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소림의 무승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다시 발을 놀리며 소강상태를 불식시키고, 다시 공격해올 준비를 할 뿐.
하현의 눈이 빛났다.
십팔나한진을 상대하며 어느 정도는 이 진법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팔괘에서 감(坎)이 빠졌다. 물이 빠진 자리를 손(巽). 즉 바람이 채우려 하지만 지금 이들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다.’
불문에서도 과연 이렇게 이해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하현은 그가 알고 있는 주역을 바탕으로 이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유학의 무공과 불학의 무공이 맞아떨어진다. 이것이 만류귀종(萬流歸宗)인가?’
하현은 여유롭게 무리(武理)에 대해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현과 남궁민이 해야 하는 다음 순서는 더욱 간단하다.
그다음으로 약한 승려를 찾아서 공격하면 되는 것뿐이다.
샤샤샥!
약한 승려를 찾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잘 익은 수박을 고르기 위해 두드려 보듯, 검과 몸으로 부딪쳐 보면 그 반발력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그리고 남궁민이 마음으로 내지르는 번개 같은 쾌검은 그 시간을 더욱 단축해주었다.
“크흡!”
같은 세기로 검을 내질렀건만, 신음을 흘리는 승려가 있다면 그가 개중에 가장 약하다는 증거였다.
“하현아 이쪽!”
“네!”
하현은 어린 나이가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보법을 선보였다.
쒜에엑!
이번에는 검을 내지르는 순간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조금 전 무릎으로 정확하게 원후를 가격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운이 따른 결과였다.
속도가 조금만 더 빨랐거나, 느렸다면 결정타를 먹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검에 정신을 집중했다.
우연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빠각!
예리하게 날아간 하현의 검이 승려의 곤(棍)에 막혔다.
조금 전 같았으면 하현은 공격이 막힌 순간 곧바로 몸을 뺏어야 했을 것이다.
십팔나한진의 특성상 곧바로 다음 공격이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한 명의 부재는 컸다.
하현은 아주 잠시지만, 병기는 맞댄 상태로 힘을 주어 앞으로 한 발자국을 더 나아가며 그를 밀었다.
“큽! 무슨 힘이?”
승려는 저항할 수 없는 하현의 힘에 온 힘을 다해 앞으로 힘을 주었다.
이미 원후를 쓰러뜨리는 것을 코앞에서 보았기에 방심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현의 힘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을 뿐.
쉬익!
그 순간 하현이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려 힘을 빼고 보법을 뒤로 밟아 신형을 물렸다.
“어엇?!”
그리고 하현과 곤을 맞대고 있던 승려는 힘 싸움을 하던 하현이 갑자기 사라지자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정확히 하현이 있던 자리까지 앞으로 튀어나왔다.
퍼억!
“크윽!”
“사형!”
그리고 하현을 향해 날아오던 봉(棒)이 그대로 그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마지막에 급히 힘을 뺏기에 큰 타격은 아니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쯧쯧. 무너졌구만.”
멀찍이서 가벼운 마음으로 대련을 지켜보면 취월걸개가 혀를 찼다.
그의 말대로였다.
“십팔나한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의 균형과 움직임을 유지해야 하는 법인데.”
그의 말대로 소림의 원자 돌림 제자들은 이미 평정을 잃었다.
그 덕에 진의 유지가 위태로울 정도였다.
“어째 조금 미안해지는데?”
그가 슬쩍 주원대사의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주원대사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타다닷!
남궁민이 경쾌하게 발을 놀렸다.
승려들 몇 명이 넋을 놓고 있는 상황.
‘이때를 놓치면 이길 자격이 없지.’
지금까지 마음의 검으로만 싸워오던 그가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팔과 다리에 깃든 섬전의 기운.
남궁민은 그와 가장 가까운 승려에게 검을 겨누었다.
파스스-
이상함을 눈치챈 그 승려가 급하게 막아내려는 태세를 취했지만.
남궁민의 쿵! 하고 진각을 밟았고.
꽈릉-!!
승려의 몸에 한 줄기 번개가 스쳐 갔다.
남궁민의 검에 머리를 맞은 그는 비명소리도 남기지 못한 채 정신을 잃고 털썩 쓰러졌다.
십팔나한진의 하나가 아닌, 한 명의 무인으로서는 남궁민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제 열여섯.”
다음 대상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금 전 옆구리에 봉을 얻어맞고 주춤거리고 있는 무승이 바로 다음 목표.
파바박!
