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한편, 유정협은 장노야를 데리고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취월걸개가 그에게 보낸 전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두막으로 가서 운후와 붙어라. 그리고 이겨라. 만약 못 해내면 장소유는 내가 어디 멀리 보내버릴 것이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취월걸개의 다음 말을 떠올렸다.
‘운후와 싸움이 붙으면 장영감에게 장소유를 데리고 남궁세가 사람들에게 도망가라고 외쳐라.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
유정협은 솔직히 말해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걸까…….’
그는 잘한 것이 하나 없었다.
사실 장소유가 장노야의 고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도,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필사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무가에 시집오는 것보다 내로라하는 부잣집에 시집가는 것이 그녀가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비겁한 놈이다…….’
그리고 장소유가 사파문도에게 의뢰를 넣어놓았다고 스스로 납치되겠다며 서신을 보내왔을 때도, 그는 그녀를 말리지 않고 못 이기는 척 그녀의 말을 따랐다.
사파문과 내통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면서도…….
“유공자.”
그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 때, 장노야가 나지막이 유정협을 불렀다.
“네. 노야. 말씀하십시오.”
“내…. 미안했네.”
“무엇 말씀입니까?”
“사실 자네와 내 딸의 관계…. 알고 있었네.”
유정협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자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네. 모든 게 다 내 업보야. 무리해서라도 그렇게 억지로 시집보내지 않았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을…….”
“아닙니다. 어떻게 세상일이 뜻대로 되겠습니까. 노야께서는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덥석
장노야가 유정협의 손을 잡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마우이. 이렇게 나서준 것도 고맙고. 이해해준다고 한 것도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만약…. 우리 모두와 소유가 무사히 돌아가게 되면…….”
“어! 저기인가 봅니다.”
유정협은 멀리서 오두막이 보이자 일부러 장노야의 말을 끊었다.
지금 그 말을 이렇게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그래. 가보지. 어서.”
그들은 서둘러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오두막은 앞서 복면인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 오래 살지 않은 듯, 다 쓰러져가는 낡은 오두막이었다.
문짝은 이미 떨어져 있었고, 창문에도 창호지 하나 없이 휑하니 안이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양손이 묶인 채로 입에 재갈이 물린 장소유가 있었다.
“소유야!”
“장소저!”
그들은 아예 뛰다시피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읍! 읍읍!”
그런데 그들을 발견한 장소유는 필사적으로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소유야. 살아 있었구나……!”
“읍읍!!”
장노야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소유에게 다가갈 때.
채앵-!
“어이쿠!”
그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구석에서 찔러 들어온 검을 언제 유정협이 쳐낸 것이다.
그는 언제 검을 빼 들었는지 갑자기 튀어나온 흑의인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흑의인 운후는 비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만 한다더니. 약속이 다르지 않나?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유정협은 조소를 뱉었다.
“약속은 사람과 하는 것이다. 너희 같은 짐승과 하는 것은 약속이라 할 수 없지.”
“하하. 이것 참. 속상하군.”
자연스럽게 유정협과 운후가 서로 검을 꼬나쥐고 대치하는 형태가 되었다.
유정협은 품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 장노야의 앞에 던졌다.
“노야. 이걸로 장소저가 묶여있는 줄을 끊으시고,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그동안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자, 자네……!”
“남궁세가분들에게까지만 데리고 가신다면 안전할 겁니다. 저도 곧… 뒤따라 가겠습니다. 반드시……!”
장노야는 결연한 표정으로 납치범만을 바라보며 말하는 유정협을 보며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자네…. 고맙네! 꼭 살아 돌아오게.”
끄덕-
유정협이 고개를 끄덕이고.
장노야는 장소유를 데리고 서둘러 오두막을 나갔다.
운후는 그들이 오두막을 벗어난 것을 보고는 말했다.
“자. 그러면 우리도 시작해야겠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오……?”
“하하. 미안하게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저를 무림맹에 보내버리시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소.”
운후가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취월걸개와 하현, 그리고 남궁민의 옆에 있었기에 무척이나 약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도 몇 년간 사선에서 살아남은 무림인이었다.
그리고 취월걸개는 그에게 유정협과 실력으로는 호각이라고 평가했다.
