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다음 날 새벽.
하현과 남궁민 그리고 유정협은 장노야와 함께 산을 올랐다.
목적지는 고시현에서 제법 가까운 광산(光山).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산꼭대기에 해가 걸리면 마치 산 전체가 빛나는 것 같다 하여 광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 산은 이 일대에서는 제법 높은 산 중의 하나였다.
장노야가 하현에게 물었다.
“힘들지는 않소?”
“이래 봬도 제가 힘이 세서 괜찮아요.”
하현은 남궁민과 함께 제법 커다란 궤짝을 한 손씩 나눠 들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반의 동과 절반의 금이었다.
도합 무려 오십 관(약 187.5kg)이나 되는 무게였건만, 둘은 거뜬하게 들었다.
하현은 무공을 쓸 때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내공을 다루는 것에 아주 익숙해졌다.
“…….”
여기까지 오는 동안 유정협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노야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처음이기에 뭐라고 할 만도 하지만, 그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이쯤인 것 같습니다.”
남궁민이 위치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시간은 한창 묘시 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매복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괜찮소?”
장노야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지만, 남궁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상대를 수틀리게 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일단은 상대의 말을 따르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알겠소.”
장노야는 초조한지 손톱을 물어뜯었다.
잠시 시간이 더 흐르고.
잠자코 있던 하현의 입이 열렸다.
“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건만, 적막을 깨기에는 충분했다.
저벅저벅-
숲속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색의 잠행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도 검정색 복면을 착용했다.
하지만 하현은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가뜩이나 크지 않은 키에 구부정한 허리.
게다가 마치 허공을 걸어 다니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까지 갖춘 사람은 하현이 아는 한 단 사람밖에 없었다.
‘사부님!’
하현은 속으로 웃음이 나려 하는 것을 겨우 참았다.
대신 짜여진 각본대로 외쳤다.
“네가 장소저를 납치한 원흉이냐!”
“납치라니? 그저 잠시 데리고 있을 뿐이다.”
취월걸개는 목소리를 변조해서 말했다.
평소에 철판을 긁는듯한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낮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장노야가 외쳤다.
“누가 보낸 것이냐. 천상인이냐? 아니면 율현가에서 보낸 것이냐?!”
그는 이번 일이 단순히 몸값을 위한 납치는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 추측했다.
천상인과 율현가는 장씨상단 근처에서 그 다음가는 상단을 운영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누군가를 사주하여 일으킨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뭐? 그런 개뼉다구 같은 곳들이 어딘지는 모르겠고. 준비해오라는 황금은 준비했나?”
하현은 물론 남궁민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목소리는 변조했지만, 그 말투는 전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장노야는 현재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일까?
혹은 흉수가 취월걸개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일까?
평소 취월걸개와 안면이 있는 그이지만, 복면인이 취월걸개라는 것은 전혀 알아채지도 못하고 소리쳤다.
“여기 있다!”
“호오. 부피로 봐서는 제대로 구해온 것 같군. 어디, 물건부터 확인해볼까?”
“안 된다! 그 전에 내 딸이 잘 살아있는지부터 봐야겠다!”
“네 딸은 잘 자고 있다. 물건을 건네주면 어디인지 가르쳐주도록 하지.”
장노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딸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못 건네준다. 차라리 나를 죽이고 이걸 가져가라 이놈아!”
“클클. 노인네가 성정 한번 고약하군.”
취월걸개가 킥킥 웃더니 장노야와 옆에 있는 유정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너와 거기 옆에 있는 너. 둘이서만 확인하고 와라. 저기 옆으로 언덕 하나를 넘어가면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 나온다. 네 딸은 거기 있다.”
“……!”
장노야는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지 놀란 얼굴이었다.
“가서 허튼짓할 생각 하지 마라. 내 동료가 기다리고 있다. 혹시나 네 딸을 구출하려 하거든 곧바로 내 동료가 네 딸을 죽일 것이다.”
