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장노야와 장소유가 산 아래로 달려가고.
취월걸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법 눈치라는 것이 생겼구나.”
“사부님께서 잘 가르쳐준 것이죠.”
하현은 대답하면서도 취월걸개를 빤히 바라보았다.
취월걸개는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는지 킥킥 웃었다.
“꼬맹이. 너도 제대로 해보고 싶은 거구나.”
하현이 씨익 웃었다.
이미 하현에게 계략이니 뭐니 하는 것은 뒷전이었다.
신경 써야 할 장노야도 이미 산 아래로 내려간 상황.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 같아서요.”
하현은 말하며 어느새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나무에 등을 대고 있는 남궁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약하게 내상을 입었는지 배에 손을 올리고 있었지만, 얼굴은 더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참내. 이건 뭐. 사부를 어떻게 아는 거야? 이건 무공 시험대상도 아니고.”
“어…. 그거 맞는데요?”
“뭐라고?”
하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하하. 나쁜 뜻은 아니고요! 사부님 정도 되니까, 제가 최선을 다해서 무공을 펼쳐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남궁민이 멀리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은망덕한 것들.”
말과는 다르게 취월걸개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럼 들어와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
취월걸개는 이제 볼 사람도 없으니 복면을 벗어 던져버렸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장 명확하게 알 기회야.’
지난 혈랑과의 전투 이후에 십팔나한진과도 맞붙었고, 교룡문주와도 일전을 벌였지만, 하현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마치 밥을 먹다가 중간에 덜 먹은 느낌이랄까?
그 이유는 너무나도 뻔했다.
‘강자와의 싸움이 아니었지.’
하현은 최근 남궁민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중이었다.
남궁민이 왜 그렇게 강자와의 싸움을 원하는지.
세상을 떠돌며 강자와 붙어보고 싶은지.
강자와의 싸움은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쾌감을 주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고되고 힘든 훈련을 웃으며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실력이 향상될수록, 더욱더 강자와 붙을 수 있게 해주니까.
“후우-”
하현은 심호흡을 내쉬며 검을 치켜들었다.
이런 기회는 흔히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조금 전의 부딪힘으로, 취월걸개와 자신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기에 더욱 좋은 기회다.
하현이 정말 최선을 다해도 취월걸개가 죽거나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무슨 무공을 펼쳐야 할까.’
아주 잠시 고민하던 그가 취한 것은 월광검법의 기수식.
창궁무애검법 역시 하현이 아는 가장 고절한 검법 중의 하나였으나, 숙련도에 있어서만큼은 월광검법의 절반도 미치지 않는다.
남궁민은 이번 기회를 미완의 무공을 구현해보는 데 사용했지만, 하현은 그의 현재 수준을 명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데 쓰기로 했다.
스으윽
검이 아주 천천히, 천천히 움직인다.
그 검을 보는 취월걸개의 눈썹이 올라갔다.
“월광…. 인데, 내가 저번에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하현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답이다.
월광검법은 애초에 하현이 창안한 검법.
처음 팽헌홍의 혼원벽력도를 보고 이 검법을 만들었을 때와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동작은…! 규지검법(叫枝劍法)?”
하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빙긋이 미소를 올렸을 뿐.
그의 월광검법은 어느새 하현의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개방의 방주인 천애신개에게 얻은 깨달음.
십팔나한진의 묘리, 그리고 월룡의 의지까지.
구오오오-
하현은 천천히 기운을 모았다.
실전이라면 사실 이렇게까지 천천히 운용할 수도 없을 것이지만, 취월걸개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하군.”
취월걸개는 그런 하현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현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실로 경이로웠다.
“검법이 변화한다니.”
보통 검법을 처음 익히게 되면 그 검법의 태와 형은 변하지 않는다.
그 검법에 대한 이해도와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더해져 그 깊이가 깊어질 뿐이다.
허나 하현의 검법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중이다.
자신이 창안한 검법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야. 겨우 그게 다일 리가 없지.”
취월걸개는 그 언젠가 검존 남궁무룡이 하현을 보며 떠올렸던 생각을 똑같이 떠올리고는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대종사…….’
그가 하현에 대한 결론을 내렸을 때.