“그분의 가르침을 어깨너머로나마 배우니, 나도 조금은 깨닫는 것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운후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유정협도 한껏 긴장하며 기수식을 취했다.
“미안하오. 나도 절대 질 수 없소.”
“하하. 이렇게 상대와 예의 있게 싸워본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인 것 같소.”
“후후…. 정파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정파의 세계라…. 한낱 하인이지만, 환영해주어 감사하오!”
다다다-
운후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법을 밟아오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유정협도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검을 꼬나쥔 팔을 휘둘러 운후의 검을 맞이했다.
채앵-!!
그들의 검끼리 부딪친 곳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 * *
퍼억!
하현이 또 장력에 복부를 얻어맞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쿨럭.”
이번에는 그 힘을 제대로 흘리지 못한 덕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자. 봤지? 경력이란 건 이렇게 쓰는 것이다. 네가 지금 하는 것은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아. 조금 더 진심을 담아서 방출해야 하는 것이야.”
취월걸개가 여유롭게 말하는 도중에 그의 귓가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릉-!!
하현과 마찬가지로 검을 빼든 남궁민이 취월걸개에게 달려드는 소리였다.
그는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섬전십삼검뢰’
뇌전의 검격이 취월걸개에게 쏟아졌다.
보법과 신법으로 취월걸개를 잡을 수 없다면, 무공으로 잡아낼 속셈이었다.
‘어?’
그런데 남궁민은 번개처럼 쏘아지는 와중, 하현을 바라보고 있던 취월걸개의 눈동자가 빙그르 굴러 남궁민과 눈이 마주쳤다.
콰악-!
그리고 취월걸개는 맨손으로 그대로 남궁민의 검을 잡아버렸다.
“흐흐. 꽤 따끔하구나.”
엄청난 힘의 격차였다.
남궁민이 지금까지 싸워본 어떤 상대도 그의 섬전십삼검뢰를 이토록 가볍게 잡아낸 적은 없었다.
“크읍!”
남궁민이 취월걸개의 손에 잡혀있던 검을 비틀어 빼내며 뒤로 물러섰다.
취월걸개의 손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만이 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너희 실력의 전부더냐?”
취월걸개가 물었다.
이전까지의 장난기 있는 얼굴이 아닌, 진중한 얼굴이었다.
“그게 아니면…. 상대가 나라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야?”
그가 말하며 하현을 한 번, 남궁민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하현은 몸을 일으켜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후에 취월걸개에게 말했다.
“사부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뭐가?”
하현이 씨익 웃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게 전부냐고 하시니까요.”
취월걸개는 바라던 답을 들었다는 듯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큭큭. 그렇지? 실망할 뻔했지 뭐냐.”
하현은 이번에는 제대로 검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사부님이 형님의 검을 쳐낼 수도 있었는데,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굳이 손으로 잡아 보인 것은 내가 진심으로 공격하더라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야.’
생각을 마친 하현은 슬쩍 남궁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궁민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취월걸개 어르신이라고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하셨을 리 없다.’
취월걸개와 함께한 지도 벌써 한 달여.
남궁민은 그에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의…. 아니, 특히 하현이의 가르침에는 무엇보다 진심이신 것.’
비록 그 방법이 매우 투박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가 생각을 다 마쳐갈 때쯤.
하현이 발을 굴렀다.
툭-
가볍게 디딘 것 같았지만, 하현의 신형은 멀찍이 나가 있었다.
“그래. 이거지!”
취월걸개가 진중한 하현의 얼굴을 보고 소리쳤다.
하현은 정말로 취월걸개를 베어낼 듯이 검을 움직였다.
스아악-!
특별한 초식 없이 간결하게 휘두르는 검.
다만 하현의 손에서 취월걸개의 몸까지의 가장 최단거리를 찾아서 내지르는 검이다.
취월걸개는 마치 하현의 몸에서 검이 튀어나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쩌엉-
하지만 찔러 들어오는 검은 옆에서 쳐내면 그만.
취월걸개가 그의 손바닥으로 하현의 검을 쳐내자 징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터졌다.
휘릭!
하지만 하현은 취월걸개가 치는 방향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취월걸개의 힘까지 역이용하는 돌려 베기였다.
파악!
이번에 하현의 검을 막아낸 것은 취월걸개의 다리였다.
