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하현이 진(陳)에 갇힌 지도 꼬박 하루가 흘렀다.
그는 웅크린 곰 모양의 바위 위에 앉아 비상식량을 먹으며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어쩐지, 사부님께서 이 비상식량을 너무 쉽게 주셨던 게 이상하다 싶었어.”
평소에 자급자족을 그토록 강조하던 취월걸개다.
그런 취월걸개가 먹을 것을 건넸을 때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그 일은 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이곳을 탈출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 되지 않는 생각이었으니.
그는 하루 내내 모든 방위를 다 가보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들어 땅에 직선을 그으며 나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그러면 생각을 해보자…….”
하현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청룡각에서 수련할 당시에 남궁규현은 분명히 진법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었으니까.
‘진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두 가지는 인술진(人術陳)과 기문진(奇門陣)이다.
‘인술진은 사람이 직접 참여하는 진이고, 기문진은 자연물이나 인위적으로 설치한 장치 따위로 만들어내는 진이다.’
하나가 기억나기 시작하자, 봇물 터지듯 기억이 밀려들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와 수련할 때 할아버지가 스쳐 가듯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인술진과 기문진을 다르게 구별하지. 하지만, 그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진의 구성을 사람이 하면 인술진. 사물이 하면 기문진일 뿐이지.’
하현의 머리가 팽팽이 돌아갔다.
“진법을 구성하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하현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내리고, 그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진법은 발동시키기가 굉장히 어렵다.
절대 깨어져서는 안 되는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방위. 두 번째는 거리. 세 번째는 진법을 구성할 물건.”
결국, 진법은 그 구성을 위한 물건을 적당한 방위와 거리에 맞추어 배치하는 것이다.
“이 중의 하나만 틀어지더라도 진법은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면 결국 진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진법을 구성하는 물건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부수는 것.”
눈을 감고 생각하던 하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어떤 것이 진을 구성하고 있는 물건일지 찾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똑같아. 뭔가 특징이 될만한 게 있을 텐데…….”
하현은 한참 주변을 돌아다니며 무언가 특별한 것이 없는지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꼬박 하루 동안 돌아다닐 때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인제 와서 그런 것이 보일 리 만무했다.
하현은 다시 곰 모양의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눈에 특별히 보이는 건 없고. 계속 돌아다녀도 결국은 이 바위밖에…….”
하현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숙여 그가 앉아 있는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바위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지금껏 유심히 보지 않았던 바위 밑을 보았다.
얇게 쌓인 흙을 파내자, 곧바로 바위 밑동이 보였다.
그리고 하현은 이 바위가 바닥에 박힌 바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박힌 바위가 아니라는 것은, 이 바위가 원래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다는 뜻!”
하현은 바위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주변의 흙까지 조사해본 결과, 바위가 끌린 흔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이 바위가 옮겨졌다는 뜻은 곧 이 바위가 진법을 구성하고 있다는 뜻.
하현은 양손과 어깨를 바위에 대고 천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흐으읍!”
하현의 목과 팔의 힘줄이 불거지고,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이 온몸을 휘감지만, 사람보다 더 큰 바위를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흐아아아압!”
기합성을 내지르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하고 나서야.
스윽-
천천히 바위가 밀리기 시작했다.
하현은 더욱 다리에 힘을 주어 바위를 밀었다.
힘을 어찌나 주었는지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쏟아지는 땀의 양만큼 바위는 천천히 움직였다.
쿠구구구-
“으랴아압!”
하현이 괴성을 내지르며 마지막 힘을 짜내 바위를 밀어내자, 바위는 괴성을 내며 일 장여 이상을 밀렸다.
하현은 바위가 충분히 밀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바위에서 몸을 떼어냈다.
온몸의 기력은 다 빠져나간 듯하고 내공도 많이 소모했는지 순간 핑글 하늘이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인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구름에 가려진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진법을 파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하……!”
하현은 기분 좋게 웃으며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기쁜 것은 기쁜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운기조식으로 비어버린 단전을 다시 채워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 * *
한창 운기조식을 마친 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그가 밀어낸 바위를 슬쩍 쳐다보니, 두 가지 감정이 일었다.
‘와, 내가 이걸 민 게 맞나? 정말 발전 많이 했구나.’
첫 번째는 스스로에 대한 감탄이었다.
스스로가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이렇게 커다란 바위를 힘으로 밀어내니 실감 나는 듯했다.
‘진법이라는 것. 정말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파훼할 방법만 찾는다면 해볼 만하다. 어떻게 빠져나갈지 가늠도 가지 않던 진법도 이 바위를 고작 일 장 미는 것만으로 파훼 되었으니까.’
두 번째는 진법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였다.
하현은 취월걸개가 어째서 그를 이곳에 보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십팔나한진도 결국 파훼법만 찾아내면 상대할 수 있다는 거야.’
하현은 눈을 빛내며 다시 위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문득 하현은 취월걸개가 떠올랐다.
제자를 처음 가르쳐봐서 사실 자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취월걸개지만, 하현은 취월걸개가 굉장히 좋은 스승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진법에는 파훼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로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직접 진법까지 설치하면서 몸으로 깨닫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몸으로 경험한 것이, 말로 들은 것보다 더욱 좋은 공부가 되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휘이익-!
그를 가로막는 진법도 없고, 소모한 내공이 다시 채워진 하현은 어제보다 더 활기차게 산을 뛰어 올라갔다.
한참을 산봉우리만 바라보며 뛰어 올라가던 하현은 문득 깨달았다.
“어? 왜 산봉우리가 다시 안 보이지?”
설마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법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하현이 급히 지금 서 있는 자리 바로 옆 나무에 표식을 남기고 직선으로 뛰어 올라가 보니…….