하현이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건만, 남궁민은 곧장 하현이 있는 방향으로 신형을 날리며 하현을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하현은 남궁민이 막아줄 것을 알았는지, 피하거나 방어할 생각은 전혀 없이 검을 날렸다.
부우웅!
묵직한 소리에 급하게 양손에 기운을 불어넣으며 소림의 독문장법인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을 펼쳤지만, 애석하게도 온전한 힘을 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뻐억!
하현의 검이 무승의 허리를 때렸다.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버릴 정도의 강력한 한 방이었다.
“으억!”
그는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앞서 쓰러진 승려들처럼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벌써 세 명의 승려가 쓰러졌다.
하현은 고개를 휙휙 돌렸다.
‘이제 보인다.’
선(線)처럼 이어지던 공격이 뚝뚝 끊기고, 이제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자 하현은 십팔나한진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진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현이 남궁민을 돌아보자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하현은 씨익 미소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말이 전해진 것 같았으니까.
이번에는 가장 약한 자를 고를 필요가 없다.
하현은 조금 더 욕심을 내자고 마음먹었다.
‘여기가 십팔나한진의 연결고리!’
쒜에엑-!
별안간 하현이 그의 오른쪽에 있던 승려에게 달려들었고, 남궁민도 곧장 그에게 쇄도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마라!”
원진의 호통에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하현과 남궁민의 검은 지척이었다.
하현이 움직이고 난 뒤에 그가 움직였건만, 동시에 검이 닿았다.
빠악!!
남궁민의 검이 어깨에, 하현의 검이 허벅지를 쳤지만, 단 한 번의 타격음만이 울렸다.
하현은 그가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뒤돌았다.
손에 걸리는 감각이 묵직했으니, 당장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슈욱!
그리고 이번에 하현이 달려든 곳은 조금 전 큰소리로 외친 원진이었다.
원진은 하현이 방향을 전환함과 동시에 나한권(羅漢拳)을 쏟아내었다.
빠악!
그 덕에 하현이 바람처럼 내지른 검이 그의 주먹에 막혔다.
하현은 원진이 지금까지의 승려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대 제자 중 맏형인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진을 재구성해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목소리에 내력을 가득 담아 외치며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제들의 눈빛은 이미 빛을 잃었다.
“이 녀석들이……!”
그는 분노할 새도 없었다.
저 남궁세가 두 형제의 공격은 말 그대로 폭풍 같았으니까.
쒜엑!
하현의 검이 다시금 날아온다.
그리고 남궁민의 검은 전의를 상실한 사제들을 향한다.
원진은 이 순간 무력감을 느꼈다.
“그만!”
별안간 들려온 큰 목소리에 원진에게 날아오던 하현의 검이 공중에 우뚝 멈추었다.
주원대사의 목소리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 정도로 하지. 우리가 졌네.”
그의 말에 하현과 남궁민이 검을 갈무리했다.
“큰스님!”
그의 말에 반발한 것은 원진이었다.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더 할 수 있습니다.”
“그만해라. 여기까지다.”
“큰스님!”
“승부를 내어주고, 십팔나한진까지 모두 내어줄 셈이냐!”
지금껏 평온하게만 말하던 주원대사의 일갈(一喝)이었다.
하현은 그 얘기를 듣고,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였다.
하현은 아직 십팔나한진의 오묘한 이치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조금씩 무승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어렴풋이 원리만 깨닫고 있었을 뿐.
그걸 위해서 가장 약한 자가 아닌,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개중에서는 가장 강한 원진에게 달려들었었다.
“……!”
원진은 당했다는 표정으로 하현을 돌아보았다.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 원후 사제가 기절한 순간 이 승부는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소림의, 십팔나한진의, 그 자신의 자존심이 패배를 인정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아쉬워하는 하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인정하고 말았다.
“…졌습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그가 합장하며 말하자, 하현이 포권으로 돌려주었다.
“원진. 이만하면 잘했다. 모자란 점을 알았다면, 앞으로 더욱 정진할 뿐이다. 부상자들을 요사로 옮겨라.”
“네. 큰스님.”
원진을 포함한 제자들이 부상 당한 세 명의 승려를 데리고 연무장을 떠났다.
하현과 남궁민도 연무장에서 나와 취월걸개의 곁으로 갔다.
“잘했다. 직접 부딪혀 보니까 어떠냐.”
취월걸개의 얼굴에는 기쁨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하현도 그를 보고 마주 웃어주며 대답했다.
“소림이 어째서 정파제일문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주원대사가 걸어오며 하현의 말에 취월걸개 대신 대답했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겨놓고서 그런 말을 하는가?”
