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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85화 (85/304)

85화

“정의…….”

하현은 정의라는 말을 되뇌었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뜻이 오갔다.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산선사가 겨우 표면적인 뜻을 물어봤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현은 순간 이 쉬운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후후.”

주산선사는 빙긋 웃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것 맞네. 진리에 맞는 도리라고 할 수도 있겠고, 문자 그대로 올바른 뜻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하현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다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뜻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다시 묻겠네.”

주산선사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마교는 정의로운가?”

“네?”

“그건 당연히…….”

“당연히 마교는 악인 건가?”

하현은 주산선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네. 당연히 마교는 악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그거야 마교는 원래…….”

하현은 말을 하다 멈칫했다.

어째서인지 이유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하현은 이유 하나를 생각해내고는 말을 이었다.

“무림을 정복하려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때 유명을 달리하신 분이 한두 분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그 뜻을 접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가문도…….”

하현이 말끝을 흐렸다.

상처가 모두 아물었다고 생각했건만.

신가장을 생각하자 가슴 한켠이 콕콕 쑤셔오는 듯했다.

“시주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주산선사는 본격적으로 무림맹에서 활동하는 무인은 아니건만, 소림의 방장이라는 것 자체가 정파 무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그가 하현의 일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이건 확실히 하고 가야 하는 일이네. 정말로 마교가 악인가?”

“……!”

하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산선사가 하고 싶은 말이 마교는 악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주의 가문을 욕보이려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게나.”

“네. 오해하지 않습니다.”

“후후. 시주 성정이 모친을 닮지 않아 좋군. 영령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진작 달려들었을 텐데.”

“아…….”

주산선사도 어머니를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소림에서 몇 개월을 살았다고 했는데, 그가 모른다는 것이 말이 안 되니까.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겠네. 사도…. 흔히들 사파라고 부르는 자들은 악한가?”

“네. 악한 자들입니다.”

하현은 이번에는 쉽게 긍정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정도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민생에 빌붙어 양민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산선사가 빙긋 웃었다.

하현의 대답에 확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선문답 같은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면 정도가 무엇인가?”

“정도는…. 올바른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마지막 질문이네.”

주산선사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올바른 길은 누가 정해주는 것인가?”

“……!”

하현은 두 눈을 부릅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 커다란 망치가 그의 머리를 친 듯한 충격이었다.

두근-

하현의 심장이 요동쳤다.

지금껏 그가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는 올바른 길이, 그들에게는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네.”

주산선사는 하현의 말에 긍정으로 답해주었다.

“시주 말대로, 사파의 무리는 악인들이네. 그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그 정의를 저버린 이들이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이들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사파의 무리들은 자신들이 악한 짓을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마교는 다르네. 그들은 그들만의 정의가 있는 자들이지.”

“그들만의 정의…….”

“그래서 더욱 위험하지.”

주산선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현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대화도 통하지 않고, 교화되지도 않는 상대로군요.”

“그렇네. 슬프게도 서로에게는 설득이라는 수단이 통하지 않지.”

“이해시킬 수 없으니 병기(兵器)로 대화할 수밖에 없고요.”

“허허. 맞네.”

하현은 이미 주산선사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이해한 듯 보였다.

“악인들은 속죄할 수 있지. 마음을 고쳐먹을 수도 있고. 혹자는 우리 같은 불문에 귀의하여 속세의 죄를 씻기도 하지.”

주산선사는 하현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마교라는 무리는 그들의 행동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렇기에 더욱 격렬하고, 더욱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지.”

하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마교와 싸운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가시밭길인지를 차근히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 가지 의문이 든 것이다.

“그러면 굳이 우리가 싸워야겠습니까? 서로 각자 다른 길을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한편으로는 그의 의문이 타당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서로의 정의를 가졌다면 그 정의가 공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허…….”

그런데 주산선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주도 허술한 면이 있군.”

“네?”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지 못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이요?”

“살인은 죄악이라네.”

“……!”

하현이 말을 잇지 못할 때, 주산선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의 길이, 피바다 위에서 이루어진 길이라면 그 길은 틀린 길이네.”

주산선사가 빙긋 웃었다.

이전까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풀리자 덩달아 분위기마저 따뜻하게 풀리는 듯했다.

“그러면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지.”

“네. 스님.”

“마교는 정의로운가?”

처음 하현을 혼란스럽게 했던 질문.

하지만 하현은 더는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대답했다.

“정의롭지 않습니다.”

“그래?”

“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악한 정의입니다.”

주산선사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현이 언젠가는 마교와 부딪힐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대화는 그때 하현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줄 것이다.

