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얼마 전 하북팽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할아버지는 하현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이 너와 비슷한 체질의 고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고수의 별호가 바로 월룡이라고 했었다.
소림의 제자라고는 들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하현이였다.
“혜원. 여기 앉게나.”
“감사합니다. 방장님.”
주산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혜원대사에게 손수 새 차를 따라주었다.
“나는 잠시 산책이나 좀 하다 올 터이니, 대화들 나누시게.”
그리고 그는 혜원과 하현만을 남겨두고는 방장실을 나가버렸다.
혜원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무림을 등지고 은거했다고 들었는데, 그가 상상했던 은거고수의 모습과는 달랐다.
“시주가 올해 열셋이라고 들었네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또래치고는 커 보이오. 소승은 열다섯은 된 줄 알았소이다.”
혜원은 굉장히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흔의 노인이라고 들었건만, 눈과 행동에서는 활기가 흘렀다.
도무지 은거한 승려로는 보이지 않았다.
“월룡 스님…….”
“혜원이라 불러 주시겠소? 월룡이라는 별호는 속세에 두고 들어왔으니.”
“네. 혜원 스님.”
하현의 말에 그는 빙긋 웃었다.
“저와 같은 체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하하.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왔다고 말하지 않았소?”
혜원은 탁자 위로 손바닥을 펴며 말을 이었다.
“손을 대보시겠소?”
하현은 그의 말대로 손바닥을 펴 그의 손에 맞대었다.
스으으-
천천히 그의 손바닥에서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아주 미약한 기운이 하현의 손바닥을 타고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현은 그 기운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는 지금 혜원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종종 하현의 몸 상태를 확인하여 그의 몸에 기운을 불어넣고는 했으니까.
‘이래도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은데.’
당연하게도 하현이 별로 좋아하는 일은 아니다.
이질적인 기운이 몸을 헤집고 다니는데 좋을 리가.
“어?”
하현은 순간 깜짝 놀라 손바닥을 뗐다.
“어땠소?”
“그…. 사라졌습니다.”
“역시!”
혜원은 기쁜 얼굴이었다.
하현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그를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런 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하현의 몸 안으로 들어온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아마도 우리는 특이체질인 것으로 보이오. 그리고 기운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대로 시주에게 흡수된 것 같소.”
“특이체질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승도 약관 때 자소단을 한 번 섭취하고 죽을 뻔한 적이 있었소. 시주 역시 같은 경험이 있었다는 것은 전해 들었고.”
하현은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취월걸개에게, 취월걸개가 주원대사에게, 또 주원대사가 혜원대사에게 하현이 자소단을 섭취하고 기혈이 들끓었던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승도 들었소. 소승은 자소단의 기운이 모두 사라졌는데, 시주는 한 톨도 남김없이 흡수하셨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꼭 보고 싶었던 것이오. 몇 가지 확인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혜원대사는 사람 좋게 웃었다.
그리고 하현도 마주 웃어주었다.
“소승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는 것은 같은 성질의 기운인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오. 이거 좀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설명해 주세요.”
“허허. 이것 참. 눈치가 보여서. 우리 절의 불자들이 제가 설법만 하면 지루하다고 해서 말이지.”
그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느끼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사람마다 각자의 색을 가지고 있소. 그리고 기운 역시 그 색을 따라가지. 뭐…. 눈으로 보이는 색은 아니지만.”
“이해했습니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람마다 가진 기운의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혜원은 그것을 색이라고 표현했고, 하현은 그것을 냄새라고 표현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색이라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붉은 색, 검은색, 흰색 등등…. 의 이런 단색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란 말이오.”
이번에도 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 해주었다.
붉은색이라고 해도 똑같은 붉은 색이 아니다.
어떤 색은 조금 어둡고, 어떤 색은 조금 더 밝고.
어떤 색은 노랑이 조금 섞여 있고, 어떤 색은 파랑이 조금 섞여 있는 등…. 붉은색만 해도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붉은색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처럼 기운이 섞일 수 없는 것이오. 비슷한 색은 있을 수 있어도, 완전히 같은 색은 있을 수 없으니.”
하현은 혜원대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작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색에 가까운 겁니까?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은 저도 알겠지만…. 우리는 기운이 섞였잖아요?”
“우리는 무색(無色)이지 않을까 싶소.”
“무색이요?”
“굳이 말하자면, 투명한 물이랄까?”
하현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자소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군요.”
“그렇지! 자소단의 색은 굳이 따지자면 붉은색. 고로 투명한 물에 붉은 물감을 풀면 그 물은 붉은 물이 되는 것 아니겠소?”
온몸의 기혈이 들끓는 것은, 하현의 몸이 기운의 색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체계였던 것이다.
“사실 소승도 자소단과 소환단, 대환단 이외에 다른 영단은 복용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무당의 태청단이나, 개방의 취구환 등을 복용했어도 결과는 자소단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오.”
그는 태청단은 파란색. 취구환은 초록색의 기운이라는 말을 덧붙인 뒤에 계속 말을 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소림의 소환단이나, 대환단은 최대한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담으려 고심 끝에 만들어 낸 영단이오. 그래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오.”
하현이 그에게 동조했다.
그는 모용세가에서 떠나는 마차 안에서 소화가 나눠주었던 설삼을 떠올렸다.
“맞습니다. 자연 영약은 저번에 섭취해보았습니다. 백년설삼이라 효과가 크지는 않았지만, 자소단 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하! 소승은 그때의 그 고통이 무서워 소환단이 아니면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대단하구려.”
