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운후는 하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현은 그 시선을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남궁민을 돌아보았다.
“형님. 이거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지 않아요?”
“어째서?”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건 할아버지가 결정하실 일이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남궁민이 슬쩍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예외가 두 가지 있다.”
“예외요?”
“첫 번째는 너도 익히 하는 방법이다. 청룡각 입관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지. 그리고 두 번째는 저자의 말대로 몸종이나 하인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세가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자들을 일일이 할아버지께서 확인할 수는 없지 않으냐.”
“그러면 제가 데려오고 싶은 사람도 데려올 수 있다는 것인가요?”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당당한 우리 세가의 일원이니 네 하인을 선택할 권리는 있지.”
남궁민의 말을 들은 운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하현은 남궁민을 한 번, 취월걸개를 한 번 돌아보았다.
“흥. 네 맘대로 해라. 내가 거지 하라고 해서 거절당한 게 이번으로 두 번 째네.”
남궁민이 놀라며 대답했다.
“이전에도 거절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누구인지 참…. 담이 크군요.”
“그렇지? 내가 봐도 네 동생은 담이 큰 편이긴 해.”
“아. 그것이 하현이었습니까?”
남궁민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 웃었다.
그 와중에 하현은 운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운후도 슬쩍 고개를 들어 하현을 바라봐 둘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어린애 눈이……!’
운후는 하마터면 고개를 돌릴 뻔했다.
물론 하현이 보통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가까이에서 봐 왔기에 그도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눈을 마주쳐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속마음이 하나하나 읽히는 듯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몇 가지 있어요.”
“감사합니다. 공자!”
“조건도 안 들어보시는 거예요?”
“무슨 조건이든 따르겠습니다.”
하현이 피식 웃었다.
“첫째로, 제가 허락했다 하더라도 저는 가주님께 다시 한번 여쭤볼 겁니다. 가주님이 반대하시면 그대로 미련 없이 나가시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둘째로 혹여나 세가 내에서 물의를 일으킨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철저히 하인으로서 대할 겁니다. 그 이상을 기대하지 세요.”
“네. 허튼 마음 갖지 않겠습니다.”
운후는 하현이 말하는 즉각즉각 대답했다.
하현이 잠시 남궁민을 바라보자, 남궁민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부님. 이 사람 제가 데리고 가도 되죠?”
“떼잉. 개중에 제일 쓸만한 놈이었거늘. 제자도 아니고 하인을 자처해? 제 팔자 지가 말아먹는데 내가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훈훈한 미소가 걸릴락 말락 하고 있다.
아직 어린 하현이 벌써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진 것에 기분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취월걸개는 다시 표정을 싹 굳히고 다섯 명의 가마꾼들에게
“그러면 이 가마는 너희 다섯이서 옮겨라. 충분하지?”
“네. 충분합니다!”
“그러면 가마를 돌려주고, 너희는 개봉으로 가라. 개봉에는 개방의 총타가 있다.”
“들어봤습니다.”
취월걸개가 다섯의 면면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거기 너. 이리 와 봐라.”
“저 말입니까?”
취월걸개가 부른 자는 곽규였다.
“이 중에서는 네가 우두머리겠군. 저기 저 배신자를 빼면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총타는 이렇게 가면 된다.”
취월걸개는 곽규에게 총타에 들어서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이전에 하현과 함께 갔던 방법과는 또 다른 방법이었는데, 개방에 입방하려는 자들이 들어가는 길인 것으로 보였다.
“알겠지? 두 번은 설명 안 한다. 여기서 찾아오던, 못 찾아오던, 그건 네 팔자다.”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거기에 도착하면 누구든 간에 거지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이렇게 말하면 된다. 신선이 사는 달을 쫓아 이곳까지 왔다고.”
“신선이 사는 달…. 알겠습니다.”
곽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말을 잊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그럼 출발해라.”
곽규와 나머지 가마꾼들은 가마를 들고 일어섰다.
비록 한 명이 없지만, 제법 균형을 맞추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능숙한 모습이었다.
‘형님…….’
곽규는 떠나기 전, 어느새 하현보다 조금 뒤에 서 있는 운후를 바라보았다.
운후도 그를 보고 있었던 덕분에, 그들은 말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살아서 만나자.’
‘형님도 살아남으시오.’
그들이 눈빛을 주고받고 나서, 곽규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가마를 메고 갈대숲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는 여직 안 내려가고 뭐 하고 있어?”
취월걸개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의 날카로운 말이 향한 곳은 아직도 엎어져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소유였다.
“네 맘대로 해라. 여기서 얼어 죽든 말든. 우리도 가자. 가마를 처리해준 덕에 곧바로 남궁세가로 가면 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네. 사부님.”
그들은 장소유를 완전히 무시한 채 짐을 꾸렸다.
사실 하현이 갈아입은 옷가지를 챙기는 게 전부였기에 짐이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출발했다.
앞선 취월걸개의 뒤를 따르는 자 중에서는 유정협도 있었다.
유정협은 쓰러져 있는 장소유를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큰 결심을 한 것으로 보였다.
“흑…….”
장소유의 흐느낌의 그의 귓가를 스쳤다.
유정협은 저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고개 돌리지 말아라.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오는 전음.
취월걸개의 전음성이었다.
유정협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사락사락-
갈대밭에는 그들의 옷깃 스치는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장소유의 흐느낌만이 맴돌 뿐이었다.
