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76화 (76/304)

76화

절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후, 천애신개는 하현을 가까이했다.

아니, 그냥 가까이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옆에 끼고 다니다시피 했다.

“끄응…. 방주님. 제 제자인데.”

“맞습니다. 누가 장로님 제자가 아니라고 했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애신개는 하현은 취월걸개의 옆으로 보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뭔가 뺏긴 느낌입니다.”

“뺏기다니요. 방주가 방도를 아끼는 것을 어찌 그렇게 표현하십니까?”

“그건 또 아니지만…. 그러다가 혹여 방주님께서 제자 삼으신다고 하시면…….”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어떠냐 하현아. 정식으로 개방에 입문하고, 나의 제자가 되는 건?”

“방주님!”

취월걸개가 소리를 빽 지르자 천애신개가 신나게 웃어댔다.

하현은 할아버지 말고도 천하의 취월걸개를 놀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들이 다시 개방을 떠나는 순간까지 천애신개는 하현을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주었다.

개방의 역사부터 다시 한번 정의에 대한 강조까지.

짧은 시간 안에 하현에게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주려는 그의 마음이었기에 하현은 성실히 새겨들었다.

개방에서의 시간은 짧았다.

이미 달이 하늘에 걸려 있는 한 밤.

하현은 개방을 떠나려 했다.

“저 오늘 여기서 자도 되는데…….”

“하하. 네가 아직 빈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여기에서 자며 고생하지 말고, 멀리 떨어져서 자거라.”

천애신개는 자신도 결국 거지 왕초임에도 불구하고 하현을 걱정했다.

거지가 아닌 하현이 이곳에서 자는 것, 먹는 것까지 모두 신경이 쓰였다.

“방주님. 제가 말하려다 잊고 이제야 말하는데, 고시 분타에 제법 재능있는 놈이 있습니다.”

“그래요?”

“네. 마윤철이라고 눈치도 빠르고, 무공에 대한 자질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개방에 어울리는 거지입니다.”

천애신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걸개가 저렇게 말할 정도이면, 괜찮은 인재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고시분타로 곧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주님.”

“청룡신검. 제대로 대접해야 했었는데, 소홀하게 대한 점. 사과하오.”

“아닙니다. 방주님. 저에게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남궁민이 예의 바르게 포권했다.

천애신개가 하현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남궁민은 지환, 노삭과 가볍게 대련하며 서로의 무학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그로서도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음에 또 오시오. 하현아. 너도 꼭 다시 오거라.”

“네. 방주님.”

“그럼. 이만.”

방주가 하현에게 보이던 집착과는 달리 헤어짐은 가벼웠다.

그는 인사하고는 거침없이 뒤로 돌아 다시 움막으로 들어갔다.

“우리 개방도는 원래 헤어짐이 쉽지. 항상 온 중원을 떠돌며 동냥하고, 정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이다. 그 때문에 곧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쉽게 뒤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맞아요. 다시 만날 테니까요.”

취월걸개는 아쉬운 표정의 하현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자. 그러면 가자.”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먼저 총타 주변을 벗어나서 하룻밤 쉬고, 내일 낮에는 곧장 숭산으로 갈 것이다.”

“드디어……!”

하현은 기대감이 잔뜩 든 얼굴로 말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남궁민도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르신. 아직 남궁세가를 떠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약속은 한 달 뒤라고 하셨는데…….”

“왜. 남는 시간 동안 놀라고 할까 봐?”

취월걸개는 하현과 남궁민 둘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숭산에 도착한다고 해서 바로 소림에 갈 것은 아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숭산이 조그만 산으로 알고 있는데, 중원 오악(五岳) 중에 중악(中岳)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산이 바로 숭산이다. 일단 숭산에 도착하면, 열흘 동안 나와 수련할 것이다.”

남궁민이 이제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취월걸개는 그런 남궁민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째 수련을 한다고 하는데 기분이 좋은 얼굴로 보이는구나.”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이신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아볼 기회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그 대답에 취월걸개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너 이렇게 말까지 잘하면 안 된다니까? 하늘은 네놈한테 모든 걸 다 주었나 보다! 이런 불공정한 인생 같으니라고.”