다시 표식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주변에 아까의 바위와 같은 특징적인 구조물이 있는지 확인하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아니, 혹시.”
순간 하현은 오싹함을 느꼈다.
취월걸개가 준비해둔 진법이 이것이 끝이 아니라면?
“정상까지 몇 개가 있는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잖아…….”
어째서인지 귓가에 낄낄거리며 웃는 취월걸개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진법을 이루는 물건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
하지만 제일 큰 걱정은 취월걸개가 정도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좋은 스승이라는 건 취소야.”
하현은 조금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나아갔다.
오늘도 긴 하루가 될 것이 분명했다.
* * *
하현이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간 지 정확하게 엿새가 흘렀다.
오늘이 바로 하현이 소림사에 도착하기로 한 날.
여유만만한 취월걸개와는 달리, 남궁민의 얼굴에는 아주 조금의 걱정이 떠올랐다.
“어르신. 오늘이 하현이가 돌아오기로 한 날이 맞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왜 아직 소식도 없을까요?”
“내가 만들어 놓은 진법에서 오래 헤맸으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지.”
남궁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물었다.
“도대체 진을 몇 개나 해놓으신 겁니까?”
“나도 몰라. 한 열 개쯤?”
“어르신?!”
취월걸개는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내가 그것들을 설치하고 가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이틀이나 꼬박 걸려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너무 쉽게 파훼하면 재미없지.”
그는 남궁민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런데 네가 하현이 걱정을 할 때냐? 엿새 동안 결국 나를 한 대도 때리지 못했으면서.”
인제 보니 남궁민은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항상 깔끔하고 정갈한 옷을 입고 있던 그였건만, 지금은 옷으로만 보았을 때는 거지가 친구 하자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뭐, 이제야 내 소매 정도는 건드리는 것 같긴 하다만…. 억울하지도 않냐?”
취월걸개가 방실방실 웃으며 남궁민에게 말했다.
남궁민의 옷을 저렇게 만든 것은 취월걸개였다.
하루에 열 차례가 넘는 대련을 하면서 취월걸개는 남궁민을 수도 없이 난타했다.
남궁민도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신명 나게 얻어맞아본 기억은 평생 처음이었을 정도였다.
“너는 너무 진지한 게 문제라니까? 내 움직임을 예측하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이야. 넌 나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감각을 믿고 보이는 그대로 공격하면 된다.”
“말씀은 수도 없이 해주셔서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직 아둔하여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참내! 네가 아둔하면 세상에 제대로 머리가 달린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니까? 겸손이 너무 지나쳐도 꼴 보기 싫어!”
취월걸개는 빼액 소리를 지르고는 조금 진정되었는지 말을 이었다.
“네가 머리가 너무 좋은 게 문제다. 너무 머리가 좋으니까 자꾸 눈으로 본 걸 믿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하려 하지.”
“아……!”
남궁민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또다시 생각에 빠졌다.
취월걸개는 조용히 그가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다음번에는 진짜 잡히는 거 아니야?’
그러면서도 취월걸개는 조금은 불안했다.
남궁민이 저렇게 무언가를 깨닫고 나면 공격이 점점 매서워졌으니까.
취월걸개는 소림에서 내어준 지객당을 슬쩍 나왔다.
그리곤 슬쩍 준극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 누구보다 하현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지금이라도 산에 올라야 하나?’
그는 고민하며 천천히 소림사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마치 이대로 소림사를 나가 준극을 향해 달릴 것처럼.
취월걸개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쯤.
소림사의 정문에서 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내려오신 거란 말입니까? 저기 준극에서? 아미타불……!”
소림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승의 목소리로 보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취월걸개의 얼굴표정이 곧바로 환해졌다.
휘익-!
그는 신법을 전개해 입구로 한달음에 다가갔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의 시야에는 두 명의 사람이 보였다.
하나는 무언가를 보며 쩔쩔매고 있는 젊은 무승이었고, 또 하나는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온통 머리는 엉겨 붙고, 옷은 지저분해진 하현이었다.
“하현아!”
“사부님!”
취월걸개는 자신도 모르게 하현에게 달려나갔다.
엿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건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양팔을 벌려 하현을 맞이했다.
언젠가 그도 이런 장면을 상상한 적이 있다.
아이가 그를 향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이제야 그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나 싶은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어?”
하현의 속도가 줄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보법까지 밟아가며 속도를 높였다.
타다다-!
취월걸개는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며 놀랐다.
그의 희망대로 하현이 안기기는 했다.
그러나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취월걸개의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퍼억!
취월걸개는 결국 그 작지도 않은 덩치를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아파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사부님! 아무리 그래도 열 한 개는 너무 하잖아요. 열 한 개는!”
“그 정도는 돼야 진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그리고 가져오라는 저건 뭡니까?!”
하현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허리까지 오는 돌로 된 불상이 있었다.
그 불상은 지게에 올려져 있었는데, 취월걸개가 손수 친절하게 정상까지 지게를 가져다 놓았다.
“내려올 때는 너무 쉽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가지고 내려오다가 정말로 죽나 싶었습니다.”
“안 죽었잖아? 죽을 것 같은 경험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취월걸개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하현은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잃어버린 불상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그때 입구를 지키던 무승이 하현에게 합장하며 인사했다.
하현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하고 있을 때, 취월걸개가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내가 십 년 전에 주원을 골탕 먹이려고 거기에 가져가 올려놨는데, 얘네들이 아직도 못 찾고 있는 게 아니더냐. 그래서 너한테 가져오라 했지.”
하현은 황망한 눈빛으로 껄껄 웃고 있는 취월걸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지게는 가져다 놓지 않았느냐. 하하하.”
그는 이 순간, 취월걸개를 그의 스승으로서 믿을 수 있는 자인가에 대해 아주 잠깐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