“그 마음을. 그 기준을 잃어버리지 말게.”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하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림에서 얻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비록 이곳에 온 이유는 취월걸개와 주원의 장난과도 같은 내기였지만, 그 내기가 가져온 결과는 엄청났다.

“그리고 노파심에 몇 가지만 더 말하자면…. 월룡의 기운을 녹여내는 것에 너무 큰 시간을 허비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이 기운은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제 기운을 키우는 데에 집중하겠습니다.”

주산선사는 빙긋 웃었다.

하현이 부처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가 직접 제자 삼았을 것이다.

“소림에서 주신 것,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허허. 우리가 해준 게 아니네. 시주가 주인이었을 뿐. 월룡의 기운도 체질이 되었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고, 조금 전에 해준 말들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자네의 것이 된 것이지. 아미타불…….”

주산선사가 하현에게 합장했고, 하현은 포권으로 예를 차렸다.

하현은 월룡의 기운도 굉장히 소중하지만, 주산선사가 직접 내린 가르침이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하현이 생각하는 무림의 적은 마교였으니까.

“그러면 이만 들어가 보시게. 밤이 늦었으니.”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지객당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주산선사는 마당에서 쉬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는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비록 마음 깊은 곳으로 숨겼다만…….’

주산선사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 복수심을 완전히 삭여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이 복수심은 삭여내어서는 아니 된다…….’

그는 조금 전 하현에게 마교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었지만, 그 뜻은 결국, 복수할 대상을 똑바로 알고 있으라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죄는 지옥에 가서 씻겠나이다. 아미타불.’

그는 하현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

소림의 고승으로서, 무림의 선배로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하현의 인생을 위해서라면 그는 이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미타불…….”

그는 다시 한번 불호를 외었다.

‘현재 정파 무림은 늙어가고 있다.’

원래 영웅은 난세에서 나온다고 했다.

오십 년 전, 삼십 년 전의 전쟁에서 현재 정파 무림을 지탱하는 영웅들이 탄생했다.

‘검존, 도제, 취월걸개, 주원, 유엽진인…….’

그는 차례로 현재 무림의 주축이 되는 무인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구순을 넘긴 노인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극성에 다다른 무공 덕분에 아직은 무림을 단단히 받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월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대들보가 없다는 것이지.’

물론 다음 배분의 무인들 중에서도 뛰어난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앞서 생각한 무인들만큼 존재감을 가진 무인이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절실한 것이다.

훗날 무림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어올 때 구심점이 되어 줄 영웅이.

‘다음 세대를 부탁하네…….’

“아미타불……!”

그의 목소리에는 하현에 대한 미안함과 무림이 안녕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 * *

며칠이 흘렀다.

하현이 월룡의 기운을 전수받은 다음 날, 주원대사는 소환단이 준비되려면 며칠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소환단이 준비되면 남궁세가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취월걸개는 며칠 더 기다렸다가 받아 가자고 했다.

하현과 남궁민도 거절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할아버지에게 소환단을 가져다주고 싶었기에.

그날 밤 이후로 하현은 주산선사와 혜원대사를 만날 수 없었다.

하현은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취월걸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원래 소림의 방장과 내원에서 수도하는 고승들은 담 밖으로 나다니질 않는다. 이번이 특수했던 것이야.’

그렇기에 하현은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은 소림의 고수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특히나 비슷한 배분으로 볼 수 있는 소림의 원자 돌림 제자들과 제대로 친분을 쌓았다.

“그러니까, 소림의 무공에서는 부동심(不動心)을 첫째로 친다는 것이오.”

“정(靜)을 기준으로 삼고, 그 위치에서 동(動)을 가미하는 것이군요.”

“바로 그것이오. 그것이 소림에서의 가르침의 시작이오.”

그들은 서로가 깨우친 무리(武理)를 서슴없이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취월걸개는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기뻐했다.

‘제 무공을 퍼다 주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는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 중 대사형인 원진부터 막내인 원후까지.

하현과 그들은 서로 기절까지 시키며 대련했던 사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우정을 쌓았다.

하현으로서는 세가 밖에서의 몇 안 되는 인연이었다.

그에게도 친우라고 부를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하현은 몇 안 되는 친우라고 할 수 있는 팽주은이 생각났다.

‘무공 수련은 열심히 하고 있으려나.’

하현은 동생 같은 그녀를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났다.

삼 년 뒤에 용봉지회에서 꼭 만나기로 했으니, 무공 수련에 한창이리라.

그러다 문득 진주언가의 언영이 떠올랐다.

하현은 언영을 생각하면 이 단어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출 소녀.’

그는 다시 한번 생각하며 웃음 지었다.

‘그때, 집안일은 잘 해결되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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