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한편, 하현이 없는 남궁세가.
최근 마기의 영향인지 피곤함을 곧잘 느끼곤 하는 남궁무룡을 대신해 남궁세가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남궁기철은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류은파(流慇婆) 선배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기철. 네가 어린아이일 때 보고서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인제 보니 너도 얼굴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였어.”
류은파 단목혜수는 남궁무룡보다는 한 배분이 낮고, 남궁기철보다는 한 배분이 높은 여고수였다.
한때는 무림에서 조(爪)를 다루며 꽤 알아주는 실력의 그녀였건만, 일찍이 은퇴하고 그녀의 가문인 단목세가로 돌아갔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얼굴을 보기도 힘든 그녀이건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지 이곳까지 행차한 것이었다.
“저도 벌써 지천명(知天命)이 다 되어 갑니다.”
“호호. 세월이 참 빠르네. 나도 많이 늙었고.”
“그래도 아직 미모는 여전하십니다.”
“남궁세가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남궁세가 남자들은 무뚝뚝하기로 명성이 자자한데 말이야.”
류은파는 정말 놀랍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남궁기철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녀는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아직 고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하하. 있는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선배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좋은 소식을 하나 가지고 왔지.”
“좋은 소식이요?”
그녀는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진주언가의 현재 가주가 누구인지는 알지?”
“네. 철권(鐵拳) 언형철이죠.”
남궁기철은 언형철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연배와 배분이 비슷한 덕에 용봉지회에서도 몇 번이고 만났었으니까.
“그래 맞아. 철권에게는 아들 대신 딸만 셋이 있지.”
“생각이 납니다. 첫째였나 둘째 딸이 제갈세가로 시집을 갔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어머. 기억력도 좋아. 그중에 막내딸은 올해로 열다섯이 되었단다.”
남궁기철이 류은파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혹시, 혼담(婚談)입니까?”
“역시. 눈치도 빨라. 내가 철권의 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잖니. 매파(媒婆)를 부탁하길래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
열다섯이라면 분명 어린 나이기는 하지만, 혼담이 오가기에는 그리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매파가 왔다고 해서 곧바로 결혼하는 것은 아니고, 수차례 혼담을 주고받으며 혼인 날짜를 정하기 마련이니까.
“흐음…. 혼담이라.”
남궁기철은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은 그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궁민의 나이는 어느덧 스물둘.
아무리 무림인들이 양민들에 비해 혼인이 늦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여자에는 아무 관심 없어 보이는 그의 제자가 걱정되기는 했다.
“진주언가는 비록 남궁세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굉장히 역사도 깊고 세력도 큰 세가이니만큼 혼약을 해놓으면 나쁠 건 없어 보이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남궁세가에서는 받아들이는 거야?”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궁기철이 긍정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기철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건 제가 받아들이고 말고 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일단은 제가 가주 대리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관혼상제 같은 집안의 큰일은 가주님께 먼저 상의해야 하고…….”
남궁기철은 일부러 가주님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듣는 입장에서 아버지보다 가주님이라는 호칭에 더욱 무게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민이의 입장을 들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뭐?”
“저희 남궁세가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합니다.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 전에 뭐라고 했지?”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요?”
류은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보다 더 전에.”
“민이의 입장을 들어봐야 한다고…….”
“그래!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남궁기철은 류은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얘기라니요?”
“내가 진주언가에서 들은 이름은 남궁민이 아니야.”
“아니라고요?”
“그래. 나도 청룡신검이 아닌 다른 이에게 혼담을 넣는다기에 처음에는 의아했지.”
남궁기철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누구입니까? 환이 입니까?”
“자네 아들도 아니야.”
“그러면……?”
“남궁하현이라는 아이가 있지 않아?”
“하현이요?”
그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반문했다.
“그런데 하현이는 너무 어립니다.”
“어리긴. 열셋이라고 들었는데? 언가의 삼녀도 열다섯이니, 연배가 맞지 않겠어?”
“아무리 그래도 벌써부터는…….”
류은파가 남궁기철의 말을 가로막으며 재빨리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 얘기를 끝까지 좀 들어봐.”
“네…. 선배님.”
“일단은 당사자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당사자라면, 하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류은파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가의 여식이 아주 맹랑해서, 당사자끼리 꼭 얼굴을 보고 얘기해보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하더라고.”