취월걸개는 공중에 검을 막은 다리를 축으로 삼아 반대 다리로 하현을 차 냈다.
퍼억!
하현은 재빨리 팔을 들어 다리를 막았다.
막은 팔이 얼얼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사부님. 각법도 하실 줄 아셨던 겁니까?”
“평생 다리를 써왔는데, 이 정도를 못 할까 봐?”
하현이 한숨 돌리는 사이, 이번에는 남궁민의 차례였다.
우르릉- 콰르릉-
남궁민이 검을 좌, 우로 한 번씩 털어내자, 우레가 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남궁민이 취한 기수식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가볍게 검을 드는 기수식이 아니었다.
마치 엄청나게 무거운 중검을 들고 있는 듯 양손으로 검병을 말아쥐는 듯한 기수식이었다.
섬전십삼검뢰 제 팔 검식 창청폭강
閃電十三劍雷 第 八 劍式 蒼靑爆降
창청폭강은 섬전십삼검뢰에서도 가장 상승의 무공이었다.
섬전십삼검뢰라는 무공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섬전십삼검뢰는 총 여덟 개의 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 개가 유실된 것인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는 남궁무룡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력한 무공이지만, 아직은 미완의 무공.
역설적이게도 이 대결은 생사결이 아니기에 남궁민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강의 무공을 꺼내 들 수 있었다.
빠드득! 빠지직-
남궁민의 몸에서는 이전과 같이 터지는 천둥소리가 아니라, 거대한 전류가 흘러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창청폭강이로구나!”
취월걸개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는 창청폭강을 단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정마대전 당시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잘 안 나는 남궁세가 무사가 펼쳤었다.
그는 곧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나라고 해도, 대충 받으면 안 되겠는데?’
남궁민이 풍겨오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고오오오-
취월걸개가 양손을 허리에 붙이고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펼치려 하는 초식은 강룡십팔장에서도 가장 패도적인 포식인 항룡유회(亢龍有悔).
강맹한 기운으로 대지를 쓸어버리는 창청폭강을 상대할 취월걸개의 성명절기였다.
“와라!”
“크아아압!”
구우우웅- 콰앙!
두 기운이 부딪히자 거대한 소리가 터졌다.
휘이이이익-!
“크읍!”
하현은 터져 나오는 강풍에 눈을 뜨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푸스스-
자욱하게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두 인영이 그 사이에서 나타났다.
“쿨럭.”
그중에 하나는 울컥 피를 토해낸 남궁민이었고, 또 하나는 남궁민의 검격에 찢겼는지 너덜너덜해져 넝마가 된 옷을 입었지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남궁민을 걱정하는 취월걸개였다.
“민아. 괜찮으냐! 아니, 그러게 아직 제대로 완성하지도 않은 무공을 그렇게 극성으로 끌어올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하지 않았느냐!”
“거의 다 됐…. 우웩!”
“말하지 말아라. 이 미련한 것.”
남궁민은 순식간에 파리해진 얼굴이었건만, 무공을 거의 성공시킨 것은 또 기분이 좋은지 웃는 낯이었다.
“이 와중에도…. 너희들은 정말 정도를 모르는구나.”
“정도를 모르시는 건 어르신…. 쿨럭!”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하현도 그들의 모습에 할 말을 찾지 못할 때, 그의 뒤편 멀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오두막에서 도망쳐 나온 장노야와 장소유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부님. 민형님. 장노야입니다.”
하현이 서둘러 말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이 상황을 이미 지켜보고 있던 장노야였다.
“들킨…. 건가?”
“들킨 거면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사부님?”
취월걸개 역시 별다른 방법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 때.
장노야가 소리쳤다.
“청, 청룡신검이 졌다니!”
하현과 남궁민, 그리고 취월걸개는 장노야의 외침을 듣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끄덕-
그들은 장노야와 장소유에게 보이지 않도록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현이 소리치며 취월걸개에게 달려들었다.
“노야! 어서 소저를 데리고 산 아래로 도망가세요!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크흡. 고맙네! 고마워!”
그와 그의 딸을 위해 희생하는 무인을 두고 도망치는 것도 벌써 두 번째.
장노야는 눈물을 쏟으며,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의 손에는 막내딸의 손을 꼬옥 붙잡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