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십팔나한진만 제대로 상대하면 이길 것이라는 취월걸개의 말.
하현은 사실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다.
‘뭔가…. 위험한 냄새라고 해야 하나.’
하현이 혈랑과 맞붙고 난 이후부터 생긴 감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고, 명확하게 크고 작음이 판단이 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강자가 눈앞에 있을 때는 느껴지는 것.
그의 할아버지인 검존 남궁무룡과 취월걸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개방의 방주 역시 강자의 향기를 진하게 흘렸다.
조금 전 연무장에서 역시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주원대사에게서는 할아버지나 취월걸개에 버금가는 기운이 느껴졌고,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수십 명의 무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연무장의 뒤쪽으로 갈수록 그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나 맨 뒷줄에서는.
‘원철이라고 했었나?’
하현은 소림사 정문에서 만났던 젊은 무승을 떠올렸다.
태양혈이 불룩하고, 정제된 몸놀림이 얼마나 많은 수련을 거쳤는지 느껴지긴 했으나 그리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하현에게 취월걸개가 말했다.
“허나,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괜히 백팔나한진, 십팔나한진을 무공을 모르는 어린애들도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진법의 무서움은 엿새 동안 준극 정상에까지 갔다 오면서 잘 느꼈지 않느냐?”
“네. 정말 여실히 깨달았죠…….”
취월걸개가 펼쳐놓은 진은 단순히 길을 못 찾게 만드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에 들어서자 계속 곡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하는 진도 있었고, 천지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만드는 진도 있었다.
“그런 진은 다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혹시 개방의 비기인가요?”
“끌끌. 개방 거지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타구진(打狗陣)밖에 없다. 내가 오고 가며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이지.”
어깨너머로 배웠다고는 하지만, 굉장히 완성도가 높은 진이었다.
“걱정마라. 진법도 때가 되면 다 가르쳐줄 테니.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기다렸던 말이 나온 하현이 맑게 웃었다.
“나는 잠깐 어디 좀 다녀올 테니 수련을 하고 있든지 쉬든지 알아서 하고 있어라.”
“어디 가시는데요?”
“안 가르쳐준다.”
취월걸개는 짧게 말하고는 쌩하니 지객당을 나가버렸다.
하현은 피식 웃고는 검이라도 휘두를 요량으로 지객당에 딸린 작은 마당으로 나갔다.
“형님!”
마당에는 이미 남궁민이 나와 있었다.
그는 웃통을 벗고 검을 들고 있었는데, 어제 취월걸개와의 대련 이후에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에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취월걸개 덕분에 얻은 깨달음을 체득하느라 잠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였다.
“현아.”
“아침부터 계속 여기에 계셨던 거예요?”
남궁민은 하늘 중천에 걸려있는 해를 곁눈질로 보고는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리도 흘렀구나.”
“서운해요. 혼자서만 그리 앞서나가시려는 거에요?”
“하하. 네가 이렇게 빨리 쫓아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말하는 남궁민의 턱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이 한겨울이라는 것을 상정했을 때, 굉장히 힘든 수련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제의 그 수련이에요?”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보이는 것에 그대로 검을 날리는 수련.
너무나도 뛰어나기에 평생 의식하지 않아도 머리를 써왔던 남궁민이 머리를 쓰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한 번 볼 테냐?”
“네. 형님.”
하현은 아예 남궁민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궁민은 그의 앞에 쓰러져 있던 다섯 개의 통나무를 바로 세웠다.
“후우.”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에 하얗게 내뱉어진 입김이 흩어진다.
“흐읍!”
그 순간, 남궁민이 숨을 참으며 목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하현은 남궁민에게서 다섯 갈래의 빛줄기가 쏟아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빠악!
그리고 세워두었던 통나무 다섯 개가 한 번에 뒤로 넘어갔다.
마치 다섯 개의 검을 한 번에 휘두른 듯한 느낌이었다.
“엇……!”
하현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자리에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형님?! 이건……?”
“후. 너도 느꼈겠지만, 마지막 통나무는 아주 미세하게 늦게 쓰려졌다. 아직은 네 개가 한계구나.”
그가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네 개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사실 다섯 번째도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늦게 쓰러졌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무섭도록 빠른 쾌검 이었다.
하현은 남궁민이 단순히 다섯 번의 검을 빠르게 휘두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야. 형님의 마음이 일었어.’
머리가 아닌 가슴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두르는 것.
이것이 남궁민이 얻은 깨달음의 실체였다.
“취월걸개 어르신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중단전이 열렸다고.”
중단전은 마음의 밭이다.
마음의 밭이 열리면 육체는 마음을 따라가게 된다.
“중단전…….”
하현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개념에 의아한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이상하도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하하. 네 태도를 보니 역시 취월걸개 어르신이 대단하시긴 하구나.”
“사부님이요?”
“그래. 어젯밤에 내가 얻은 깨달음을 정리할 때, 어르신께서 도와주셨거든. 그때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다. 하현이 너는 이미 중단전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중단전이라는 말은 방금 처음 들었어요.”
남궁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넌 이미 마음이 이는 대로 검을 휘두르는 법을 알고 있으니.”
“마음…….”
하현은 문득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모용청과의 일전에서, 혈랑과의 마지막 부딪힘에서 느꼈던 감각을.
“분명히 그런 적이 있는 거 같긴 한데…. 아직은 제 의지대로 조절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하하. 욕심도 많다. 이제부터 익혀가도 충분해. 네가 모든 것을 배울 시간까지는 아직 내가 네 앞에 있을 테니.”
남궁민이 하현에게 다가가 머리칼을 흩트리며 말했다.
“후. 이제 점심이나 먹고 계속하자.”