“그렇습니까? 언가주는 허락한 거고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와 있겠지?”
보통 혼약을 맺을 때, 당사자들은 얼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허나 남궁세가에서는 혼인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는 가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하현이의 의사를 물어봐야겠군.’
남궁기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언가의 여식을 만나 볼 것인지는 물어보겠습니다. 허나 현이가 거절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 물어만 줘. 그런데 이 말은 꼭 전해달라고 하던데?”
“무슨 말입니까?”
“저번에 구해준 건 고맙다고. 이번에도 구해달라고.”
남궁기철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도 모르지. 전해달라고만 했으니까.”
“흠…. 알겠습니다.”
잠시간의 사담을 더 나눈 후에 류은파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언가의 여식과 현이가 만나 적이 있는 건가? 뭐…. 여러 사람을 만나 보는 것도 경험이 되겠지.’
류은파가 떠나고, 곧바로 집무실로 돌아갔다.
가주 대리인 그로서는 더 급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휘연의 보고서부터…….”
남아있는 마교의 잔당을 찾아내기 위한 탐사대에 차출된 휘연이 보내온 보고서였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답게 글자도 날아가는 듯했다.
‘신강지역에서는 마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음. 과거 십만대산에는 과거 마교의 잔해만이 남아있었음.’
여기까지는 남궁기철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도 예전 무림맹에서 활동할 당시 조사차 십만대산에 몇 번이고 가본 적이 있으니.
‘무림맹에서는 세외 밖으로 나가기보다 중원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청해성을 경유하여 사천성으로 이동할 예정.’
휘연의 보고서는 여기까지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마교놈들은 정말이지 철저히도 숨어들었다.
“하긴, 20년을 숨어 있었으니.”
그는 정마대전의 결말이 꽤 찝찝했던 것을 떠올렸다.
장소는 섬서성 서안이었다.
정파 무림과 마교는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양측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절정 고수들을 모두 끌어모아 서로의 존폐를 가를 마지막 결전을.
하지만 마교는 그 결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때 결판을 냈더라면 좀 나아졌을까?”
그는 잠시 이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때 정말로 마교와 본격적으로 맞붙었다면 더욱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것도 중원 전체에 엄청난 타격이 올 정도의 피를.
남궁기철은 서신을 고이 접어 촛불에 태웠다.
“마교를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어쩌면 지금처럼 굳이 마교를 찾지 않고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 나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교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다시 무림을 피로 물들이리라는 것을 아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
그는 긴 한숨을 한 번 내뱉고는 다시금 서류 더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드디어 하현과 남궁민이 소림을 떠나는 날이 왔다.
며칠이나 기다린 끝에 주원대사가 그들에게 어른 주먹만 한 목함 세 개를 건넸고, 그 안에는 소환단이 들어 있었다.
소환단까지 받아든 이상 더는 소림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남궁세가까지 일직선으로 갈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놓거라. 도중에 야영은 할 수도 있지만, 며칠씩 쉬어가지는 않을 것이야.”
“네. 사부님.”
취월걸개가 하현에게 으름장을 놓듯 말했건만, 하현은 충분히 자신 있었다.
월룡에게 내공을 건네받은 덕에 단전에서 잠자고 있는 내공이 이전보다 곱절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발하자.”
그들은 간단히 봇짐을 꾸려 메고 방을 나섰다.
소림승들과의 작별인사는 아침 공양을 드릴 때 이미 나누었다.
그들이 지객당을 나설 때, 취월걸개가 마당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월룡…! 아니, 혜원.”
“취월걸개 장로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쳇. 소림에 있는 내내 코빼기도 안 뵈더니.”
혜원대사는 대답 대신에 빙긋 웃으며 합장했다.
취월걸개는 그를 보고 피식 웃더니 하현에게 말했다.
“숭산 아래로 내려와서 그대로 길을 따라오면 잡다한 물건을 파는 잡화점이 있다. 그곳에서 화섭자 따위를 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이야기하고 빨리 내려오너라.”
“천천히 이야기하고 빨리요?”
“그래!”
취월걸개는 혜원대사에게 찡긋 눈인사하고는 남궁민을 데리고 지객당을 완전히 나서버렸다.
“부럽구려.”
“뭐가요?”
“시주는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져가는 달은 원래 태양을 부러워하는 법이라오.”