“알겠다. 확인만 하고 오지.”
그는 유정협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취월걸개는 언덕 하나를 넘어가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 거리는 생각보다 꽤 멀었다.
장노야와 유정협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취월걸개는 복면을 벗었다.
“아이고, 답답해라. 도대체 살수들은 이걸 어떻게 하루 죙~일 쓰고 있는 거야?”
“저는 사부님이 이렇게 제대로 된 옷 입고 있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취월걸개는 세모눈을 뜨며 말했다.
“뭐야? 그럼 평소에는 제대로 되지 않은 옷을 입었다는 게야?”
“음…. 옷보다는 넝마에 가깝…….”
“뭐?! 그게 뭐 어때서! 12년밖에 안 입은 새 옷을!”
취월걸개가 분개했지만, 하현과 남궁민은 다른 지점에서 놀랐다.
한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12년이나 입었다니.
“크흠…. 그랬었군요. 하여튼 고생하셨습니다. 어르신.”
“고생은 무슨. 고생은 이제부터 해야 하는데.”
“고생이요…? 아!”
하현이 옆에 놓인 궤짝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가지고 오는 것도 별로 힘들지 않았거든요. 그쵸 형님?”
“맞습니다. 저희가 다시 잘 가져다 두겠습니다.”
“그 얘기 한 거 아닌데? 그거 들고 오는 데 고생했다고 하면 무공을 헛 배운 거지.”
“그럼요?”
취월걸개가 킬킬 웃었다.
굉장히 재미있는 것을 생각해낸 듯했다.
“너희는 정의로운 남궁세가의 사람 아니냐.”
“그렇죠.”
“나는 지금 누구냐.”
“누구긴요. 제 사부님이시고, 개방의 장로시고…….”
취월걸개가 단호하게 손을 그었다.
“아니. 그건 아까까지의 나고. 지금의 내가 누구냐는 말이다.”
“지금의……?”
하현이 저도 모르게 취월걸개의 머리부터 발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납치범……?”
“옳지! 바로 그거다. 이것이 이제 내 계획의 마지막이다. 정의로운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납치범을 이기는 것.”
하현과 남궁민이 아직 그의 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취월걸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기 너머에서는 제 여자를 구하려는 유가장의 첫째가, 또 다른 납치범을 이겨야겠지.”
“또 다른 납치범이라면, 운후 아저씨 말이에요?”
“큭큭. 그래. 내가 볼 때 유정협이나 토룡출신이나 실력은 그게 그거거든. 장 영감이 볼 때는 하늘 같겠지만.”
하현은 점점 불안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취월걸개에게 계략이라는 것을 배우며 잠시나마 그의 이성적인 모습을 엿보았다.
작전은 완벽하게 적중했고, 심지어 타인의 심리를 예측하는 것마저 성공했다.
하지만 하현은 한 가지를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
그의 사부는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
“흐흐. 자, 이다음은 어떻게 되겠느냐?”
취월걸개는 하현을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마치 요놈을 어떻게 요리해줄까? 라는 표정이었다.
하현은 순간 오한이 들었지만, 그가 추측한 결론을 말했다.
“그러니까. 사부님께서 생각하신 각본은 이런 거죠? 정협 형님이랑, 운후 아저씨가 서로 맞붙고 있을 때, 장노야가 장소유 소저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
“그래. 바로 그거다. 이제 너도 계략을 조금은 이해했구나.”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부님을 이겨야 해요?”
취월걸개가 혀를 차며 손가락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이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유정협은 싸움을 시작하기 직전에 장노야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남궁세가분들에게로 도망치세요!’”
“그러면 장노야는 다시 이쪽으로 오게 될 테고…….”
“우리가 싸우지 않고 이렇게 희희낙락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냐?”
“그렇…. 죠?”
“그러니, 최선을 다해라. 참고로 난 봐줄 생각 없다. 그리고 운후에게도 절대 봐주지 말고 진심으로 하라고 했다. 죽여도 내가 책임진다고.”
