요?”
“아니다. 그건 거지의 일상이지. 아침에 눈을 뜨고 해가 떠오르는 걸 힘들다고 하진 않지.”
그의 과장된 말투에 하현이 쿡쿡 웃었다.
오늘 처음 보았고, 개방의 방주라는 다가가기 힘든 위치였건만, 하현은 벌써 그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러면 뭐예요?”
“쪽박 깨러 오는 사람과, 개란다.”
“아하!”
“그리고 그 둘한테서 도망치려면, 자연스럽게 신법이 발달하게 되지. 이것처럼.”
휘이익-!
천애신개의 몸에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그는 이미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신법이라면 하현도 자신 있는바.
그도 신법을 펼쳐 천애신개를 따라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천애신개는 저 후덕한 몸을 가지고도 구름을 타고 노니는 듯 가볍게 발걸음을 놀렸다.
하현이 그를 따라잡았을 때는 어느덧 절벽의 꼭대기에 도착할 때였다.
“제법 신법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네. 또 최근에 열심히 시켜주는 분이 계셔서요.”
“하하! 그 가르침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분이 대단한 분이라고는 하나,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처음이시니.”
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천애신개는 하현이 취월걸개를 말하는지 한 번에 알아맞히었다.
둘은 잠시 그를 생각하며 웃었다.
그러던 천애신개가 하현을 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이곳을 보거라.”
천애신개는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하현은 그의 손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와…!”
절벽 아래에는 수평선이 끝나는 곳까지 빽빽하게 움막들이 보였다.
분명히 총타에 처음 들어섰을 때, 취월걸개가 언덕 위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광경이었지만, 더 높은 곳에서 보아서일까? 그 규모가 달랐다.
그래서 하현은 아까보다 더욱 크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분명히 총타에 들어설 때, 마지막 언덕을 넘으며 이렇게 우리 거지들의 거처가 수없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현이 여전히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면 어떻게 보이느냐?”
“더 멀리 보여요. 그리고 더 많이 보여요. 아까는 그저 대단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이 숫자에 압도되는 느낌입니다.”
천애신개가 또박또박 대답하는 하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내가 용두방주가 아니었다면, 제자로 삼고 싶었을 아이이다.’
개방의 방주는 함부로 제자를 들일 수 없다.
방주는 후개로 선정된 단 한 명의 제자만을 들일 수 있으며, 그 후개는 전대 용두방주의 모든 진전을 이어받고, 다음 대의 방주가 된다.
하현이 만약 개방의 방도였다면, 후개로 욕심내었을 재목이었다.
“이 광경을 마음 깊이 새기거라.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많은 것을 보아야 하고, 많은 이들을 책임져야 한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용두방주가 해준 말은 하현에게 또 다른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하현은 지금껏 강해지는 것,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해왔다.
허나, 지금 배운 것이다.
그가 강해지고, 높아질수록 소중한 사람들, 시켜야 할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천애신개는 하현의 표정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반쪽짜리 속가제자라고 하여도, 하현은 이제 엄연한 개방의 방도라는 것이 그를 뿌듯하게 했다.
“우리 개방은 비급을 쓰지 않는다. 모든 무공의 전수는 구결(口訣)로 이루어지지.”
천애신개가 하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은, 무공 하나를 전수해주기 위함이다.”
“무공을요?”
“그래. 진실로 의를 숭상할 줄 아는 방도에게 방주가 무공을 전수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다만, 나는 단 한 번만 구결을 일러주고는 다시는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하현은 저절로 진지해지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기억할 만큼 기억하고, 빠진 구결은 앞으로 평생 공부해 가며 네가 채워 넣어야 한다.”
천애신개는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그가 하현에게 일러주는 무공은 검법이었다.
규지검법(叫枝劍法)이라는 검법.
개방에서는 검을 쓰는 제자가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오랜 역사에서 검법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다. 규지검법은 무림에 몇 번 선보인 적은 없지만, 악을 처단하는 패도적인 검법이었다.
‘본디 이 검법은 혼천강룡신공(混天降龍神功)을 함께 전수해야 하는 검법이지만…….’
규지검법은 특이하게 초식으로 시작해 검법으로 굳어진 무공이 아니었다.
혼천강룡신공을 익히다가, 그 기운을 검으로 표출한 것이 초식이 된 무공.
그렇기에 하현이 만약 무공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는 혼천강룡신공을 함께 전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현의 수준을 보았을 때는 이미 상승의 심법을 익힌 것으로 보여 전수하지 않았다.
혹시나 두 가지의 심공을 함께 익혔을 때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기에.
“잘 들었느냐.”
“…….”
어느덧 구결이 끝나고.
천애신개는 하현에게 물었지만, 하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가 하현을 슬쩍 바라보니, 하현은 눈을 감고 있었다.
“……?”
천애신개가 하현이 대답이 없는 것이 의아하여 그에게 다가갔는데, 그때 하현이 털썩하고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하현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천애신개는 묵묵히 하현의 곁을 지켜주었다.
쿠웅-
그러던 순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하현의 주변에서 강력한 기파가 일어났다.
천애신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쿠웅-!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파가 일었다.
이제야 그 기파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은 천애신개의 두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이…. 이 기운은……?!”
그는 개방의 방주로서 혼천강룡신공의 구결을 외우고는 있지만, 직접 익히지는 않았다.
그는 후개로 선정되어야만 익힐 수 있는 옥현귀진현공(玉玄歸眞玄功)을 익혔기 때문에.
하지만 천애신개는 그가 후개시절 정마대전에서 유명을 달리한 개방의 장로 한 명을 떠올렸다.
그는 짧지 않은 생에 유일하게 그에게서만 이런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무정귀개(無情鬼丐) 장로님……!’
비록 정마대전에서 사망하였다곤 하지만, 그는 취월걸개보다도 한 배분이 더 높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를 개방의, 아니 무림의 최고수 중 하나로 만들어준 무공이 바로, 혼천강룡신공과 규지검법이었다.
“규지검법은 그렇다 치고, 혼천강룡신공은 어찌……?!”
아니, 천애신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혼천강룡신공을 하현이 알고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혹여 알고 있다고 해도 한순간에 그 심공을 이용한 기파를 내뿜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쿠웅-!
하현의 몸에서 한 번 더 기파가 터져 나왔을 때, 천애신개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혼천강룡신공이 아니다……!’
그가 알고 있는 혼천강룡신공과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
하지만 그가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잦아든다 싶더니, 하현이 스르륵 눈을 떴다.
천애신개는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것이 한가득하였지만, 하현의 얼굴을 보니 막상 아무런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하현의 얼굴은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고 고요했다.
하현이 가볍게 일어나 천애신개의 앞에 섰다.
“방주님. 제가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 그래라.”
방주의 허락을 받은 하현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주변에 충분한 공간이 있음을 확인한 하현은 검을 뽑아 들었다.
샤악-
잘 벼려진 검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제가 익힌 바가 맞는 것이지, 한 번만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현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십 년 전.
마교에 의해 진전이 끊긴 규지검법의 온전한 재현이었다.
“아…! 무정귀개 장로님!”
그 움직임을 보며 천애신개는 저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