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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95화 (95/304)

95화

“그래서 뭐. 억울한 건 알겠다. 그런데 장소유를 납치해내면 어떡하려고 한 거야?”

“산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산?”

“네. 무림을 떠나 산에 집이라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살려고…….”

취월걸개가 콧방귀를 흥하고 뀌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농사는 지어봤어? 아니, 그 전에 집은 지을 줄 알고?”

“그건…….”

그가 혀를 쯧쯧 찼다.

“농사를 짓는다고 곡식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줄 알아? 그동안은 뭘 먹고 살려고?”

“그전에는 사냥이라도 해서 먹고 사려 했습니다.”

취월걸개는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냥은 뭐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 암만 무공을 익혔다 해도, 살아있는 동물을 잡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개나 소나 다 사냥할 줄 알면 엽사가 왜 있겠어?”

유정협은 순간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취월걸개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기에 대꾸할 수 없었다.

비록 군소방파라고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유가장의 대공자로 살아왔던 그다.

그런 그가 취월걸개가 언급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잘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장소유 역시 부잣집이 막내딸로 귀하게 자랐기에 아무것도 모를 리가 분명하고.

“그러면…. 그러면 어쩌란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 시집가는 것을 두고만 봤어야 했다는 것입니까…….”

유정협은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취월걸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더욱 성이 난 얼굴이었다.

“네 억울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으로 이끄는 것은 괜찮고?”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유정협을 빤히 바라보던 취월걸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테냐.”

“무엇을 말입니까?”

“원칙대로라면 너를 무림맹에 끌고 가야 한다. 납치사주, 사파와의 내통만으로도 충분한 중죄다.”

유정협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걸리면 그대로 끝이라는 것은 교룡문에 의뢰를 넣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다만, 이제 와서 두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는 바닥에 이마를 한 번 더 쿵 하고 박으며 취월걸개에게 외쳤다.

“장로님! 제가 지은 죄는 너무도 명백하여 제가 죽는다 하여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죽기 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유정협은 곧 울 것 같은 눈을 부릅 뜬 채 비장하게 말했다.

“먼저 이번 일은 저희 가문인 유가장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부디 제가 처벌을 받더라도 유가장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덕산검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건 내가 보장하지.”

“감사합니다.”

유정협은 아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취월걸개는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말했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해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야? 잘 생각해라. 넌 피해자가 아니다. 너의 그 말도 안 되는 사랑놀음 때문에 장 영감네 호위무사들은 다 죽을 뻔했다.”

“그건…. 제가 잠시 어떻게 되었었나 봅니다. 그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계획에 사람이 죽을 수 있었다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쯧쯧. 어리석구나. 그럼 이제 일어나라. 갈 길이 머니. 남궁세가에 들렀다가 너는 나와 무림맹으로 갈 것이다.”

유정협은 힘없이 일어섰다.

취월걸개는 굳이 그를 속박하지 않았다.

설사 그가 도망친다고 해도 취월걸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부스럭-

그때 갈대밭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취월걸개가 하현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기감이 가장 뛰어난 것이 하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도 상대가 지척에 올 때까지 누군가 접근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고수인가?’

이 정도로 기척이 없이 다가오려면 두 경우 중의 하나뿐이다.

하나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이거나, 다른 하나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아……!”

갈대밭을 뚫고 나온 사람은 여인이었다.

그것도 무공을 전혀 배우지 않은.

“어……?!”

“저 여인은?”

그 여인의 얼굴은 여기 있는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장영감의 딸. 장소유였으니까.

그녀는 이곳에 이토록 사람이 많을지 몰랐는지 놀란 토끼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헙……!”

그러다가 취월걸개를 발견하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취월걸개는 분명 그녀를 구해주고 갈 길을 갔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유정협을 발견했다.

“가가……!”

순간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섭다는 취월걸개 역시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유정협에게 달려가 이마의 피를 조심스레 소매로 닦아 주었다.

“소유…….”

유정협은 장소유의 이름을 애틋하게 한 번 부르고는,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이제 그만하시오.”

“가가!”

“어찌 이곳까지 온 것이오? 호위는 어디에 있고 혼자 여기에 왔단 말이오?”

“호위들은 갈대밭 바깥에서 기다리라 했습니다. 혼자 있고 싶다고요.”

“그러면 이 먼 갈대밭을 혼자서 헤쳐왔다는 것이오?”

장소유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취월걸개와 헤어져 장영감의 장원에 도착한 후에 날이 밝는 대로 이곳으로 온 듯했다.

똑같이 가마로 움직였을 테지만, 신법을 수련시키며 온 취월걸개 일행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느렸을 것이 분명했기에 이토록 늦은 것이고.

유정협은 슬쩍 취월걸개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언가 결심을 한 것으로 보였다.

“소유. 내 말 잘 들으시오.”

“네. 가가.”

“우리의 연은 여기까지인가 보오.”

“네……?!”

장소유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녀는 유정협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할 때, 유정협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내가 생각해 낸 바보 같은 계획으로 모두가 큰 화를 입을 뻔했소. 더는 주변 분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구려. 돌아가시오.”

그는 장소유에게서 차갑게 뒤돌아섰다.

그리고 취월걸개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로님.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의 표정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출발이라니.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알 것 없소.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건강히 지내시오.”

