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하현은 취월걸개와의 반가운 해후(?)를 나누는 사이, 입구를 지키던 무승이 하현에게 합장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시주가 취월걸개 장로님의 제자로군요. 저는 원철이라 하옵니다. 아미타불.”
“남궁하현입니다.”
하현은 짐짓 점잖게 포권하며 그에게 인사했다.
취월걸개는 그 둘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원철. 자네도 삼 대 제자이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럼 둘이 며칠 뒤에는 박 터지게 싸워야 하는데, 뭘 그리 예의를 차리고 있어?”
“저희가 비무를 하는 이유는 그저 그런 싸움이 아닌, 정파 후기지수들의 발전을 위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취월걸개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주원이 그러디?”
“네. 주원 큰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원철은 고개를 돌려 하현을 보고 말했다.
“어찌 되었든 시주. 이 불상을 찾아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법이지요. 모두 부처님의 뜻입니다.”
정중한 둘의 대화에 취월걸개는 차마 끼어들지는 못하고 ‘부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인데.’라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면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때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취월걸개는 둘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하현을 데리고 소림사에 들어섰다.
“이곳이 소림사구나.”
그는 조금 전에 취월걸개와의 소동도 잊어버리고, 소림사에 들어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통 절보다 조금 더 경견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소림사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어 보였다.
“현아. 지금 다른 절이랑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지?”
“앗…. 맞아요.”
“끌끌. 나도 이곳에 맨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랬지.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여기 보이는 이곳은 정말 보통 절이니까.”
취월걸개는 남궁민과 함께 머물고 있는 지객당까지 하현을 데려가며 소림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주었다.
“소림사라고 해서 우리 같은 무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무승들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 승려들이 더 많지.”
“그래요?”
하현이 얘기를 듣고 주변을 돌아보니, 주변에 스쳐가는 수많은 승려들에게서 무공을 익힌 흔적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이곳 소림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냥 불자들이다. 소림은 다른 문파와는 달라.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과 공존하는 곳이 이곳이다. 이런 문파는 전 무림에 단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소림이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인 줄 알겠느냐?”
하현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개방이군요.”
“그렇지. 개방의 절반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의개들이니 말이야.”
취월걸개는 하현이 곧바로 대답한 것이 기분 좋았는지 으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이야기하면서 걷기를 잠시.
그들은 곧 지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 앞에서 하현이 반갑게 남궁민을 부르려는데, 취월걸개가 그를 제지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는 살금살금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의 예상대로 아직도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는 남궁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뒤따라온 하현도, 지금 남궁민이 무슨 상태인지 한눈에 이해했다.
“중요한 순간이군요.”
“그래. 엿새 동안 몇 번을 이랬는지, 저 무공 수준에 아직도 깨달을 것이 있는지 신기하더라니까?”
취월걸개는 하현을 조용히 욕실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깨끗한 의복을 한 번 꺼내 주었다.
“사부님…….”
“거지 사부의 제자라고 해서 거지꼴을 하고 다닐 필요는 없지. 구석구석 씻고 나와라.”
“감사합니다.”
하현은 새 옷을 고이 받아들고 욕실로 들어섰다.
욕실에는 하현이 언제 올 줄 알고, 뜨거운 물이 나무통에 가득 들어 있었다.
취월걸개는 남궁민이 하현을 걱정할 때마다 나무라는 말을 해놓고서는 사실 매일 마다 뜨거운 물을 길어두며 하현을 기다린 것이다.
뜨거운 물을 끼얹자 지난 엿새간의 피로가 한 번에 풀리는듯했다.
하현은 괜히 찔리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스승님한테 몸통박치기는 너무 심했나?”
* * *
하현이 목욕을 마치고, 운기조식으로 기력회복까지 모두 마치니 약 한 시진 정도가 흘렀다.
그리고 그때, 남궁민도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눈앞에 있는 하현을 보고 싱긋 웃었다.
“현이 왔구나.”