“진심입니다. 오늘 저희가 이긴 것은 단지 개개인의 실력이 우위였기에 가능한 결과였지, 십팔나한진을 이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현은 조금 전까지 이 대련을 지켜보면 소림의 이대 제자들을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만약 십팔나한진을 저분들께서 펼치셨다면,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허허허. 겸손하다 해야 할지, 욕심이 많다 해야 할지 모르겠네.”
주원대사는 그냥 웃어버렸다.
하현이 가리킨 이대 제자들은 모두 이십 년 이상을 수련한 절정의 고수들이다.
소림에 속해있기에 아직도 제자이지, 어지간한 문파였다면 장로나 호법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이었다.
“어찌 되었든 약속은 약속. 방장님께도 미리 말씀드려놓았으니, 소환단 세 알을 내어주겠네.”
“감사합니다. 주원대사님.”
하현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에게 소환단을 가져다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쁜 하현이였다.
“이보게 취월. 하현 시주는 내가 좀 데리고 가도 좋겠는가?”
“그래라. 오래 걸리겠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네.”
“알겠다. 민아. 우리는 오늘 산 아래로 내려갔다 오자. 절밥엔 기름기가 하나도 없어 소화가 안 되니까 오늘은 배에 기름칠 좀 해줘야지.”
주원대사와 취월걸개는 이미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보였다.
“어르신. 현이는 두고 갑니까?”
“현이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리해도 된다고 했네.”
“그게 누구입니까?”
취월걸개가 얼굴에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남궁민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일단 출발하자. 내려가면서 말해줄 테니까. 내가 하현이한테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을 만나라고 할까 봐?”
“그건 아니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대도?”
“…알겠습니다.”
취월걸개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하현을 두고 남궁민과 연무장을 아예 떠나버렸다.
“저기, 대사님……?”
“따라오게나.”
주원대사가 그를 이끌고 간 곳은 나무와 마치 한 몸인 듯, 아직도 그곳에 기대어 앉아 있는 소림의 방장 앞이었다.
“방장님 데리고 왔습니다.”
“고맙네.”
하현은 그가 참 신비로운 기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얼핏 보면 굉장히 온화하고 따스한 기운을 가졌다.
위험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그를 느끼자, 빙산 아래에 숨어있는 거대한 존재감이 하현을 압도했다.
하현은 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입니다.”
“허허. 자기소개는 조금 전에 실컷 보았네.”
“부끄러운 실력입니다.”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차는 잘 아는가?”
하현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조부님께 미숙하게나마 조금 배웠습니다.”
“아! 검존 시주는 이쪽의 조예가 깊지.”
주산선사는 방긋 웃으며 남궁무룡을 몇 마디 더 칭찬하고는 하현을 방장실로 데리고 갔다.
방장실은 너무나도 단출했다.
검소한 성격인 남궁무룡도 다도실에는 난과 작은 장식 따위를 두었는데, 이곳은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를 제외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도 시주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긴 하건만, 먼저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군.”
“만날 사람이요?”
“시주를 보고 싶다고 한 사람은 내가 아니네. 우리가 이쪽으로 출발할 때 주원이 데리러 갔으니 금방 올 것이네.”
주산선사는 그 뒤로는 말을 아끼고 차를 홀짝였다.
하현도 굳이 묻지 않고, 그를 따라 차를 마시는데 방장실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방장님. 혜원입니다.”
“들어오게.”
주산선사가 허락하자 한 노승(老僧)이 들어왔다.
그렇긴 하지만, 주원대사나 방장처럼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 여기 시주가…….”
“그래. 자네가 보고 싶어 했던 남궁세가의 남궁하현 시주라네.”
혜원이 그를 보고 빙긋 웃었다.
하현도 마주 웃어주었지만, 순간 그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고수……!’
들어온 승려에게서는 굉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속으로 갈무리해 숨겨 두었지만, 그것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맹렬한 기운이었다.
‘어?’
그런데 하현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그에게서 무언가 익숙함을 느꼈기 때문에.
혜원이 하현에게 합장하며 인사했다.
“시주 안녕하시오? 본승의 법명은 혜원이라고 하오.”
“네. 혜원스님.”
“지금은 무림의 일은 뒤로하고, 장생전(長生殿)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는 처지이다만…. 강호에 있을 때는 월룡(月龍)이라는 별호로 불렸었소.”
“월룡이라고요?”
하현은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던 것 같은 별호에 잠시 기억을 떠올렸다.
“아! 혹시?”
“맞소이다. 정말로 시주가 저와 같은 체질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