검에 집중하고 있던 하현이 고개를 들어 취월걸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대로 검을 내질러 왔다.
단순한 찌르기로 보였지만, 만월검법만의 변화의 묘가 가득 담긴 검이었다.
“변(變)은 강(姜)으로 누르는 법.”
취월걸개가 하현을 향해 양손을 허리에 붙이는 익숙한 기수식을 취했다.
그가 알고 있는 초식 중에 가장 강맹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초식.
항룡유회였다.
고오오오-
취월걸개의 주변으로부터 기파가 몰아친다.
“하아압!”
“타압!”
쯔어엉-!
하현의 검과 취월걸개의 육장이 부딪히자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남궁민 때와는 다르게 한 번에 결판이 나진 않았다.
“제법이구나!”
하현은 영리하게 부딪히고 난 뒤의 후폭풍을 몸으로 견뎌내지 않고, 바닥을 굴러 피해내 버렸다.
그리곤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취월걸개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만월검법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혼신의 일격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조금 전의 만월검법이 중검(重劍)이었다면 지금의 만월검법은 쾌검(快劍)이다.
사사샥! 샤악!
하현의 검이 여러 궤적을 그리며 취월걸개에게 쏟아졌다.
취월걸개는 그 검들을 보고 막는 것이 아니라, 잔발을 놀리더니 검을 하나하나 피하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어찌나 아슬아슬하게 피했는지, 취월걸개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나풀나풀 날렸고, 가뜩이나 넝마 조각이나 다름없던 잠행복에는 계속해서 바람구멍이 숭숭 뚫렸다.
빠악!
“크윽!”
취월걸개는 그 와중에도 하현에게 몇 발자국을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바닥을 명중시켰다.
하현은 어깨에 받은 충격이 가볍지 않다고 느꼈다.
‘제대로 진기를 끌어올리지도 못하셨을 텐데.’
부족한 진기임에도 강룡십팔장의 기운이 담긴 취월걸개의 손은 둔기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강룡십팔장 제십육 장. 쌍룡취수(雙龍取水)다.”
하현이 뒤로 주춤한 틈을 놓칠 취월걸개가 아니었다.
그가 마치 선언하듯 하현에게 초식의 이름을 가르쳐줌과 동시에 양손이 마치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는 듯 현란하게 움직이며 하현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퍼버벅- 퍼벅!
하현은 결국 모든 공격을 막지 못하고, 몇 대는 몸에 허용하고 말았다.
“으읍!”
하현은 일단은 취월걸개의 사정거리 내에서 뒤로 벗어난 다음 토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취월걸개는 여기서 또 한 번 손속에 사정을 봐주었다.
그의 보법이라면 하현이 뒤로 빠지는 속도 그대로 따라붙을 수도 있었건만, 그는 하현에게 잠시의 시간을 주었다.
“봐주시는 거예요?”
“갑자기 그건 왜?”
“방금 저를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하현 역시 그것을 느꼈다.
그런데 하현의 물음에 취월걸개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무엇을요?”
“내가 끝내려고 마음먹었으면, 첫수에 이미 끝났을 것이다.”
“하하…! 그것도 맞네요.”
쾅-!
취월걸개의 말에 맞장구쳐주던 하현이 별안간 진각을 밟아왔다.
그리고 취월걸개는 이 진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스슥-
제 자리에서 꺼지는 듯 사라진 하현이 순식간의 취월걸개 앞에 나타났다.
쒜에엑!
그리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깨끗한 동작으로 검을 베어갔다.
취월걸개는 양손에 기운을 잔뜩 담아 하현의 검을 맞이했다.
그때였다.
공기를 찢으며 취월걸개에게 날아가던 검이 별안간 하늘을 향했다.
“엇?”
후웅!
하현의 검과 부딪힐 것이라고 예상했던 취월걸개는 아주 찰나 허공을 때리며 주춤했고, 하현에게는 그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빠악!
드디어 취월걸개가 공격을 허용했다.
검을 높게 치들고 있는 덕에 하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리를 이용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취월걸개의 옆구리에 제법 묵직한 발차기를 날렸다.
꽤 충격이 들어갔는지 여유 넘치던 취월걸개의 미간이 약간 좁혀졌다.
부웅! 부웅! 빠악!