“네. 형님. 잘 계셨죠?”
남궁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탈해 보이는구나.”
“네.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좀 힘들어서 그렇지.”
“하하. 그래도 진법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았지?”
하현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이제는 진법에 진이라는 말도 듣기 싫어요. 사부님은 정말 힘도 좋으시지. 진법을 짜실 때도 집채만 한 바위랑 아름드리나무로 짜 놓으셨더라니까요.”
“하하. 그렇지 않아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몇 번 말씀 하시던데.”
그때 뒤에서 취월걸개가 스윽 나타났다.
“다 너 잘되라고 해놓은 것이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아니에요! 불만 없어요.”
“에잉. 쯧쯧. 말년에 얻은 제자가 이렇게 스승한테 기어오를 줄 누가 알았나.”
하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기어오른다니요? 저처럼 예의 바르고 착한 제자가 어디 있다고요.”
“그런 놈이 스승한테 냅다 몸통박치기를 먹여?”
“그건 스승님이 너무 반가워서 안기다가…….”
하현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말을 흐렸다.
취월걸개는 하현을 보고 혀를 몇 번 차주고는 남궁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아, 너는 이제 뭣 좀 알겠느냐?”
“네. 어르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민에게 취월걸개가 한 발자국 다가서며 물었다.
“무엇을 알게 되었니?”
“저 자신을 조금 더 믿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취월걸개도 그를 보고 씨익 웃었다.
남궁민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이다. 너 스스로를 믿으면 된다. 네 머리가 아니라.”
“네.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럼 한 번 해볼 테냐?”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취월걸개는 같이 차라도 한잔하지 않겠냐는 듯 가볍게 물었고, 남궁민도 가볍게 대답했다.
남궁민이 가볍게 일어서며 취월걸개 쪽으로 걸어갔다.
하현은 둘의 대화에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 둘은 대련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척-
취월걸개과 남궁민이 마당으로 나와 서로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마주 섰다.
“검은 필요 없어?”
“네. 지금 마음 같아서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참내. 건방지구나.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남궁민은 기수식도 따로 하지 않은 채 양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취월걸개가 잠깐 눈을 깜빡이는 그 순간.
쉬익-!
남궁민의 왼팔이 채찍처럼 취월걸개에게 쏟아졌다.
취월걸개는 급히 고개를 돌려 남궁민의 팔을 피해냈다.
후웅-
곧바로 남궁민이 남아있는 오른팔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실로 번개 같은 속도.
취월걸개가 피해내기에는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취월걸개였다.
팍!
취월걸개는 발로 땅을 박차 튕겨내듯 뒤로 물러섰다.
그의 장기인 신법을 전투에 응용한 동작이었다.
“와……!”
하현은 둘의 대련에 빠져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취월걸개가 대단한 무인이라는 것은 상식처럼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눈앞에서 대련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슉 슉 슉-
남궁민은 마치 양팔이 살아있기라도 한 듯 취월걸개를 쫓아다니지만, 마치 귀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취월걸개에게 닿지는 않았다.
“좋다! 확실히 정직하게 본 것을 때려 오는구나!”
“그래도 아직 닿지 못했습니다!”
남궁민도 온 무림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으나, 아직 둘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보였다.
스슥- 스슥-
그런데 하현은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대련이 계속될수록, 남궁민의 손이 점점 취월걸개에게 닿아간다는 것을.
취월걸개도 그것을 느꼈는지, 남궁민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지려 했지만, 남궁민은 팔을 휘두르면서도 끊임없이 무한보를 밟아 취월걸개에게 바짝 붙었다.
부웅!
그때, 남궁민의 팔에서 나는 소리가 달라졌다.
이전보다 확실히 더욱 빠르고, 더욱 묵직한 소리였다.
취월걸개의 눈에 살짝 당황이 깃들었다.
그가 다시 발을 박차고 뒤로 튀어 오르려 할 때.
“엇?!”
취월걸개는 등 뒤가 지객당의 담벼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퍼억-!