그가 한쪽에 벗어두었던 옷을 탁탁 털고 다시 입는데, 하현이 말했다.
“형님.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무슨?”
“내일, 십팔나한진을 상대할 방법입니다.”
“십팔나한진을?”
남궁민이 빙긋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하현이 십팔나한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먼저 나서서 십팔나한진의 공략법에 대해 설명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하현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얘기인지 들어볼까?”
남궁민은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 것도 잊고 하현의 앞에 섰다.
그의 막냇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굉장히 기대된다는 얼굴이었다.
* * *
늦은 밤.
하현은 다시 지객당 마당에 검을 들고나왔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은 연습용 목검이 아닌, 그의 애검이었다.
하현의 검에 찬란한 달빛이 부딪혀 깨어졌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능히 십팔나한진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낮에 남궁민과 세운 계획을 상기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현은 취월걸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경신법과 진법에 대해서는 꽤 이해도가 높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두 가지에 오늘 낮에 남궁민이 보여준 쾌검을 더하니 생각보다 쉽게 답이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했어. 건곤일척(乾坤一擲)이야.’
하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려는데.
“허허. 시주는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무엇 하는가?”
“주원 스님!”
지객당 입구에서 주원대사가 휘적휘적 걸어들어왔다.
기감이 뛰어난 하현도 그가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렇게까지 이기고 싶은가?”
주원대사는 다짜고짜 하현에게 물었다.
하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기고 싶습니다.”
“어째서? 소환단 때문인가?”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솔직한 대답에 주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하현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내가 시주에게 제안 하나 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약속된 소환단 세 개를 내놓겠네. 대신 내일 비무는 기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현은 생각지도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주원대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시주는 백팔나한진의 명성이 어떻게 이어져 온 것인지 아는가?”
“강력한 진법이라서요?”
“그것도 맞네. 허나 진짜 이유는 다르지.”
“진짜 이유……?”
“한 번도 진 적이 없기 때문이네.”
그는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몇 번이고 강조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크게 다른 것 같았다.
“맞네. 그래서 십팔나한진도 혹여 질 수도 있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고 싶네.”
“…….”
하현은 대답하지 못하고 살짝 눈을 감았다.
감은 그의 눈 끝이 파르르 떨렸다.
실망, 분노, 상심….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후우…….”
하지만 하현은 심호흡 한 번에 그 감정을 삭여내었다.
“대사님.”
“말해보게.”
“조금 전의 말은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
이번에는 주원대사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주원대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 미안하네. 내가 자네를 잘못 보았군.”
“네?”
하현은 갑자기 바뀌어버린 주원대사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바로 전까지는 그리도 진중해 보였던 사람이, 웃음 한 번에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다니.
“솔직히 난 아까까지만 해도, 시주는 성정이 온순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아니었네.”
주원대사는 고개를 스윽 돌려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이미 평정을 유지할 줄 아는 것이었군.”
“아직 멀었습니다.”
“하하. 겸손할 필요 없네. 시주는…. 역시 영령의 아들이었어. 잠깐이지만 영령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네. 물론 그걸 잘 참아냈지만.”
“어머니는 잘 참지 못하셨나 봐요.”
“후후. 영령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답도 안 하고 나한테 달려들었지. 그것도 정말 죽일 기세로.”
주원대사는 싱긋 웃고는 소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하현에게 건넸다.
“이건 나보다 시주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이것은……!”
하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원대사가 건넨 물건은 몇 개의 서신과 경전(經典)이었다.
“이 서신은 영령이 나에게 보냈던 서신들이네. 별거 아닌 소소한 내용들이지만…. 시주에게는 의미가 클 것 같군.”
하현이 서신을 훑어보고는 경전을 펼쳐 보았다.
그 안에는 제법 불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필기 따위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건 혹시 있을지 몰라 양심당에 들렀더니 다행히 꽂혀 있더군. 영령이 이곳에서 잠시 수학할 때 사용했던 경전이네.”
하현은 경전과 서신을 꼭 끌어안았다.
수십 년 전에 쓰인 것들이기에 그럴 리가 없지만, 어머니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주원 스님.”
“감사는 무슨. 종이 몇 장 내어준 것 가지고.”
주원이 이렇게 말했지만, 하현은 진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서신들은 주원대사에게도 추억의 물건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더욱 필요해 보이는 하현에게 내어주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밤이 차네. 시주도 어서 들어가게나.”
“네. 주원 대사님”
“내가 선물도 주었으니 내일은 적당히 해주게.”
“그건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주원대사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큭큭 웃고는 지객당을 나섰다.
요사(療舍)로 돌아가는 길.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영령아. 네 아들이 정파무림의 홍복(洪福)이구나.”
소림이 이긴다면 십팔나한진의 명성을 이어가기에 좋고, 하현이 이긴다면 정파무림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
그는 어느 쪽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 아침
하현과 남궁민, 그리고 취월걸개는 어제의 그 연무장으로 나섰다.
그곳에 도착하자 이미 소림의 나한들은 연무장 한쪽에 빼곡히 서 있었다.
“아미타불. 나오셨구려.”
이번 대련의 소림 측 주최자나 다름없는 주원대사가 앞으로 나서며 합장했다.
그는 평소에 입고 있는 간편한 승복이 아니라 예불을 올릴 때나 입는 법복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단순한 내기에서 비롯된 대련이라고는 하지만, 이 또한 진지한 대련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귀찮게 예의 차릴 필요 뭐 있겠어? 바로 시작하지.”
취월걸개의 말에 주원대사가 승려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열여덟 명의 무승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 소림의 원(元)자 항렬 제자들이라네. 오늘 잘 부탁하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남궁민과 하현도 인사하며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