하현은 몰아치듯 다리를 놀렸다.
그가 알고 있는 각법은 청룡각에서 배운 기초적인 각법 뿐이지만, 하현은 마치 오랫동안 각법을 배우고 익혀온 사람처럼 능숙해 보였다.
“쯧! 또 내 것을 뺏어갔구나.”
취월걸개가 쏟아지는 하현의 다리를 막아내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하현은 조금 전 그가 보여준 각법을 기반으로 그가 알고 있는 다른 검법들을 각법으로 변환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그리고 또 찾아온 기회.
하현은 하늘을 향해 올리고 있던 양팔에 쥐어진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스하악!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검이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할 정도의 강력한 검이었다.
‘진짜 죽인다는 마음으로!’
하현은 검에 진심을 담았다.
취월걸개도 머리 위에 떨어지는 검의 존재를 의식하고, 하늘을 향해 두 장을 쳐올렸다.
쩌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현이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런 하현을 보며 취월걸개가 빙긋 웃었다.
“다 한 것이야?”
하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에게는 이제 남아 있는 수가 없었다.
그러자 취월걸개가 한층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했다. 그러면 이제 좀…. 너도 맞자.”
위기를 감지한 하현이 급하게 몸을 뒤로 뺐으나, 상대는 진심으로 나온 취월걸개였다.
취월걸개는 어느새 하현을 따라잡아 옆구리에 각을 날렸다.
퍼억!
“으악!”
하현은 그 고통에 그만 옆구리를 붙잡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낄낄. 받은 건 그대로 돌려줬다.”
“사부님이 되어서 그렇게 공과 사 철저히 하시기에요?”
“사제지간이니까 더욱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취월걸개는 고대로 돌려주지 못했다면 오늘 밤 꿈자리가 사나웠을 것이라며 꿍얼거리더니 하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엄살 피우고 있을 거야? 빨리 일어나.”
하현은 취월걸개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분명 패배하고 얻어맞기까지 했건만, 하현은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제 수준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 멀었지?”
“네…. 그러네요.”
“그만큼 더 공부하고 수련해라. 그게 제일 빠른 길이야.”
하현이 방긋 웃었다.
“네. 사부님.”
그런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운후와 유정협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꽤 심각한 혈전을 벌였는지, 옷은 넝마 조각이 다 되었고, 또 둘 다 성한 곳이 하나 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잊은 채 입을 벌리고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이오?”
“그러게 말이오…….”
둘 다 평생을 무림 밥 꽤 먹었다는 자들이건만, 이들이 보여주는 신위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운 형. 앞으로는 저런 사람들과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니오?”
“그렇…. 소.”
“힘내시오…….”
조금 전까지 죽자사자 싸웠던 그들인지만, 어느새 동지애가 피어올랐는지 유정협이 운후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어이, 거기 둘! 끝났으면 빨리빨리 내려와!”
“네, 넵!”
취월걸개가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부르는 통에 그들의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잠시 후, 모두를 앉혀 놓은 취월걸개가 말했다.
“좋다. 이제 너희 셋은 장 영감네 장원으로 돌아가라. 다들 옷 입은 것도 그렇고, 아주 적절하구나. 마지막 단계는 가장 간단하다. 우리는 이제 슬쩍 몸을 빼고 다른 곳에 숨어 있을 테니 너희는 돌아가서 흉수들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해라. 그래서 금도 도로 회수해왔다고 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현이 너, 이 궤짝을 다시 들고 돌아갈 수 있겠느냐?”
“네. 저는 괜찮은데, 민형님이 괜찮으시겠어요?”
남궁민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해졌던 안색에 슬슬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하현과 남궁민. 그리고 유정협이 출발하기 직전.
하현은 중요한 것을 떠올리고는 취월걸개에게 말했다.
“납치범의 신원은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지. 괜히 어딘지 모르겠다고 했다가, 수색을 한다 어쩐다 하면 골치만 아파져.”
“그러면 어디라고 해야 합니까?”
취월걸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곤 이미 생각해둔 대답이 있는 듯 곧바로 말했다.
“교룡문.”
“네?”
“우리는 교룡문의 문도였고, 너희가 격렬한 싸움 중에 죽이고 말았다고 해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취월걸개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