남궁민이 또 한 번 오른팔을 휘둘렀고, 취월걸개가 부지불식간에 왼팔로 막아버렸다.
“이런 망할.”
취월걸개가 상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남아있는 오른손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주먹이 남궁민에게 뻗어 나갈 때.
“졌습니다!”
남궁민이 외치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고, 취월걸개의 주먹은 허공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뭐?!”
“저는 어르신 몸에 제 팔이 닿은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제가 졌습니다.”
“뭐라고?”
취월걸개는 이겼음에도 진 것 같은 찜찜함에 아직 미련이 남는 듯했지만, 남궁민은 어느새 하현의 옆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 목표는 어르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목표였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찜찜하게…….”
“덕분에 제가 공격할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궁민이 저렇게까지 정중하게 말하는데, 아무리 취월걸개라도 대련을 끝까지 하자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취월걸개는 아쉬운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에라이. 맘에 안 들어! 주원한테 가서 잿밥이나 얻어먹고 와야지!”
취월걸개는 지객당을 훌쩍 나가버렸고, 남궁민과 하현은 서로를 보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남궁민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하현이 둘의 대련을 일거수일투족 샅샅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취월걸개는 소림사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하현을 데리고 들어갔다.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고 절 안에 있는 낮은 언덕까지 하나 건너자 지금까지와는 상상도 못 할 광경이 펼쳐졌다.
산속에 어찌 이렇게 넓은 곳이 있는지 남궁세가에 있던 연무장보다도 수 배는 더 커 보이는 연무장 위에는 수십 명의 무승이 서 있었다.
취월걸개는 그곳을 잠시 바라보더니, 하현을 보며 말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나 보다. 잘 봐라. 지금부터 볼 것이 정파제일문 소림의 진짜 모습이다.”
하현이 다시 그들을 바라보고 나서 잠깐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하압!”
수십 명의 무승이 한목소리로 기합성을 내뱉었다.
산이 흔들릴 듯한 우렁찬 기합 소리였다.
“……!”
하현은 그 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넘칠 듯 담겨있는 웅혼한 내력이 그의 귀를 직접 때리는 듯했다.
“한 분 한 분이 엄청난 고수군요.”
“맞다. 무인의 숫자도 우리 개방에 이어 두 번째로 많지.”
그때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어디서 개방이랑 비교하려고 하나? 우리 소림은 하나하나가 강력한 고수라네. 개방은 대부분 쭉정이들이지 않으냐.”
“뭐 쭉정이?”
뒤돌아본 그곳에는 손에는 염주를 든 주원대사가 언제 도착했는지 서 있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온 게야? 첩자질이라도 하게?”
“이런 땡중이! 첩자라니. 나야말로 이런 쭉정이들은 봐도 배울 게 없어!”
“쭉정이라니. 우리 백팔 나한이 쭉정이로 보이냐?”
둘은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했다.
남궁무룡이 하현이 떠나기 전에 취월걸개와 주원대사가 모이면 정신없을 거라고 했었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한참을 잠자코 기다리자 말싸움을 일단락 지은 주원대사가 이제야 하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흠흠. 자네와는 초면인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주원이라 하네. 얘기는 많이 들었네.”
“남궁하현입니다.”
주원대사는 정중하게 인사하는 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찌나 빤히 바라보는지, 하현이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지며 물었다.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닐세.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빤히 보았네.”
“네?”
“특히 눈이 많이 닮았군. 거의 빼다 박았을 정도야.”
하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지금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제 어머니를 잘 아십니까?”
“그래. 독심미화라는 별호도 내가 주었네…. 아미타불.”
주원이 눈을 감으며 합장했다.
“어머니의 별호를요?”
하현은 뜻밖에 만난 어머니의 흔적에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감정을 내비쳤다.
하현에게 그만큼 어머니라는 이름은 그리움을 대변하는 이름이었다.
하현은 주원대사에게 더 자세하게 묻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