혜원대사는 껄껄 웃었다.
지금껏 가설로만 세워왔던 것들이 맞아 들어가는 것이 기꺼운 모양이었다.
“우리 같은 체질이 무공을 익히기에는 참 좋은 체질이오. 어떤 무공을 익히든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게 해주니까.”
“저도 그렇다고 느꼈습니다.”
하현은 지금까지 그가 보고 따라 한 무공들을 무리 없이 펼쳐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혜원대사에게 돌아온 대답은 조금은 다른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각법, 권법, 검법, 봉법 등등…. 모두 다른 기질들을 가지고 있는 병기이지만, 모두 우리 안에서 섞일 수 있는 것이오. 그러니 시주도 너무 검에만 파고들지 말고, 다른 병기에도 시간을 할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현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했던 말이 다른 무공을 모두 자신의 것처럼 익힐 수 있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말까.
하지만, 곧 고민은 짧았다. 하현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남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라 할 수 있다고.
“호오……!”
이야기를 들은 혜원대사는 감탄했다.
그리고는 생각할 것도 없이 하현에게 대답했다.
“그건 시주가 특이한 것 같군. 애석하게도 소승은 그런 재주는 없으니.”
그리고는 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자소단은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구려.”
“어떻게 말입니까?”
“나 같은 둔재는 자소단을 섭취한 순간, 그 기운을 태워버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시주는 본능적으로 자소단의 기운을 무색으로 정제하여 섭취했을 수도 있소. 물론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가늠도 안 가지만.”
혜원대사는 ‘하늘이 내린 재목이라고 하더니….’ 라며 혼자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고는 낮은 목소리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가 다시 눈을 떴다.
다시 뜬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랐다.
바로 좀 전까지는 사람 좋은 인상이었다면, 지금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우리 같은 체질이라고 좋은 점만 있지는 않소. 혹시 노력에 비해 내력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소?”
“아…! 자주 그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제가 어려서 내력이 작은 줄 알았는데…….”
혜원대사가 눈을 찡긋했다.
“나도 그랬었지. 하지만 차차 시간이 흐르면 더 알게 될 것이오. 이 내력이라는 걸 쌓기가 얼마나 힘든지. 나는 사실 내가 배운 반야신공(般若神功)이 잘못된 줄 알았더라니까?”
그가 말하며 껄껄 웃었다.
반야신공은 무공의 보고(寶庫)라고 불리는 소림에서도 알아주는 심공이다.
그런 무공을 의심했을 정도로 힘들게 내력을 쌓았다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하현이 물었다.
저 정도의 고수가 되었다는 것은 그 해결책도 알고 있다는 것이니까.
“해결이라…. 결국은 시간뿐이지. 아무리 느려도 꾸준히 오십 년을 쌓아 오니 여기까지 왔구려.”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하현은 웃을 수 없었다.
결국, 지금 혜원대사의 말은 어린 나이에는 초절정 이상의 고수가 되기 힘들다는 말이었으니까.
조급한 것은 아니다.
복수를 빠르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하현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언젠가는 또 무력함을 느끼게 될 수도 있는 것인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뒤로 밀리게 되는 것이.
혜원대사는 하현은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하현이 하는 고민을 모두 알 것 같았다.
‘내가 겪었던 것들이니까.’
세상의 사람들에게 월룡이라는 별호는 들려주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 중 열 중 여덟아홉은 이렇게 말한다.
‘약관의 나이로 정사대전에서도 활약했고, 정마대전에서 역시 큰 활약을 펼친 무림의 영웅.’
허나 사실은 조금 달랐다.
그가 정사대전에서 맨 선봉장에 서기는 했으나, 힘이 모자라 큰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었다.
그때의 무력함을 계기로 피나는 수련을 통해 정마대전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소승의 나이로 스물 때. 정사대전에서 수많은 사형제를 잃었소. 사형제뿐인가? 존경해 마지않던 사숙들, 무림에서 인연을 맺은 친우들…. 떠나보낸 자들이 너무나도 많았지.”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하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와는 통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 하현이였다.
“그로부터 이십 년 뒤. 정마대전에서는 그동안의 노력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지켜낼 수 있었지만…. 그 이십 년 동안은 미친 듯이 무공에만 매달렸소.”
혜원대사의 눈가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러나 한참이 흐르고서야 깨달았소.”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내가 승려였다는 사실을…….”
혜원대사는 물기 묻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부처님의 뜻을 섬기는 승려다.
허나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야차(夜叉)로 살았다.
그 죄책감이 그를 무림에 남아있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동안 좇지 못한 부처님의 뜻을 좇기 위하여 무림을 떠나신 거군요.”
“그렇소.”
하현은 눈빛으로나마 그를 위로했다.
그 역시 혜원대사가 그 시절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하현에게 할아버지가, 가족들이, 취월걸개가 없었더라면 그도 지금쯤 복수에 사로잡혀 살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더더욱 시주를 만나고 싶었소. 나와 비슷한 체질에 비슷한 상황이라고 들었거든.”
그는 다시 표정을 수습하고 엷게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시주에게 도움 될 만한 것이 없나를 생각해봤소.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도 무림에 모든 것을 놓고 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지.”
“무엇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화악-!
그때 혜원대사가 갑작스럽게 기운을 끌어올렸다.
두 평 남짓의 좁은 방장실이 그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따뜻한 햇볕 같은 기운이었다.
“평범한 승려가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나 큰 힘이라고 생각되오만?”
혜원대사가 맑게 웃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그가 그리도 좇고 싶어 하는 부처님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