* * *
장소유는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리고 갈대숲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갈대밭 바깥에는 아까 그녀가 내렸던 자리에 그대로 호위와 가마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찾아가려 했습니다. 별일 없으셨던 겁니까?”
장소유가 갈대밭에 들어가기 전, 절대로 따라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통에 호위들은 이곳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돌아가죠.”
“알겠습니다.”
장소유는 힘없이 가마에 올라탔다.
이윽고 가마는 출발했다.
행선지는 고시현에 있는 장씨상단이었다.
* * *
밤이 다 지나가고, 말간 해가 얼굴을 내비치는 새벽이 되었다.
한참이 걸려 그녀의 집에 거의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집이 아니지…….’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그녀의 집은 하남에 있는 금와상단이다.
그녀는 금와상단을 생각하자 몸서리쳐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현재 그녀의 남편인 금와상단의 둘째 길치녹을 생각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장소유는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히 다른 사랑하는 이가 있고, 외모가 못생기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교활한 자.’
금와상단은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상단이었다.
그 덕에 하남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규모의 상단이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무림맹의 눈을 피해 개파하는 사파문에게 물자와 무기를 비싼 값에 암거래하기도 하는 떳떳지 못한 상단이었다.
그 덕에 그녀가 교룡문을 알게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그녀의 남편인 길치녹은 그런 금와상단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자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항상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양심이나 도덕은 찾아볼 수 없는 자였다.
죽도록 싫지만, 이 가마가 집에 도착하면 그녀는 다시 금와상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예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고 싶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정말로 녹림채라도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때였다.
덜컹-
“꺄악!”
가마가 급작스럽게 멈췄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입을 막았다.
며칠 전에 교룡문도들과 마주쳤을 때도 딱 이런 상황이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바깥의 상황에 귀 기울였다.
“웬 놈이냐!”
“그건 알 것 없고. 이 가마에 장씨상단의 막내딸이 타고 있다지?”
“아, 아니다!”
“그래? 그건,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채앵!
검을 뽑는 소리가 들리고.
채채챙-!
몇 번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상황임에도 실제도 맞닥뜨리자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퍼퍼벅!
“으악!”
“크윽!”
그녀는 가마의 문고리를 잡은 뒤 마음을 굳게 먹고 벌컥 문을 열고 가마에서 내렸다.
이미 네 명의 가마꾼과 두 명의 호위는 얻어맞았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검은색 복면을 쓴 자가 이제 막 검으로 호위를 찌르려 하는 찰나였다.
“자, 잠시만요!”
그녀의 목소리에 검이 공중에서 우뚝 멈추었다.
“용건은 저한테 있는 거잖아요. 저만 데려가시면 되지, 다른 사람은 죽일 필요 없지 않아요?”
“호오. 제법 강단 있군. 스스로 나를 따라가겠다는 거냐?”
“네, 목적이 저를 데려가시는 거라면요.”
복면인은 큭큭 웃었다.
“평생 이런 일은 또 처음이군. 납치하러 왔는데, 스스로 따라나선다니. 이거 함정 아니야? 너, 장영감네 막내딸이 맞아?”
“네. 맞아요.”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던 복면인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건 확인해보면 알겠지. 만약 거짓이라면, 곱게 죽지 못할 줄 알아라.”
복면인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번개 같은 속도로 보법을 전개해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그대로 혼혈을 찔렀다.
그녀는 단말마도 없이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크윽…. 아가씨를…. 내놓아라.”
호위 하나가 기절하지 않았는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부잣집 강아지라도 너도 제법 끈질기군. 여기 이 아가씨가 너희는 살려주라고 했으니 오늘은 살려 주겠다. 다음은 없을 줄 알아라.”
“아가씨!”
복면인은 장소유를 어깨에 둘러메더니 그대로 신형을 날려 호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위가 목이 터져라 불러봤지만, 그의 목소리는 복면인에게 닿지 않았다.
* * *
고시현의 장씨세가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장소유를 태우고 부양현까지 갔다 온 호위와 가마꾼들은 고초를 겪었다.
부양까지는 왜 갔다 왔는지, 거기서 장소유가 무엇을 했는지, 그녀를 납치해간 사람의 인상착의는 어떤지에 대해서 캐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님! 정말로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부양현에는 아가씨가 제발 가자고 해서 간 것뿐이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갈대밭에서 아가씨를 기다리다가 다시 태워서 돌아오는 길에 그자를 만난 겁니다. 얼굴에는 복면을 뒤집어써서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부양현의 갈대밭으로 사람을 보내고, 그 인근을 수색하게 해라. 그리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지를 알아봐라. 당장!”
장씨상단의 주인이자 장노야(老爺) 혹은 장영감으로 불리는 장성길은 두 눈에서 불을 켰다.
“도움이 청할 곳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멍청한 것. 무림세가나 문파를 알아보란 말이다. 평소에 우리와 잘 지내는 곳이 있지 않으냐? 우리가 후원을 얼마나 하는데, 이렇게 급할 때 써먹어야지!”
“알겠습니다!”
하인이 부리나케 달려나가고, 그는 탈력감이 드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잠시 한숨 돌리려는데, 누군가 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나갔던 그 하인이었다.
“왜 다시 돌아오는 게야?”
“주인님. 이것 보십시오!”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납치범으로부터의 서신입니다!”
장노야는 서둘러 서신을 확인했다.
서신에는 힘 있는 필체로 한 줄의 글만이 적혀있었다.
[딸을 살리고 싶다면 내일 모레까지 황금 오십 관을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