“……!”
취월걸개의 두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현이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 취월걸개가 복면을 다시 얼굴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의 몸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쒜에에엑!
갑작스레 하현의 눈 옆에서 나타난 취월걸개가 하현에게 손을 뻗어왔다.
“으앗!”
하현은 깜짝 놀란 와중에도 보법을 극성으로 밟아 취월걸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바로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가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잘 봐주십시오. 하고 들어올 줄 알았냐!”
취월걸개는 입으로는 말하며 하현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의 장점인 신법을 극도로 활용하여 보법과 결합시킨 그만의 독특한 움직임이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지만, 하현은 취월걸개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아니, 그의 눈에서 느껴졌다.
‘재밌어하고 계셔……!’
하현의 느낌대로, 지금 이 순간 취월걸개는 순수하게 대련을 즐기려는 듯 보였다.
‘이건 못 피한다!’
하현이 아무리 보법에 출중한 재능이 있다고 한들, 평생을 공부해온 취월걸개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하현은 꼼짝없이 취월걸개의 손에 당할 처지였다.
콰악-!
요란한 소리가 났건만, 취월걸개의 손아귀는 하현의 몸에 닿지 못했다.
어느샌가 나타난 남궁민이 취월걸개와 하현의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호오!”
취월걸개가 자신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었다.
남궁민의 보법은 빠르지는 않다.
엄밀히 말하면 하현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어쩌면 조금 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취월걸개가 향하는 방향과 속도를 정확히 계산하여 그사이에 파고들었다.
취월걸개는 그것을 이 짧은 순간에 알아챈 것이다.
파바박 파바바박!
취월걸개와 남궁민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서로가 서로의 팔을 금나수의 묘로 잡아채려는 움직임.
둘을 서로를 잡지 못했다.
얼핏 보면 호각으로 보일 정도.
하지만, 남궁민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밀린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상대하고 있지만, 취월걸개에게는 여유가 느껴졌다.
앞으로 세 수정도면 팔을 붙잡힐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이번에는 하현이 남궁민을 구해줄 차례였다.
“타아압!”
하현은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취월걸개에게 주먹을 뻗었다.
얼마 전 깨달은 백보신권의 묘를 담은 권격이었다.
파아악!
하현의 원격은 정확히 취월걸개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그 여파인지 취월걸개는 남궁민에게서 떨어지며 옆으로 두 발자국 정도 밀려났다.
취월걸개는 옆구리를 슬쩍 바라보고, 그곳을 벅벅 긁더니 말했다.
“모기가 지나갔나? 현아. 혹시 이런 걸 하려고 했던 것이야?”
고오오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의 폭풍이라고 부를 만큼의 기운이 몰아치더니 곧 강풍을 불러일으켰다.
하현과 남궁민은 물론, 취월걸개의 옷 소매까지 펄럭일 정도의 강풍이었다.
“아, 아니. 그건 강룡십팔장……!”
분명히 복면으로 가려져 있건만, 하현과 남궁민은 분명히 본 것 같았다.
취월걸개의 웃는 얼굴을.
“받아봐라!”
콰아아아아--
강력한 장풍이 하현에게 쏟아졌다.
“으윽!”
채앵!
하현은 엄청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꺼내 들고는 검에 내공을 주입하며 그 기운에 맞섰다.
“제법 버티는데?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쾅-!
취월걸개가 쾌활하게 말하며 이번에는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한층 더 강맹한 기운이 하현에게 쏟아졌다.
우우웅-
하현의 검이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우는가 싶더니.
퍼버버벅-!
수많은 장력이 하현의 몸을 두들겼다.
많이 상쇄된 덕분에 치명타를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먹에 얻어맞은 것 같은 고통을 동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장력에 얻어맞은 하현이 뒤를 데굴데굴 구르고서는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데?!’
하현은 순간 취월걸개 말고, 그의 다른 별호가 떠올랐다.
‘광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