취월걸개는 꿍얼거리며 이번에도 앞서나갔다.

남궁민과 하현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맑게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 * *

숭산은 크게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서쪽의 봉우리는 소실(小室), 가운데의 봉우리는 준극(峻極), 동쪽의 봉우리는 태실(太室)이라고 불린다.

그중에 소림이 있는 봉우리는 셋 중에 가장 낮은 봉우리인 소실이었다.

가장 낮다고는 해도 세 봉우리 중에 낮은 편이라는 것이지, 절대 낮은 높이는 아니지만.

“이곳이 바로 준극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준극은 숭산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지.”

취월걸개가 길이 갈라지는 곳 앞에서 서서 하현과 남궁민에게 말했다.

하현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아찔하게 높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안력을 집중해야만 흐릿하게 보이는 수준이었다.

“하현아.”

“네. 사부님.”

“준극 정상에는 조그만 평지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가져다 둔 것이 있다.”

“꼭대기에요?”

취월걸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건데요?”

“그건 올라가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남궁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올라갔다 오셨습니까? 계속 같이 있었는데…….”

“저번에 소림에서 주원땡중이랑 만나고서 가져다 놓고 왔다. 어차피 그 전에 너희들이랑 같이 올 것이니 말이야.”

“그렇군요.”

취월걸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하현이 너는 정상으로 가서 그걸 가져와라.”

“그냥 가서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다만 엿새 안에 갔다 와야 한다.”

“엿새라면…….”

하현은 다시 한번 끝없어 보이는 준극의 정상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고시에서 허창까지도 하루 만에 갔는데요 뭐!”

“그래. 한 번 요령껏 해봐라. 뭐. 한 가지 조언을 주자면. 정상까지는 하루나 늦어도 이틀 안에는 올라가야 할 게다.”

“최대한 빨리 올라가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취월걸개는 하현에게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하현이 그 안을 보니, 언제 준비했는지 비상식량과 작은 수통이 하나 들어 있었다.

“모자란 식량이나 물은 알아서 조달하고. 잘 다녀와라. 그리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닌, 소림사로 바로 오면 된다.”

“알겠습니다.”

“소림사는 소실 입구까지만 가면 계단이 주욱 깔려 있으니 찾는 데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야.”

취월걸개는 하현에게 말하고서는 남궁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민이는 나와 바로 소림으로 가자. 네 수련은 그곳에서 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어르신.”

하현이 출발할 마음을 먹은 것 같자 취월걸개가 하현에게 말했다.

“잘 갔다 와라.”

“넵! 사부님.”

하현은 곧바로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지 한 시진쯤이 지났을 때.

이때까지 하현은 여유로웠다.

‘이 정도면 엿새가 아니라, 사흘 만에도 돌아갈 수 있겠는데?’

그가 빠르게 뛰어 올라갈수록, 정상이 가까워지는 것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길이라 뛰어가는 데 힘들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뛰다 보니 요령도 생겨서 처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냥 달릴 때는 전체적으로 다리에 힘을 준다는 생각으로 뛰었는데, 이렇게 산길을 올라갈 때는 허벅지에 기운을 더 불어넣는다는 느낌으로 가면 편하구나.’

하현은 끝없어 보이는 산길을 타고 올라가는 것에 조금은 재미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 시진쯤 지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체력이나 내공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산‘길’이라고 부를만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끊기고 숲을 헤치고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된 문제였다.

“어? 여기, 한 번 왔던 곳 아닌가?”

하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한 숲의 한 가운데에서 하현은 지나가다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었다.

바위 모양이 특이하여 웅크린 곰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바위였다.

그런데 그 바위가 또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음…. 아니겠지.”

하현은 다시 한번 소나무 숲에 들어서며 고전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번에는 뛰지 않고 걸어가면서 나뭇가지를 하나씩 부러뜨리며 숲을 헤쳐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아니, 또 여기라고?”