“져가는 달…? 보통은 지는 태양이라고 하지 않아요?”
혜원대사는 빙긋 웃었다.
그의 별호였던 월룡을 인용하여 한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후후. 시주는 지금처럼 밝게 빛나주시오.”
“네. 제 안에서 월룡의 의지는 영원할 것이니까요.”
“고맙소. 늙은이의 마지막 충고를 하나 되겠소?”
“얼마든지요.”
“가진 것이 얼마나 많아지더라도. 항상 처음을 생각하시오.”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하하. 길어지면 잔소리가 되니, 여기까지만 하겠소. 얼른 내려가 보시구려.”
“네. 스님!”
하현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숭산 아래를 향해 달려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는 혜원대사의 표정은 밝았다.
‘무림에서 맺은 마지막 인연으로는 적당하군.’
그는 하현이 내려간 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 * *
하현은 숭산 바로 아래의 잡화점에서 취월걸개와 남궁민을 다시 만난 후 그들의 일과는 오직 달리는 것뿐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길을 잘 알아야 한다. 내가 가는 길을 잘 기억해 두거라!”
“네!”
하현은 확실히 이곳을 향해 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내공의 총량이 많아지니, 다시 회수하는 양도 많아졌다.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무한신법도 꿈은 아니야.’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달라진 그를 느끼며 하현은 기쁘게 달려갔다.
그리고 하현의 변화는 취월걸개와 남궁민 역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취월걸개의 계획은 하남성 정양(正楊)쯤에서 한 번 쉬어가는 것이었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로 경공을 펼쳤음에도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온 하현 덕분에 고시까지 한 번에 올 수 있었다.
“현아. 힘들지 않느냐?”
“힘들긴 한데, 할만해요.”
“허허. 몸은 괜찮고?”
하현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보다 더 좋을 때가 없을 정도예요.”
“그러냐?”
타인의 내공을 전수받았을 때 올 수도 있는 부작용을 우려한 질문이었건만, 부작용은커녕 하현의 말대로 평소보다 더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렇구먼. 반 각만 더 가면 고시현에 진입할 수는 있다. 그런데 오늘은 이만 쉬어가자.”
쉬어가자는 그의 말에 남궁민이 물었다.
“아직도 해가 떠 있는데 아예 고시현에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시현에 가면 어디서 쉬려고. 거지가 객잔이라도 잡으랴? 받아주는 객잔은 있고?”
“아…….”
남궁민이 아무 대답도 못하자 취월걸개가 킬킬 웃으며 말했따.
“여기까지 오면서 제대로 쉬어가질 않았으니, 푹 쉰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괜히 들어갔다가 개방 식구들이나 정가한테 걸리면 골치 아파져!”
“네. 어르신.”
“하현이 너도 괜찮지?”
“네. 좋습니다!”
곧 주변에서 괜찮은 공터를 찾은 그들은 야영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불을 붙이고 있던 하현이 대강 바닥만 고르게 펼치고 그곳에 털썩 앉은 취월걸개를 보며 말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쉴 준비를 하니까 이상해요.”
“왜. 지칠 때까지 달리라고 하지 않아서?”
“네.”
“그건 다 너 수련하라고 했던 거였고. 지금은 수련이 아니니까. 평소에는 언제든 오할의 힘은 남겨놓으라고 한 말 잊었느냐?”
“아! 기억하고 있어요.”
하현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취월걸개가 킬킬 웃었다.
야영 준비를 모두 끝내고 그들은 일찍 자리를 잡았다.
잘 쉬는 것도 수련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 취월걸개 덕에 두 다리를 펴고 쉬려는데,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비명을 지르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하현과 남궁민도 들었는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취월걸개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들었냐?”
“네. 들었습니다.”
“녹림도? 하긴. 만날 때가 되었긴 했지.”
그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하현에게 말했다.
“현아. 갔다 와 보거라.”
“네. 스승님.”
“아까 남겨놓은 힘을 쓸 때다.”
“네!”
하현이 몸을 일으켜 소리를 죽이고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갔다.
“어르신, 현이 혼자 가게 합니까?”
“쉿! 조용히 하고 따라와. 현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아볼 좋은 기회 아니냐?”
그리고 취월걸개는 소리를 한층 더 줄이고 하현을 몰래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