“가가……!”

장소유가 그를 처절하게 불렀지만, 유정협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게 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

여기 있는 모두가 말이 없었다.

말이 많던 취월걸개 역시 말없이 가만히 그들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아……!”

그때 장소유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취월걸개에게 달려가 말했다.

“어르신.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

“이 계획을 처음에 구상한 것은 모두 저예요. 여기 있는 유공자께서는 반대했지만, 제가 설득해서 한 일이에요.”

장소유는 취월걸개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취월걸개는 무림의 유명인사 중 한 명인가.

엄밀히 말하면 무림에 속하지 않은 그녀이지만, 취월걸개의 성정은 익히 알고 있었다.

“네가 짠 계획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벌을 하시려거든 저를 벌해 주세요.”

그녀의 표정 역시 결연했다.

“양양지역에 있다는 사도문을 알아본 것도 저이고, 은자를 내놓은 것도 저예요.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유 공자에게 제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리려고요.”

“이대로 도망치려고?”

“아니요. 우리의 계획이 어긋난 순간,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사라졌어요. 제가 도망치려면…. 저는 그곳에서 죽었어야 했어요.”

장소유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주어진 운명을 바꾸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취월걸개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평생 운명에 의해 끌려다녔던 그녀였으니까.

“소유!”

유정협이 절절하게 장소유의 이름을 불렀다.

장소유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뜨거운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나누는 듯했다.

“놀고들 있네. 신파는 다 끝났어?”

한참을 지켜보고 있던 취월걸개가 말을 툭 내뱉었다.

그의 말에 유정협은 맥이 탁 풀리는 듯했지만, 겨우 대답했다.

“네. 더는 들으실 말씀 없습니다.”

“그러면 가자. 장소유, 너는 집으로 돌아가서 죽은 듯 살아라. 내가 찾아갈 일이 없게 해라.”

“알겠습니다. 어르신…. 흑.”

장소유는 결국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릇된 방식은 결국 파국을 초래했다.

“그럼 우리는 출발하자. 여기까지 혼자 왔으니, 혼자서 내려갈 수 있겠지?”

“네. 어르신.”

취월걸개가 고개를 돌려 가마꾼들에게 말했다.

“너희 여섯. 너희들은 이대로 양양으로 돌아가라.”

“네?!”

“이 가마 잘 쓰고 반납하기로 했다며? 너희가 들고 가서 반납해라. 어딘지는 알지?”

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양양바닥은 저희가 훤히 꿰고 있습니다. 어디인지 압니다.”

“잘됐네. 당장 출발해라.”

“알겠습니다!”

운후를 포함한 여섯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취월걸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니!

하지만, 이어지는 취월걸개의 말은 그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혹시, 너네 거지 하고 싶은 놈 있냐?”

“?!”

일반적으로 이런 질문을 듣는다면 세상에 거지를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저 질문을 누가 하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취월걸개는 개방의 장로.

저 물음은 개방에 입방하지 않겠냐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눈을 열심히 굴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한때는 저잣거리의 왈패였고, 또 한낮 사파문의 졸개였던 그들로서는 일생일대의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거지 생활이라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게다. 그래도 하고 싶다면 지금 말해라.”

곽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그는 왈패의 일원으로 자유롭게 살던 때가 그립기도 했다.

‘만약 여기서 양양으로 돌아가서 어디론가 도망친다면 다시 그때처럼 살 수 있을 텐데……!’

그의 무공수준은 무림인의 기준으로는 하찮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서 욕심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이미 한 번 무공을 맛봤기에 나는 욕심.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그는 취월걸개의 무서움을 떠올렸고, 또 하현의 신위를 떠올렸다.

‘나도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만 있다면……!’

조금씩 일어나던 욕심이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

평생 살며 구파일방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흔하게 오겠는가?

비록 거지로 평생을 살아야 할지라도, 그는 이미 무인이다.

무공을 익히고 강해지는 데에서 오는 쾌감은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한다.

스윽

그는 눈을 꾹 감은 체로 조용히슬며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떴다.

“어?”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미 자신을 포함해 다섯 개의 손이 올라와 있었다.

“클클. 개방에 들어오지 않겠다 했으면 싸그리 잡아서 무림맹에 넘기려고 했거늘.”

킬킬 웃던 그가 유일하게 손을 들지 않은 자를 보았다.

그는 운후였다.

취월걸개는 은은하게 노기를 내비치며 물었다.

“넌 거지로는 살고 싶지 않은 게야?”

“그, 그렇습니다.”

그는 그 기운에 덜덜 떨면서도 똑바로 말했다.

“그러면 뭐. 넌 계속 왈패로 살 테냐?!”

“그것도 아닙니다. 기회를 한 번만 얻고 싶습니다.”

“무슨 기회?”

운후가 취월걸개가 아닌, 그 옆에 하현을 보고는 허리를 완전히 접으며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 저는 공자님을 따라 남궁세가로 가고 싶습니다.”

“뭐?”

취월걸개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지만, 운후는 할 말을 계속했다.

“하인으로도 좋고, 몸종이라 해도 좋습니다. 제가 만약 새 삶을 산다면 그건 공자님을 모시며 살고 싶습니다.”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그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하현에게 쐐기를 박으려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만약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무림맹으로 가겠습니다. 가서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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