한참을 숲을 헤쳐나갔다고 생각했건만, 하현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까의 그 바위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하현은 숲을 빠져나가려 노력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

심지어는 산에서 내려가는 방향으로 달려도 똑같이 이곳으로 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혹시?”

하현은 가장 가까운 나무를 박차고 위로 튀어 올랐다.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하현은 그 재서야 깨달았다.

“정상이 보이지 않아……!”

그리고 아래를 내려보아도 하현이 올라왔던 산길은 이미 사라졌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하현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소나무 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나무 아래로 내려와 땅을 디딘 하현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런 이질적인 느낌을 예전에 어디서 받았는지 떠올리는 것이었다.

“아……!”

하현은 금방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 년 전, 정덕현에서 정대인의 장원에 들어섰을 때 이런 느낌을 받았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진법(陳法)이구나!”

어떻게 이곳에 진법이 펼쳐져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현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진법을 깨지 못하면, 더 이상 진전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 * *

그 시각, 소림사.

취월걸개와 함께 소림사에 먼저 와 있던 남궁민은 지금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민아. 어떠냐. 한 판 더 해볼 테냐?”

“후우…. 아주 잠시만 쉬었다가 해도 되겠습니까?”

힘 빠진 남궁민의 말에 취월걸개가 낄낄대며 웃었다.

“네 입에서 쉬었다가 하자는 말이 나올 줄이야.”

“어르신께서 손속에 사정을 봐주지 않으시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취월걸개가 말한 남궁민의 수련은 바로 그와의 대련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취월걸개는 남궁민에게 무언가를 더 가르칠 게 없었다.

아니, 있었다고 했어도 사람을 가르치는 것에는 초보자인 취월걸개가 어려서부터 남궁세가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남궁민에게 가르칠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계속해서 붙다 보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겠지!’

그래서 택한 방법이 바로 대련이다.

남궁민이 아무리 어린 나이부터 청룡신검이라는 별호로 불리기도 하고,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취월걸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궁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련에서 모든 공격이 막히는 경험을 해 보았다.

“그래도, 점점 맞아들어가고 있다. 역시 네 재능도 현이 못지않게 무섭구나.”

“하하. 아직 어르신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습니다.”

“예끼, 세월이 있는데 벌써 나를 따라잡으려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처음 대련을 했을 때 만해도, 어림도 없었을 남궁민의 공격이 하루 만에 거의 닿을 정도까지 발전했다.

남궁민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땀 흘리며 하는 수련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르신.”

그런데 남궁민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하현이가 조금 걱정입니다. 괜찮을까요?”

“무엇이. 내가 쳐놓은 진(陳)에서 못 빠져나올까 봐?”

“그런 건 아니지만…….”

“클클. 하현이가 진법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지? 그러면 직접 몸으로 알아내는 게 제일이다. 진법이 얼마나 신묘한 힘을 내는지.”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그대로 진법은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죠.”

“그래. 아무런 방비도 없이 십팔나한진을 상대했다가는 그 힘에 놀라서 어리바리하다가 순식간에 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어찌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셨습니까?”

“무모해?”

취월걸개의 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남궁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혹시나 하현이 진을 파훼하지 못하여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시려고…….”

취월걸개는 조금 전보다 더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넌 하현이 형이라면서 그 아이를 그렇게 모르냐?”

“제가 무엇을…….”

“하현이가 못 돌아오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그 정도는 충분히 파훼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그는 얼굴에 신뢰라는 두 글자가 쓰여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 하현에 대한 걱정이 사라져 가볍게 웃을 수 있었다.

“하하. 맞습니다. 제가 아직도 하현이를 너무 어린아이로만 보았군요.”

“그리고 내가 엿새 뒤에도 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직접 가서 진을 해체할 것이다. 혹시 몰라 그 안에서 굶지 말라고 식량도 챙겨준 것이고.”

남궁민은 취월걸개가 생각보다 무척이나 세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해. 인제 그만 쉬고 일어나라. 다음 대련을 해야지.”

남궁민은 하현에 대한 걱정은 접고, 그에게 무엇 하나 더 배울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